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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04 14:28:47

민병갈



1. 개요2. 생애3. 천리포 수목원을 세우다4. 수상5. 같이 보기


Carl Ferris Miller(귀화전 이름, 칼 페리스 밀러), 閔丙葛 (1921.4.5 ~ 2002.4.8)(향년 81세)

1. 개요

대한민국에 최초로 귀화한 미국 태생 인물들 중 한 명으로, 1979년 귀화한 은행가이며 그리고 식목 관리사. 태안군에 위치한 천리포수목원의 설립자, 천리포수목원에 있는 나무들은 모두 그가 30년 동안 전국 각지에서 모은 묘목들이 자란 것으로, 오래전부터 한국에 관심을 가져온 몇 안 되는 미국인이며, 나무와 결혼했다고 하며 결혼하지 않으신 분이다.
또한 그는 숙련된 콘트랙트 브리지[1] 기사였고 한국 국가대표팀과 함께 세계를 여행했다. 그는 많은 가치 있는 원인에 시간과 돈을 주었고 50명 이상의 아이들의 지속적인 지원을 포함하여 많은 한국인들에게 개인적인 도움을 주었다.

2. 생애

펜실베이니아주 피츠턴 출신인 그는 대학에서 파이 베타 카파 화학을 전공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그는 볼더에 있는 콜로라도 대학교의 미 해군 일본어/동양어 학교에서 일본어를 공부했다. 그는 계속해서 해군 정보 장교로 일했다. 1945년에 그는 여전히 오키나와 섬에 있는 일본군을 찾기 위해 배정되어 낮에는 마을 주민들을 심문했고 밤에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음식과 다른 지원을 받기 위해 돌아왔었다.
윌리엄 C.셔먼에 따르면 1949년 서울 경제협력국 성과 검토 부서의 대리인이었다. 1950년에 한국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는 일본으로 대피하여 1951년에 돌아왔다. 1953년 밀러는 1980년대 초에 은퇴할 때까지 한국의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에서 일했다. 그는 한국어를 유창하게 되었고 나중에 여러 한국 금융 회사에서 재무 고문과 중개인으로 일했고, 굿모닝 증권에서 은퇴하게 된다.

3. 천리포 수목원을 세우다

1962년 주말 동안의 수영 여행을 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땅 지주들에게[2] 태안군의 천리포 마을 일대를 사도록 설득당했고, 결국에 땅을 사게 되었다. 이 곳은 1970년까지 유휴지였다 서울의 대기오염을 싫어한 밀러가 집을 이곳으로 이사하게 된다. 그는 이곳에서 몇 그루에 나무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묘목을 구해 심게 되었고, 이후 더 몇 그루를 심어나감과 동시에 땅을 팔기 위해 접근한 주민들을 통해 땅을 더 사들이고, 더 많은 나무를 심게 되었다.
그는 나중에 국제 원예 사회에서 인정하는 수목원을 만들 것이라는 걸 전혀 몰랐고, 국적을 포기할 것이라는 생각도 없었고, 한국 정부가 민간인에게 수여할 수 있는 최고의 영예를 받을 것이라고는 더더욱 몰랐다고 말했다. 그는 그냥 나무 몇 그루를 심고 싶었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수목원은 밀러 씨가 수집, 재배 및 재배하는 데 40년 동안 보낸 13,200종 이상의 나무와 식물의 수백만 가지 사례를 자랑하며, 수목원 부지에는 그가 그곳으로 이사하여 개조한 한옥이라는 전통적인 기와 지붕 목조 주택이 있다.

4. 수상

밀러와 그의 수목원은 영국의 왕립 원예 협회의 인정을 포함하여 많은 상을 받았다. 자유 재단과 한국 정부. 2002년에 그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대중의 금탑 산업훈장을 받았다.

2005년, 밀러는 사후에 한국의 임업 부문에 대한 천리포 수목원의 공헌으로 산림 명예의 전당상을 수상한 다섯 번째 사람이 되었다.
국제 수목학 협회는 천리포 수목원은 세계에서 12번째로 뛰어난 수목원(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인정받는 수목원)이라는 칭호와 할리 수목원상을 수여했다.

5. 같이 보기


[1] 52패 카드를 쓰는 트릭 테이킹 카드 게임. [2] 이들은 캐시푸어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