1. 파주시 출신 독립운동가, 박무병
성명 | 박무병(朴武丙) |
일문식 이름 | 카쿠가와 타케헤이(赫川武丙) |
생몰 | 1923년 5월 29일 ~ 1945년 2월 15일 |
출생지 |
경기도
파주군 교하면 송촌리 (현 경기도 파주시 송촌동) |
사망지 | 경성형무소 |
위패 | 국립서울현충원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박무병은 1923년 5월 29일 경기도 파주군 교하면(현 파주시 교하읍) 송촌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경성지방교통국 경성검차구 용산분구의 검차수(檢車手)로 근무하던 중 1944년 8월 20일경 용산역 안에서 동료인 길창순(吉昌淳)·양경순(楊景淳)·김수명(金秀明) 등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대동아전쟁에서 미군은 사이판섬을 점령하고 이곳에 임시사령부를 설치하고 있으며, 이곳을 기지로 일본 본토를 맹렬하게 폭격하여 이로써 일본은 패전할 것이다."
"조선인으로서 독립을 희망하지 않는 자는 없을 것이다."
같은 달 하순에는 길창순과 송을차(松乙且)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군 비행기가
큐슈를 폭격하기 위해 남선(南鮮) 상공을 통과하였고, 남선 지방을 폭격한 미군 비행사 중에 조선인 비행사가 있다."
이 일로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44년 12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육군형법 및 해군형법 위반, 안녕질서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45년 2월 15일에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4년 박무병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국립서울현충원에 그를 기리는 위패를 세웠다.
2. 서원구 출신 독립운동가, 박무병
성명 | 박무병(朴武柄) |
생몰 | 1887년 9월 23일 ~ 1979년 4월 15일 |
출생지 |
충청도 청주목 남이면 가마리 (현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가마리) |
사망지 | 서울특별시 성동구 군자동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박무병은 1887년 9월 23일 충청도 청주목 남이면 가마리(현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가마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0년 2월 16일 서울에서 김광제, 문탁(文鐸), 김영만(金榮萬), 이종만(李鍾萬) 등과 더불어 조선노동대회(朝鮮勞動大會)를 조직했다. 조선노동대회는 노동자의 상호부조와 인격적 및 지적향상을 목적으로 한 계몽적 노동단체로서 주로 지식계몽에 주력했다. 총재는 권직상, 회장은 김광제가 맡았으며, 박무병은 간사로 활동했다. 조선노동대회는 전국적으로 지부를 설치하고 지방의 기존 노동단체의 규합에 힘써 한때 회원이 8천여명에 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김광제의 갑작스런 사망과 내부 갈등, 재정난으로 활동이 위축되었다.
한편, 박무병은 1920년 5월 31일 서울에서 김영만, 이종만, 홍갑표(洪甲杓) 등 89인과 더불어 물산장려·상부상조·인권평등에 의한 세계평화의 확립을 취지로 하는 조선민단(朝鮮民團)을 조직하고 총무로 활동했다. 조선민단은 1920년 7월 17일 경성 중앙기독교회관에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강연회를 개최했다. 그와 임종연(林鍾淵)이 연사로 나서 각기 ‘때가 왔다’, ‘죽엄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순천자(順天者)가 역천자(逆天者)를 망하게 할 때가 왔다. 역천자인 일본을 망하게 하여 국권을 회복하여야 한다”라는 취지의 강연으로 천 수백여명의 청중들에게 독립의식을 고취했다. 그러나 이 일로 그는 경찰에 체포되었고, 조선민단은 1920년 7월 31일에 해산되었다. 그 는 1920년 12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은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출옥한 그는 1922년 아내가 병사하자 1923년 3월 승려가 되어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의 법주사(法住寺)로 들어가 속세와 인연을 끊고 일제의 멸망을 기원했다고 한다. 그후 1945년 2월 15일 법주사를 떠나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면에서 별채 암자를 지어 수도승 생활을 했다. 8.15 광복 후에는 승려로서 수도 활동에 전념했으며, 1956년 서울 성동구로 건너가 별채 암자를 지어 그곳에서 말년을 보내다 1979년 4월 1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박무병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