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三井三池三川炭鉱炭塵 (しん) 爆発(미쓰이 미이케 미카와 탄코 탄진 바쿠하츠)1963년 11월 9일 일본 후쿠오카현 오무타시 미카와 정의 미쓰이 광산 미이케 탄광 미카와 수갱에서 일어난 분진폭발 사고.
무려 458명이 사망한 사고로,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 다음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에서 발생한 최악의 인명피해를 낳은 비자연재해 사건이다.
2. 미이케 탄광의 역사
1469년에 한 농부가 광맥을 발견한 뒤 간헐적으로 개발이 진행됐다. 그러다 1872년에 탄광이 국영화되면서 본격적으로 석탄 생산이 시작됐다. 1881년엔 탄광 노동자 3103명 가운데 2144명이 죄수로 채워졌고, 1889년엔 미쯔이 광산회사가 탄광을 불하받았는데 죄수 노동자들도 같이 인수받았다. 이들은 계속해서 저임금 노동자로 일해야 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은 석탄을 더 얻어야 한다는 이유로 이곳에 조선, 중국 그리고 대만 출신 노동자들 까지 일을 시켰다. 이들은 합숙소에서 감금되어 지내며 저임금으로 착취당한 데다 도망치다 잡히면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그렇게 미이케 탄광에 강제 연행된 조선인 수만 무려 2297명에 달했다. 1945년 패전 직후 석탄 생산량이 이전의 절반 이하 수준으로 떨어져 탄광은 재편기를 맞이했다. 전후 부흥기 시기엔 미쓰이 광산의 미카와 갱은 주력 수갱으로 사용됐고 쇼와 덴노가 이곳을 시찰하러 오기도 했다.
전쟁 후, 연합국최고사령부가 석탄보다 석유에 더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태평양 연안에 정유 시설들이 조업을 재개했고 일본 석유회사들은 칼텍스, 셸 같은 자본과 제휴를 시작했다. 동시에 탄광 노동자들의 인권이 위기에 처하면서 미이케 투쟁이라고 하는 파업이 일어났고 광산과 노조 간에 차질이 생겨 안전 대책이 밀려나 버렸다. 1959년 미이케 탄광 측은 10월에 4580명의 희망퇴직을 접수받았고 12월엔 퇴직 권고를 거부하던 노동자 중 1278명을 정리 해고했다. 이 때문에 미이케탄광노조는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 지원 하에 313일 간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듬해 3월에 사측 개입으로 긴급중앙위원회에서 노조가 분열돼 제2노조가 결성되면서 투쟁이 격화되었고 6월부터는 전학련까지 가세했으나 11월에 노조의 패배로 끝났다. 훗날 미이케 투쟁은 '총자본 대 총노동의 투쟁'으로 불렸고 이후 '일본 노동운동의 분수령'으로 평가받았다.
미이케 탄광은 이후 일본이 에너지를 석탄에서 석유로 전환하면서 생산단가를 낮추었다. 광부 1인당 월간 생산량을 1958년 6월 14톤에서 1963년 10월 44톤까지 끌어올리면서 생산단가를 낮췄다. 그런데 이렇게 생산량을 갑작스레 늘리면서 탄광 내에 탄진(석탄가루)들이 점점 많아졌는데 너무 쌓여 아예 분진폭발을 걱정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폭발 방지책으로 탄진 제거와 주기적인 물 뿌리기, 돌가루 살포 등을 하긴 했으나 이마저도 처리작업 인력을 17명에서 2명으로 줄이는 바람에 제대로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탄광에서 주로 일어나는 폭발 사고는 메테인 가스 폭발이었으나 미이케 탄광은 메테인 가스 발생량이 적어 사측에선 이 위험성을 적게 느꼈고 탄진 폭발은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다.
3. 사고 당시
1963년 11월 9일, 당시 탄광에는 광부 1403명이 근무 중이었다. 미이케 광업소 미카와 제1사갱의 갱구에서 약 1,600m 부근 사갱은 당시 석탄을 캐느라 탄광 내에 탄진이 굉장히 많이 떠다녔는데 광차 한 대가 탈선하면서 스파크가 일어났다. 스파크는 석탄 가루에 튀었는데 공기에 석탄 가루 농도가 워낙 짙어서 초대형 분진폭발이 일어났다.안에서 근무 중이던 광부들은 위험에 처했다. 광산 폭발로 광산이 무너질 위기에 처한 데다 분진폭발로 인해 불안전연소한 석탄가루가 일산화탄소를 다량 만들어내 질식사할 위험에 처한 것이다. 거기다 사측은 갱 내에 신선한 공기를 투입한다며 대형 팬을 가동했는데, 평소라면 탄소가 갱 내에서 밖으로 빠져나가겠지만 하필이면 팬이 가동하는 바람에 나가지 못하고 갱 안에 고인 탓에 더 위험해졌다. 노동자들은 대피하러 입구로 향하다 일산화탄소가 흘러들어와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참변을 당했다.
오후 3시 40분, 미쓰이 광산이 사고를 인식했으나 신고를 늦게 하는 바람에 구조대가 늦게 도착했다. 미카와 광순 구조대는 사고가 일어난 지 2시간 가까이 지난 오후 5시 28분에나 도착했으나 인원은 23명밖에 되지 않았고 산소 마스크마저 없었다. 당시 이미 미카와 갱 내에는 일산화탄소 농도가 6%[1]에 달했다. 일산화탄소의 특성상 숨을 쉴수록 몸에 더 퍼지고 그만큼 신체적 후유증이 늘어나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하필이면 사측이 중증으로 추정되는 노동자들을 걸어서 직접 대피시키도록 지시하면서 피해가 더 커졌다. 이중 200명이 넘는 사람들은 아예 다시 갱 안으로 들여보내기까지 했다.
사측은 한 술 더 떠서 생존자 939명 중 412명만 병원에서 검사를 받게 하고 527명은 그대로 귀가시켰다. 귀가한 사람들이 안정을 취했다면 그나마 나아졌겠지만 회사는 귀가한 노동자들을 따로 관리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일산화탄소 초기 중독 증세를 보이는 줄도 몰라서 평소처럼 행동했기 때문에 피해가 더 커졌다. 거기다 병원에 옮겨진 환자들도 상황이 나빴다. 미이케 탄광 부속병원엔 병상이 384개 있었으나 빈 병상은 83개에 불과했다. 병원은 361명만 수용했고 나머지 환자들은 다른 병원들로 이송했다. 그러면서 제대로 된 처치나 투약을 받지 못한 인원들도 많았다.
사고로 사망한 사람은 무려 458명에 달했고 일산화탄소 중독 환자도 839명이나 됐다. 사망자 중 20명은 폭사, 나머지 사망자는 전부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했다. 이 사고는 일본 역사상 최악의 탄광 사고로 기록됐다.
사고 당일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에선 츠루미 사고가 일어나 161명이 사망하고 120명이 부상을 입는 사건이 있었다. 초대형 사고가 같은 날 2번이나 일어난 날이라 일본에서 이 날은 피로 물든 토요일(血塗られた土曜日)로 불렸다.
4. 사고 이후
미쓰이 미이케 탄광은 사고 이후 경영이 악화되면서 1997년 3월 말 완전히 폐광됐다. 하지만 후유증 환자는 제대로 보상받지 못했고 주변에서 가스환이라고 불리며 이지메까지 당했다.후쿠오카현 경찰과 지방 검찰청은 미쓰이 미이케 탄광 간부를 기소하려 했으나 후쿠오카 지검 검사 다수가 갑자기 전근을 가 버렸다. 새로 구성된 검사 그룹은 사고 원인을 과학적으로 입증하기가 불가능하다며 미쓰이 미이케 탄광 간부들에게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피해자와 유가족, 일산화탄소 중독 후유증 환자들에게 보상하는 문제는 20여 년이 넘게 걸렸다. 노조는 사망자에게 1인당 보상금 100만 엔을 요구했으나 40만 엔만 지급됐다. 1987년 7월 20일, 화해파 원고단 454명은 후쿠오카 지방 법원이 제시한 화해안으로 합의금 약 9억 1천만 엔을 받아들였다. 허나 화해에 참가하지 않은 32명은 새 원고단을 차렸고, 이 소송에 앞서 먼저 제소했던 4가족의 소송은 계속됐다.
1993년 3월 26일, 후쿠오카 지방 법원은 갱도 속에 다량의 탄진이 쌓이지 않게 관리를 해야 했으나 이를 소홀히 했다며 회사의 과실 책임을 인정하는 손해배상을 명령했고, 1998년 대법원은 판결을 확정했다.
생존자들은 당시 노동재해보험 제도의 문제 때문에 상당한 후유증을 겪었지만 3년 뒤 보험급여 중단을 통보받아야 했다.
현재 오무타시 쇼와정의 엔메이 공원 한쪽에 미카와 광산 대재해 순직자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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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기중 0.16% 정도만 돼도 20분 안에 두통이 심해지고 정상적인 상황판단이 힘들어지며 1%가 되면 10분 이내에 사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