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비 필스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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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럿 호네츠 영구결번 No. 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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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럿 호네츠 영구 결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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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ccac00> No. 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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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 필스 (Bobby Phill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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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788c> 샬럿 호네츠 No. 13 | |
<colcolor=#fff> 바비 레이 필스 2세 Bobby Ray Phills 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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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69년 12월 20일 |
루이지애나 주 배턴루지 | |
사망 | 2000년 1월 12일 (향년 30세) |
노스캐롤라이나 주 샬럿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서던 대학교 |
신장 | 196cm (6' 5") |
체중 | 91kg (200 lbs) |
포지션 | 슈팅 가드 |
드래프트 |
1991 NBA 드래프트 2라운드 45순위 밀워키 벅스 지명 |
소속 구단 |
수폴스 스카이포스 (1991~1993)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1992~1997) → CB 사라고사 (1993 / 스페인) 샬럿 호네츠 (1997~2000) |
등번호 |
14번 - 클리블랜드 13번 - 샬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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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전 농구선수이자 그 마이클 조던이 인정한 동포지션에선 최고의 수비수 중 한 명이자, 전 구단 영구결번인 빌 러셀을 제외하면 현재로선 샬럿 호네츠의 유일한 영구결번, 샬럿 호네츠의 캡틴이었으나 교통사고로 사망한 비운의 농구선수. 호네츠에서는 3년 밖에 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리더십과 활발한 지역사회 봉사 활동으로 모두의 귀감을 받는 그야말로 진정한 캡틴이었다.2. 생애
2.1. 데뷔 이전
1968년 루이지애나 주 배턴루지에서 아버지 바비 필스 시니어와 어머니 메리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애칭은 '롭'이었으며, 그가 태어날 당시 아버지는 남베트남에 노동자로 파견됐고, 어머니도 생활고에 시달렸기에 어릴 적부터 보육원에서 자랐다.앨라배마 주 터스키기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니던 도중 당시 학장이던 아버지의 부탁으로 유명 흑인대학인 서던 대학교 사범대학 부속 실험학교(Southern Laboratory School)로 전학하여 농구와 테니스, 육상 등에 능한 만능 스포츠맨이 됐고, 부모의 뜻에 따라 학업에도 열의를 보였다.
이후 서던대 동물학과로 진학하면서도 학업과 운동에 여전히 열의를 보였고, 알파 파이 알파 동호회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그는 농구부에서 벤 조브(1933~2017)[1] 감독의 지도를 받으며 대학 상급생 시절 경기당 3점슛(4.39)을 기록했고, 1989년 NCAA 전국대회와 1990년 NIT 진출에 각각 공헌하며 1991년에는 올 SWAC에 뽑혔다.
1991년 NBA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45픽으로 밀워키 벅스에 지명됐지만, 실력이 프로급에 미달해서 한 번도 뛰지 못한 채 CBA 팀 수 폴스 스카이워커스에서 뛰다가 시즌 말에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와 10일 계약을 맺어 정식 데뷔했다.
2.2. NBA 경력
2.2.1.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당시에는 브래드 도허티-마크 프라이스-래리 낸스 빅3의 그늘 아래서 선배 대니 페리[2]처럼 팀 내에선 비중이 적긴 하나, 필스는 좋은 수비력으로 NBA에서 끈질긴 윙 수비수로 알려지게 되었다. 6피트 5인치, 220파운드의 그는 농구 선수라기보다는 NFL 라인배커와 더 닮았다고 한다.1994년과 1995년에 빅3가 서서히 팀을 떠나자 터렐 브랜든이 새 리더가 되면서 필스 자신도 팀의 중견이 됐고, 1996년 마이클 조던은 필이 지금까지 상대했던 수비수 중 가장 강한 수비수였다고 말했다. 이때 NBA 디펜시브 세컨드 팀에 선정되었다.
2.2.2. 샬럿 호네츠
이후 1997년에 호네츠로 팀을 옮긴 필스는 뛰어난 리더십을 통해 팀을 이끌었고, 자신의 이름을 딴 교육재단을 세워 지역사회에도 활발히 봉사하는등 호네츠 팬들에게 호감을 주었고 이내 호네츠에 캡틴으로 불렸다. 하지만 팀의 성적이 좋지 않아서 주장으로서 책임감 때문에 스트레스를 과하게 과하게 받고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공동주장을 맡고 있던 데이비드 웨슬리와 레이싱을 제안했을때 수락하고 만다.2.3. 사망
팀의 주장으로써 막대한 스트레스를 받은 필스는 데이비드 웨슬리와 레이싱[3]을 하였으나.....2000년 1월 12일, 그는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말았다. 필스 본인이 160km/h(100mph)가 넘는 속도로 동료 데이비드 웨슬리를 뒤쫓고 있을 때, 그의 포르쉐가 돌면서 다가오는 차들과 마주쳤다. 결국 그 차는 다른 차를 들이받았고, 차는 결국 미니밴에 의해 후방에 부딪혔다. 두 차량의 운전자들은 생존하였지만, 필스는 안타깝게도 현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발표되었다.( ESPN 기사)
경찰 보고서에 따르면 필과 웨슬리는 "이상하고 무모하고 부주의하거나 공격적인 자세로 운전을 하고 있다"고 했다. 웨슬리는 나중에 경마 혐의를 벗은 후 난폭 운전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비참하게도 원래 필스는 사생활이 깨끗한 선수로써 이런 일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을 테지만 당시 팀의 성적이 좋지 않아서 주장으로서 책임감 때문에 스트레스를 과하게 받고 있던 상황이었고. 당시 공동주장을 맡고 있던 데이비드 웨슬리가 레이싱을 제안했을 때 안타깝게도 필스는 수락하고 말았고, 그가 죽자 자동차 경주를 제안했던 웨슬리 본인도 심한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시간이 지나 바비 필스의 등번호 13번은 샬럿 호네츠에 영구결번되었고, 연고지가 이전되어도 뉴올리언스 호네츠-펠리컨스에서도 기념되었으나, 2014년 족보 정리와 함께 뉴올리언스에서는 해제되고[4] 샬럿 밥캣츠-호네츠가 대신 계승하면서 샬럿의 영원한 캡틴으로 남게 되었다.
3. 여담
- 유족으로는 부인 켄달과 슬하 1남 2녀가 있는데 특히 아들 바비 필스 3세(1996년생)는 아버지처럼 농구선수의 길을 택하여 '트레이'라는 애칭으로 예일 대학교 재학 시절 농구부에서 뛰었고, 2019년 NBA 드래프트에 신청했으나 탈락하여 샬럿 호네츠 산하 G리그 팀 그린스보로 스웜에서 2020년까지 뛰었다. 차녀 커스티(1998년생)도 2016년 플로리다 걸프 코스트 대학교에 입학하여 2022년 졸업 시까지 농구부에서 뛰었으며 이후 의학 공부에 전념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