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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2 07:46:47

문성술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1. 개요

북한의 정치인.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김정일의 최측근이었으나 심화조 사건으로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2. 생애

1925년 3월 15일, 평안남도에서 태어났는데, 6.25 전쟁 중 가족을 많이 잃은 전사자 가족으로 좋은 성분이 되어 일찍이 당료로 발탁되었다. 평안남도 강동군 흥룡탄광 공청 위원으로 배치된 것을 시작으로 중앙당학교 기본반을 수료한 후 1949년 강동군당 조직부 부부장이 되었다.

전후 1954년 평안남도 조직부 부부장을 거쳐 1956년 10월, 평안남도 당위원회 조직부장, 1959년 11월, 강서군 당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한편 김일성이 청산리 방법을 제시하기 직전에 김일성의 눈에 띠어 군당위원장에 배치, 청산리 방법 창시에 관여했다. 한편 김정일이 대학시절에 강서군당에 자주 놀러가곤 했는데 이 덕분에 김정일과도 인맥을 하게 되었다고 하고, 김정일 대학 졸업논문 작성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1962년 10월,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964년 10월, 계속해서 농업실태가 좋지 않았던 함경북도 농촌경리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67년 11월,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1968년 3월 주 인도네시아 대사로 부임하였다. 이는 문성술의 건강이 나빠지자 김정일이 요양하라고 외국에 보내준 것이라고 한다. 건강이 회복된 이후 1972년 11월, 리장화가 후임 대사로 임명되면서 귀국하였다.

귀국 후 1973년 6월, 평안남도 행정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었는데, 최영림 회고에 따르면 소위 편지 사건으로 처벌을 받았다. 그는 자카르타에서 같이 일하던 대사관 직원들에게 북한 소식을 편지로 알려주었는데, 무심결에 간부정책에 대한 중요한 내용들까지도 편지로 알려주었다가 석달 동안 승용차를 압수당하는 벌을 받았다. 1974년 초에 조직지도부 부부장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1974년 5월에 함경남도 신창군 책임비서를, 함경남도 도당 지도원의 음해에 넘어가서 억울하게 처벌하였다가 신창군 인민들의 집단 신소에 김정일에게 불려가서 쪼인트를 까인 적도 있다고 한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82년 4월, 김일성 칠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84년 10월, 서윤석이 평양시당 책임비서로 조동되자 후임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까지 승진했다고 한다.

1986년 11월,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1987년 6월 중앙위원회 농업부장에 임명되었다. 1987년 8월, 리진수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8년 2월에는 곡창지대인 황남 책임비서 겸 인민위원장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안가서 1989년 10월에 해임, 다시 조직지도부로 돌아와 1991년 5월에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에 임명되었으며 1992년, 전임 본부당 책임비서 리찬선이 사망하자 후임 본부당 책임비서를 했다. 김일성, 김정일조차도 형식상의 생활총화를 할 때는 문성술 앞에서 해야 했다고 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고 한다. 1992년 4월, 김일성 팔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아 이중수훈자가 됐다.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을 지냈다.

그러다가 심화조 사건에 걸려서 처참한 꼴을 보게 된다. 여러 증언에 따르면 문성술은 서윤석과 함께 사회안전부 정치국장 채문덕을 지방 보안서장으로 강등시킨 적이 있는데 이 때문에 채문덕이 그에게 큰 원한을 가졌다고 한다. 그리고 장성택 역시 자신의 권력을 견제하는 그에게 원한이 있어 김정일로부터 문성술 체포 재가를 얻어냈다고 한다. 체포되어 극심한 고문을 받은 문성술은 계호들에게 채문덕을 데려오라고 절규하였고 채문덕이 나타나자 "네놈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내가 누군지 몰라? 본부당 책임비서 문성술이야! 당장 장군님께 네 놈들이 하는 이 짓을 보고해! 아마 용서치 않으실 거다!"라고 호통을 쳤지만 채문덕은 죽이든지 자백을 받아내라고 계호들을 마구 쪼았고 결국 문성술은 고통을 참지 못해 벽에 막힌 못에 머리를 찧어 자살했다고 한다. 하지만 채문덕은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이며 본부당 책임비서인 거물을 죽여놓고도 아랑곳않고 그의 손가락을 잘라내어 자백서에 지장을 받아냈다고 한다. 설사약을 먹이곤 3일간 물도 주지 않아 죽였다는 주장도 있다. 장진성의 증언에 따르면 사회안전부 참모장인 황진택도 문성술의 혐의가 사실이 아닌 것 같다고 했다가 문성술에 동조했다고 체포되어 숙청 직전까지 갔었다고 한다.

하지만 문성술을 죽인 것을 김정일이 알게 되면서 일이 커졌다고 알려져 있다. 심화조 사건이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여긴 김정일이 문성술을 데려와서 확인을 해봐야겠다고 채문덕에게 지시했는데 이미 죽었다는 사실에 놀란 김정일은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4과 검열과 조사관들을 보내서 사회안전부의 일처리를 검열하게 했다. 결국 이후 채문덕의 숙청은 중지되었고 그는 처형당했다고 한다. 김정일은 서윤석과 대비하여 문성술이 신념이 있는 사람이라고 추켜세웠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인지 문성술은 애국렬사릉에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 직함으로 안장되었다. 공식적인 기일은 1999년 3월 10일이다. 앞서 언급한 황진택은 문성술이 복권되면서 무죄로 가까스로 풀려났다고 한다. 2004년에 엉뚱하게도 그가 수용소에 갇혀 있다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

3.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