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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11-23 05:43:47

박낙현

파일:박낙현.png
1919년, 경성감옥에서 촬영된 사진.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87년[1] 8월 27일
경상도 의성현 조문면 대리동
(현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
사망 1957년 4월 6일
경상북도 의성군
묘소 국립신암선열공원 제5묘역-43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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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박낙현은 1887년 8월 27일 경상도 의성현 조문면 대리동(현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당시 조문면 대리동 교회의 목사로, 3월 8일 경상북도 대구부에서 열린 사경회(査經會)에 참석하기 위해 의성군과 대구부를 오가던 중, 대구 학생 독립만세시위를 목격했고 고향으로 돌아간 뒤 의성군에서도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심했다. 그는 3월 12일 교회 집사 윤용구(尹龍九), 교인 오상룡(吳相龍)과 함께 3월 18일 의성면 읍내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이튿날부터 의성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을 비롯해 동지들을 규합했으며, 자신의 집에서 태극기와 독립기를 제작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사전에 누설되었고, 일제 경찰은 3월 18일 아침부터 의성면 읍내 곳곳에 경찰관들을 배치해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 이날 오후 2시, 의성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학교를 박차고 나와 도동동에 있는 공자묘 뒷산에 모였다. 또한 여느 때보다 장꾼이 많자, 일제 경찰은 시장을 폐쇄시키고 학생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공자묘 뒷산으로 향했다. 이에 박낙현은 오후 2시경에 장꾼이 가장 많이 모인 쌀 시장에서 윤용구, 오상룡, 윤영주(尹榮柱) 등과 함께 장꾼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독립만세를 선창했다.

군중 수천 명이 이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외치자, 그는 이들의 선두에 서서 대로를 따라 행진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5일, 박낙현은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아 이에 공소하였으나, 같은 해 4월 2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심 판결이 취소되었을 뿐 형기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에 상고하였으나 1919년 5월 22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면서 결국 당일 경성감옥에 입소하여 옥고를 치렀다.

1920년 4월 26일 특별사면으로 출옥한 후에는 의성군에서 목회 활동에 전념하다가 1957년 4월 6일에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국립신암선열공원 제5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박낙현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1919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889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