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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19:50:11

박대욱

파일:박대욱.jpg
성명 박대욱(朴大郁)
생몰 1893년 9월 22일 ~ 1968년 11월 18일
출생지 함경북도 경성군 주남면 용암리
사망지 전라북도 김제시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3. 친일 논란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그러나 1930년대 말부터 친일 행적을 벌인 사실이 밝혀지면서 서훈 박탈 논란이 일고 있다.

2. 생애

박대욱은 1893년 9월 22일 함경북도 경성군 주남면 용암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1 운동 당시 함경북도 경성군에서 3개 면민을 선동해 만세 시위를 주동하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몇달간 복역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주관한 연통제에 가담해 종성군 주남면 삼향학교 교사로서 동료교사인 임정발(林正發)과 함께 군자금을 모집해 임시정부에 전달하고 국내의 실태를 조사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20년 8월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논란의 여지가 많은 행적을 보였고(자세한 내용은 하단 설명), 8.15 광복 후 전라북도 김제시로 거주지를 옮겨 그곳에서 조용히 살다가 1968년 11월 1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박대욱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고, 1990년 12월 6일에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3. 친일 논란

2016년 8월 11일 뉴스타파 보도에 따르면, 박대욱은 1930년대 말부터 명백한 친일 행적을 보였다고 한다. # 뉴스타파의 조사에 따르면, 박대욱은 1931년부터 1942년까지 9년간 주남면 면장을 지냈다고 한다. 이용창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이에 대해 면장 이력이 있는 사람은 친일 행적을 보일 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 행정구역의 말단이 면인데요. 면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일제가 (식민지 수탈과 침략 전쟁 동원에) 굉장히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지역주민들을 통제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말단부터 윗조직까지 순차적으로 통제를 하고, 또 총체적으로 아울러서 일괄 통제하는 그런 방식이었기 때문에 면장이라던가 면협의 회원이라던가 이런 분들은 조선총독부의 가장 최하위 단위에서 지역 주민들을 통제하고 협력하도록 동원하는 그런 역할을 한 것이거든요."

일제가 1940년에 작성한 <지나사변공로자공적조서>에 따르면, 박대욱은 주남면 면장으로서 1937년부터 1940년까지 보리 539석, 짚 64,580kg, 건초 241,550kg, 모피 280매, 돼지 228마리, 돼지 가죽 28매, 양모 668kg 등을 중일전쟁에 참전하고 있는 일본군의 군수품으로 바쳤다고 한다. 또한 여론의 환기, 국방사상 보급 및 선전을 위해 "군, 면내를 순회 또는 집회를 이용하여 강연, 강화를 행하고 시국 인식, 국방 사상 보급에 노력함"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또한 박대욱은 각 부락에 보국저축회를 설립해 극력 저축을 장려했고, 국채 및 저축 채권의 소화(消化)에 노력해 예정 이상의 좋은 성적을 거뒀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거둬들인 국방헌금은 1,262원이었고, 애국기 헌납금도 200원이었다고 한다.

뉴스타파에 따르면, 2016년 7월 15일 국가보훈처에 공문을 보내 건국훈장 심사에서 친일 의심 행적이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이유 등에 대해 정식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답변을 듣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박대욱의 건국훈장 서훈을 둘러싼 논란이 불거졌지만, 박대욱은 현재까지 건국훈장 서훈자로 기록되었으며 그의 유해는 아직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