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00:07:53

무적해병


1. 개요2. 표기3. 유래
3.1. '무적해병' 등 '무적XX'는 당시 널리 사용되던 용어3.2. '무적해병' 휘호 하사 시점의 와전3.3. 결론
4. 기타5. 참고 문헌6. 관련 문서

1. 개요

'무적해병(無敵海兵)'은 대한민국 해병대의 ' 귀신 잡는 해병대', ' 신화를 남긴 해병대'와 더불어 가장 대표적인 표어·애칭 중 하나로 6.25 전쟁 기간 중 생겨났다.

2. 표기

' 귀신 잡는 해병대', ' 신화를 남긴 해병대'와 달리 해병대에 사용하는 공식표기는 '무적해병'이지만 '무적해병대'로 사용되기도 한다.

참고로 '무적해병' 표기는 이승만 대통령이 하사한 휘호와 관련 있기 때문에 해당사항이 아니지만 공식 표기인 ' 귀신 잡는 해병대', ' 신화를 남긴 해병대'보다 '귀신 잡는 해병', '신화를 남긴 해병' 등이 해병대 관련 서적, 언론 기사, SNS 콘텐츠 등등에서 더 많이 사용되는 경향이 있는데 전도봉 해병대사령관 재임 시절인 1996년부터 이미 해병대에서 이런 경향을 바로잡기 위한 방침을 정했었고 그 일환으로 1997년에 해병대 용어의 역사적 근거와 법률적 의미 등의 내용을 정리한 자료집을 제작,각계에 배포하고 해병대전우회 등 전국 조직을 통해 용어 바로쓰기 운동을 벌인 적이 있었다. # #

당시 해병대에서 해병대 전체 구성원이나 조직을 뜻하는 `해병대(海兵隊)'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할 자리에 해병대의 병사 한명을 `해병(海兵)'의미하는 `해병'으로 무분별하게 사용되고 있는 이유를 분석한 바에 따르면 먼저 '해병대'는 국군조직법상 법률적인 위상과 역사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이지만 `해병'은 해병대 구성원중 병사 한명을 뜻한다. 그러나 지난 1973년 10월 해병대가 해군으로 통폐합된 이후 1990년 8월 국군조직법에 따라 해병대의 설치 근거가 명시되기 전까지 24년간`해병대'란 용어는 사라지고 `해병'으로만 사용되면서 '귀신 잡는 해병', `해병 전우회', `해병 정신' 등의 잘못된 표현이 일반인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것으로 모두 '해병'이 아닌 '해병대'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한편 해병대가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브랜드화된 영어 번역 표현은 아직 없지만 직역에 가까운 영어 표현인 'Invincible Marines를 사용해도 무리가 없다.

3. 유래

해병대사령부에서 1999년 발간한 '사진으로 본 해병대 50년사' 등 해병대 공식 역사서에는 1951년 도솔산 전투 전적지 방문을 했던 이승만 대통령이 '무적 해병대'라고 칭하면서 '무적해병' 휘호를 하사한 것에서 유래했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여기에는 '무적해병' 휘호 하사 시점에 중대한 오류가 존재한다.

3.1. '무적해병' 등 '무적XX'는 당시 널리 사용되던 용어

먼저 '무적해병' 또는 '무적해병대'라는 용어는 어느 누군가가 새롭게 창안해낸 용어가 아니다. 왜냐하면 무적X군, '천하무적' # 등은 일반명사와 같이 6.25 전쟁 전부터 널리 쓰였던 용어이기 때문이다.

그 예로 아래와 같이 1936년 5월 3일 조선일보 기사에도 다음과 같은 문구가 발견된다.
무적해군, 무적공군의 표방하에 풍부한 재정을 아끼지안코 군비확장에 분비하고 있다.
현재까지 발견된 '무적해병'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최초의 문헌은 1950년 11월 5일자 부산일보 기사이다.
한편 아해병대 이번 작전을 진술하면 십칠일 밤 무적 해병대는
룡남면해안에 은비히 상륙하여 적에게 발각되지 않고
또한 1950년 11월 21일자 부산일보에는 신현준 해병대 초대사령관이 '무적해병대 되기까지'라는 제목으로 작성한 글이 게재되었는데 # 이처럼 '무적해병'은 아예 해병대에서도 이미 사용했던 용어로서 결론적으로 '무적해병'은 이승만 대통령의 '무적해병' 휘호에 의해 처음 생겨난 용어는 절대 아니다.

참고로 6.25 전쟁 중 국군 관련 기사에 무적을 붙이는 것은 다음과 같이 일반적인 표현이었다.

3.2. '무적해병' 휘호 하사 시점의 와전

'무적해병'이 해병대의 표어·애칭으로 자리잡은 직접적인 계기는 이승만 대통령의 '무적해병' 휘호 하사 때문인데 해병대사령부에서 1999년 발간한 '사진으로 본 해병대 50년사'에 1951년 도솔산 전투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무적해병' 휘호를 하사하였다고 기술한 후 휘호 하사 시점이 도솔산 전투 이후로 이승만 대통령의 전적지 방문 시기가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해병대의 사관으로 불리울 정도로 해병대 역사 관련 수많은 저서를 저술한 정훈장교 출신 정채호 예비역 중령의 2000년 저서 '해병대 전통과 비화'의 '무적해병의 휘호' (pp. 267~268)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1953년 휴전 후 해병대 제2연대 창설식 무렵에 '무적해병' 휘호를 하사했다고 기술하였다.(참고로 해병대 제2연대 창설식은 1953년 10월 15일에 거행되었다. #)

덧붙여 '해병대 전통과 비화'의 '도솔산지구 탈환작전' (pp. 162~171)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표창장(대통령부대표창) 수여 관련 기술은 있지만 '무적해병' 휘호 관련 기술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이승만 대통령이 1951년 도솔산 전투 전적지 방문 시기와 1953년 해병대 제2연대 창설식 무렵 이렇게 '무적해병' 휘호를 두번 하사한 것은 절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무적해병의 휘호
해병들을 위해 '無敵海兵'(무적해병)이란 네 글자를 휘호(揮毫)해주신 분은 이승만(李承晩) 초대 대통령이었다.
이승만 대통령께서 이 휘호를 남긴 배경은 휴전 직후 휴전선 남방한계선 북쪽에 위치하고 있던 동·서해의
모든 점령도서들로부터 철수한 도서부대 장병들을 주축으로 해서 편성한 해병 제2연대(장. 김동하 대령)의
창설에 즈음해서 전쟁기간 중 해병들이 세운 그 불패상승의 전통을 계속 이어 나갈 것을 축원하는 뜻으로
우정[1] 무적해병이란 휘호를 남기셨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 네 글자 옆(왼쪽)에는 爲海兵第二聯隊創設(위해병제2연대창설)이란 글귀가 쓰여져 있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무적해병'이라고 칭했던 것은 우리 해병대와 해병들 모두를 위한 최고의 찬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해병교육단에서는 지체없이 초서체(草書體)로 쓰여진 無敵海兵의 네 글자를 탁본을 떠서 동판에 새긴 다음 그 동판을
정상에 주조한 해병대의 대형마크를 올려 놓은 탑신(塔身) 중앙에 부착해 놓은, 이른바 '무적해병휘호탑'을 제작하여
해병교육단 본관건물(2층 목조건물) 현관 앞에 세워둠으로써 주조된 그 마크와 탑신을 바라보는 모든 장병들로 하여금
해병대의 전통과 명예에 대한 무한한 긍지와 사명감을 샘솟게 했다.
그 당시 그 2층 목조건물에는 2층에는 교육단 본부가 들어서 있었고, 아래층은 신병훈련소가 사용하고 있을 때였다.
또한 정채호 예비역 중령의 1981년 저서 '해병실록 덕산에서 월남까지 상권'과 1994년 저서 '모군이여 영원하라'에서도 도솔산 전투에서의 이승만 대통령 관련 기술에 다른 내용은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지만 '무적해병' 휘호 하사 내용은 존재하지 않으며, 도솔산 전투 당시 해병대 제1연대 1대대장으로 참전했던 공정식 전 해병대사령관의 회고록에도 자신이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생일 케이크를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인상깊게 기술하고 있지만 '무적해병' 휘호 하사 내용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참고로 하기 문헌들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도솔산 전투 전적지 방문일을 1951년 8월 19일로 기록하고 있지만 8월 19일은 예정일이었고 날씨 문제로 연기되어 실제 도솔산 전투 전적지 방문 및 해병대 제1연대 시찰일은 8월 22일이었다. #
엄청난 피의 代價
…(전략)…
전투가 승리로 장식되자 현지에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과 八군사령관 벤프리트 대장을 비롯한 내외 인사들과
보도진이 쇄도하여 해병대의 빛나는 승리를 축하하는 한편 해병대의 용맹성을 천하에 널리 보도했으며 뒤이어서
표창장과 감사장이 답지해 왔다. 六월 二十五일에 신현준 사령관과 함께 현지로 달려왔던 손원일(孫元一) 해군참모총장은
그 표창장 문맥에서 작전상 극히 중요한 이 지대를 공격 점령한 해병들의 공훈이야말로 타 부대에 대한 자랑스러운
귀감이라면서 극구 찬양해 마지 않았고, 八월 十九일 이승만 대통령은 그 표창장에서 해병들의 애국심을
높이 찬양하는 한편 평소의 맹훈에 의해 가다듬은 왕성한 공격정신과 백절불굴의 인내력으로서 쟁취된
그 승리의 결정체(結晶體)는 실로 구국의 정화(精華)가 아닐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八월 二十九일 대한민국 국회의 신익희() 의장은 그 감사문에서 해병대의 영웅적인 전투의 그 혁혁한 공훈에
대하여 국회는 만강의 찬사를 보내는 바이라고 했는데, 이승만 대통령의 표창장과 국회의장의 감사장은
도솔산 탈환작전이 끝난 뒤 아 해병연대가 홍천지구에서 훈련과 재정비를 하고 있는 기간 중 현지를 직접 방문한
자리에서 전달됨으로써 차기 작전을 앞둔 장병들의 사기는 실로 충천한 바 있다.
…(후략)…
…(전략)…
百戰百勝(백전백승)의 우리 海兵隊(해병대) 武功粲然(무공찬연)
傀儡豪言(괴뢰호언)턴 붉은敵(적)의 堡壘(보루) 도솔산을 占領
그 당시 民主新報(민주신보)는 이러한 표제 하에 그 기념비적 승전을 대서특필했고,
대한민국 정부와 국회에선 이승만 대통령과 신익희(申翼熙)의장의 이름으로 된 부대표창장과 감사장을 수여할 것을
결의했는데 그 표창장과 감사장은 도솔산 전투를 마친 해병 제1연대가 홍천지구에서 휴식과 재정비를
취하고 있을 때 직접 부대를 시찰한 이승만 대통령과 신익희 의장에 의해 수여되었다.
그리고 전투가 끝난 직후 승전소식에 접한 이승만 대통령은 육군 여군부대장 김현숙(金賢淑) 중령으로 하여금
고추장 19상자를 가지고 연대본부를 방문하여 장병들을 위로하게 했었는데, 그런 지시를 김현숙 부대장에게
할 때 이 대통령은 "우리 해병들이 매운 고추장을 먹게 되면 더욱 용감하게 잘 싸울 것"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대통령의 생일 케이크
도솔산 작전을 마치고 우리 부대는 작전지역을 미 육군에게 넘겨주고 홍천으로 이동했다.
부대를 재편성하고 무기와 장비를 보충하면서 다음 임무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부대 시찰을 온다는 통보가 왔다. "도솔산의 영웅들을 직접 만나 격려하겠다."는
뜻이라고 해서 우리들은 한껏 마음이 들떳다.
대통령께서 우리의 전공을 알아주시다니, 참모총장이 다녀간 것만도 분에 넘치는 영광인데
대통령까지 오시다니..., 우리 모두는 이런 기분이었다.'
李 대통령 '도솔산 영웅' 격려차 방문
그날은 내 생일이어서 더욱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1951년 8월 19일 이 대통령이 부대 연병장에 도착했다.
토마스 미 해병1사단장과 함께였다.
헬기의 프로펠러 바람에 흰머리를 날리며 연대본부에 도착한 대통령의 모습은 사진에서 본 그대로였다.
만면에 웃음을 띤 대통령은 전 연대 병력이 도열한 가운데 김대식 연대장에게 직접 표창장을 주었다.
"… 백절불굴의 인내력으로 쟁취된 그 승리의 결정체는 실로 구국의 정화가 아닐 수 없다."
표창장 문구 가운데 이 부분은 지금까지도 기억난다.
수여식이 끌날 무렵 대통령을 수행하고 있던 곽영주 경무대 경찰서 경위(뒤에 경무대 경찰서장)가 대통령에게
귓속말을 했다. 곧 대통령이 옆에 있던 토머스 장군에게 무어라 말하는 모습이 보였다.
뒤에 알게 된 일이지만 곽 경위가 대통령에게 오늘이 공정식 1대대장 생일이라고 보고한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대통령은 토머스 장군에게 생일 케이크를 공수해 올 수 없겠냐고 부탁했다고 했다.
식이 끝난 뒤 헬기 소리가 들리더니, 케이크가 실려왔다.
이 대통령은 태극기와 성조기로 장식된 생일축하 케이크를 나에게 직접 전달해 주었다..
그 케이크를 먹으면서 나는 감격에 겨워 울고 말았다.
대통령에게서 케이크를 받는 장면을 담은 사진은 뒤에 경무대에서 보내왔다.
나는 그 사진을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영광'의 증표로 간직하고 있다.
…(후략)…
그리고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1990년대까지 도솔산 전투 관련 언론 기사에서도 이승만 대통령의 '무적해병' 휘호 하사 관련 내용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는데 해병대사령부에서 1999년에 발간한 '사진으로 본 50년사'에 도솔산 전투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무적해병' 휘호를 하사하였고 이것이 '무적해병'의 유래라고 기술한 이후 2000년대부터 해병대 관련 민간 서적, 언론 기사, 블로그 및 유튜브 등 SNS 콘텐츠 등등에서 이를 [[팩트 체크]없이 무분별하게 인용하면서 역사적 사실처럼 굳어진 것이다.

파일:이승만대통령-무적해병휘호-1953.png
가장 결정적인 증거는 국가기록원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는 1953년 10월 15일 해병대 제2연대 창설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이'無敵海(무적해)'로 보이는 휘호를 쓰는 장면을 촬영한 사진이다. 원본사진 기타사진

해병대 출신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박종상 선임연구원 역시 2023년 발간한 개인 저서 '귀신도 모를 해병대 이야기'에서 최신 연구 결과들을 바탕으로 다시 한번 잘못된 내용들을 다음과 같이 바로잡았다.

첫번째, 이승만 대통령은 1951년 7월이 아니고 1951년 8월에 22일에 도솔산 전투 전적지를 방문하였으며, 이에 대해 1951년 8월 24일자 자유민보에서 '무적아해병대'라는 표제(부제: '이 대통령 중동부전선에서 해병대 제1연대를 표창')하에 8월 22일 이승만 대통령의 해병대 방문과 표창장 수여를 함께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신문에 실려있는 방문 내용과 표창장 전문 어디에도 해병대 공식역사서 내용처럼 이승만 대통령이 '무적 해병대'라고 칭하면서 '무적해병'이라는 휘호를 하사했다는 내용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이승만 대통령이 백마고지 전투에서의 제9보병사단 장병들의 분투를 치하하는 전문을 보냈다는 기사 제목이 '무적용전(無敵勇戰)을 격찬'이었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실제로 보낸 전문 내용에는 '무적용전'이라는 용어가 없는 것과 비슷한 경우이다. ##

두번째, 이승만 대통령이 '무적해병' 휘호를 하사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 맞지만 그것은 1951년의 8월 22일 도솔산 전투 전적지 방문이 아니고 1953년 10월 15일 해병대 제2연대 창설식 무렵에 '무적해병'이라는 휘호를 하사하였다.

최종적으로 모든 문헌 및 사료들을 검토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해병대사령부에서 1999년 발간한 '사진으로 본 해병대 50년사'에서 1951년 도솔산 전투 전적지 방문을 했던 이승만 대통령이 '무적 해병대'라고 칭하면서 '무적해병' 휘호를 하사한 것에서 유래한다고 기술한 이후 2000년대부터 이 기록을 인용한 언론 기사들과 SNS 콘텐츠 등을 통해 도솔산 전투 후 이승만 대통령의 '무적해병' 하사 시점이 잘못 자리잡은 것이다.

(2) 이승만 대통령이 1951년 6월 도솔산 전투 직후 해병대를 위해 했던 격려사는 고추장 19상자를 특별보급 시키면서 "우리 해병들이 매운 고추장을 먹게 되면 더욱 용감하게 잘 싸울 것"이라는 발언이 전해지고 있으며 '무적해병'으로 칭하면서 격려하고 '무적해병' 휘호를 하사했다는 격내용은 실체적 증거가 존재하지 않는다.

(3) 이승만 대통령이 1951년 8월 22일 해병대를 위해 했던 격려하기 방문했을 때 역시 표창장 수여 관련 기록만 남아 있을뿐이며 '무적해병'으로 칭하면서 격려하고 '무적해병' 휘호를 하사했다는 내용은 실체적 증거가 존재하지 않는다.

(4) 이승만 대통령이 1953년 10월 15일 해병대 제2연대 창설식에 참여하였고 이때 '무적해병' 휘호를 하사였다.

3.3. 결론

현재까지 발견된 사료와 조사 결과를 종합하여 도출된 유래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1) '무적해병' 또는 '무적해병대'라는 용어는 1950년부터 언론 등에서도 사용했던 용어로 누군가 창안해낸 특별한 용어가 아니다.

(2) 이승만 대통령이 ' 도솔산 전투' 후 1951년 8월 도솔산 전투 전적지를 방문하여 해병대를 시찰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이때 해병대에게 '무적해병' 휘호를 하사한 것이 아니다.

(3) 이승만 대통령은 6.25 전쟁 휴전 후인 1953년 10월 15일 해병대 제2연대 창설식에 참여하였고 이때 '무적해병' 휘호를 하사하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 도솔산 전투' 후 전적지를 방문하여 해병대 시찰할 때 '무적해병' 휘호를 하사한 것으로 1990년대부터 잘못 알려지게 되었다.

즉 1990년대 이전에는 해병대 관련 서적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도솔산 전투 후 전적지를 방문하여 해병대 시찰할 때 '무적해병' 휘호를 하사했다는 내용이 없었는데 1998년부터 도솔산 전투전승기념행사가 개최되고 1999년 발간된 해병대 공식 역사서 '사진으로 본 해병대 50년사'에 이 내용이 들어가면서 급속도록 퍼지게 되었다.

4. 기타

5. 참고 문헌

6. 관련 문서


[1] 일부러의 방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