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504c4b><colcolor=#ffffff> 모토오리 노리나가 本居宣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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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 스즈노야(鈴屋) |
출생 | 1730년( 교호 15년) 6월 21일 |
이세국 마츠사카 | |
사망 | 1801년( 교와 원년) 11월 5일 (향년 69세) |
이세국 마츠사카 (現 미에현 마츠사카시) | |
본성 | 타이라(平) |
분야 | 국학, 언어학, 의학, 지리학 등 |
주요 활동 | 집필, 연구 |
종교 | 신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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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에도 시대의 국학자이자 문헌학자, 언어학자, 의사이다. 카다노 아즈마마로, 카모노 마부치, 히라타 아쓰타네와 함께 '국학의 4대인'로 여겨진다.중국과 대비되는 일본 고유의 신국(神國) 사상을 강조하였다. 본업은 의사였지만 간간이 저술활등을 충실히 하였고 36년 동안 고사기를 근대 일본어로 옮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호는 스즈노야(鈴屋)인데 후일 문하생을 가르칠 때에도 강습소 이름에 호를 넣었다.
주요 저서로는 고사기전, 옥승간, 겐지이야기를 읽는 법, 어융개론 등이 있다.
2. 생애
이세(伊勢) 지방 마쓰사카(松阪) 출신. 아버지는 에도에 점포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호상(豪商)이었으나 가운이 기울기 시작해 노리나가가 11세 때 병사하였다. 상업을 배우기 위해 에도로 가는 중 지리 정보의 부족을 실감하여 <대일본 천하사해 화도>를 집필한다.아버지에 이어 형마저 죽자, 어머니의 권유로 의술을 배우기로 하여 교토로 상경한다.
교토에서는 호리 게이잔(堀景山 1688~1757)에게서 유학을, 무카와 고준(武川幸順) 등에게서 의학을 배웠다. 교토에서 생활하며 천황 조정의 왕조문화에 깊은 감명을 받았는데, 그러던 중 게이잔이 소개하여 게이추(契沖 1640~1701)의 저술을 읽고는 국학을 접했다.
1757년 마쓰사카에서 소아과 병원을 개업하고 1763년 가모노 마부치(賀茂眞淵 1697~1769)와 만남을 계기로 국학에 입문하였다. 일본 고대 사상의 정수라고 판단한 고사기의 해설인 <고지키전(古事記傳)> 집필에 착수한다. 이때 1763년 게모노 마부치의 만남은 단 하룻밤이었지만 그 이후에도 간간이 편지를 왕래하고 서로에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쳐 이때의 만남을 '마스시카의 하룻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무렵부터 <겐지 이야기를 읽는 요령(紫文要領))>, <이소노카미노사사메고토(石上私淑言)>를 집필하는 등 활발한 저술 활동을 하기 시작해 1771년에는 복고사상(復古思想)의 총론이라 할 수 있는 <나오비노미타마(直毘靈)>를 출판한다. 1786년에 간행된 <가카이카(呵刈葭)>에 수록된 우에다 아키나리(上田秋成, 1734~1809)와의 논쟁도 유명하다. 1798년 35년간 몰두한 <고사기전>을 완성했다. 이 고사기전은 고사기를 실증주의적 관점에서 연구한 기념비적인 연구서이며, 동시에 고사기라는 문헌 자체를 각잡고 연구한 사실상 첫 연구서이다. 밑 문단에 나오는 인용문도 고사기전에 나오는 것이다.
복고사상에 입각해 일본의 고대 정신을 규명하고자 평생을 바쳐 고전을 연구했던 사람으로, 그의 문하생은 전국에 걸쳐 500명에 달했다고 한다.
3. 사상
참된 도는 하늘과 땅 사이에 어느 나라라도 같게 통용되는 것으로 모든 나라에 하나뿐이다. 그런데 참된 도는 오직 황국(皇國)에만 올바르게 전해지고 외국에서는 상고부터 전래가 끊어졌다. 그래서 다른 나라에서는 별도로 다른 여러가지 도를 말하면서 정도(正道)인 듯이 설명하지만 모두 정도에서 벗어난 샛길로 참된 도가 아니다. 비록 비슷한 점이 있다고는 해도 동떨어진 샛길이며 뜻을 섞어서 채용한 것이므로 참된 도에 필적하기 어렵다.
이 발언이 노리나가 사상의 집합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흔히 모토오리 노리나가를 정한론의 시초라 평가하지만 이는 오해이다. 노리나가의 자국 중심 사관이 후대 정한론자에게 영향을 주었을 수는 있어도 본인이 정한론과 연관이 있으리라 보기는 어렵다. 노리나가는 일본 고유의 미를 탐구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국 중심주의적 천하관을 설파했을 뿐[1] 주변 나라들을 무력으로 정복해야 한다는 소리 따윈 안했으며 초기 정한론자들이 자주 인용하던 신공황후의 삼한정벌의 경우 아예 신빙성을 부정하고 당대 일본의 지도자가 야마타이국의 히미코라고 주장했다. 한국 수능에 이사람이 자주 나오는 이유도 이사람이 정한론과 직접적 연관이 없다는 방증이다. 정한론의 실질적 시조인 요시다 쇼인과 동일선상에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둘다 고사기를 연구했지만 노리나가는 신공황후 기사를 부정한 반면 쇼인은 오히려 이걸 근거로 조선를 비롯한 침략 전쟁의 근거로 써먹은 데다가, 조선이 일본의 전통적인 속국이라고 보았기 때문.[2]순수 유학부터 국학에 이르기까지 사상적 토대는 매우 혁신적이며 스승이 틀렸으면 제자가 그것에 구애받으면 안된다. 라는 개념찬 소리를 하기도 했다.
일본 고전을 연구하여 자연의 아름다움과 덧없음, '모노노아와레'를 일본 정신의 근본으로 내세웠다. 반면에 자연에 반하는 것을 가르치는 중국의 유교에는 다소 비판적이었다. 외래종교이자 중국의 것, 즉 '한의(漢意)'인 유교, 불교를 국가통치를 위해 지배자들이 만든 작위적인 가르침으로 여겨서, 대표적으로 유교의 천명 사상을 군주들의 자기합리화라고 비판했다.[3]
유불에 반하여 일본 고유종교인 신토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불교적, 유교적 관념에 기대어 고전을 해석하려는 불가신도, 유가신도를 비판하고, 실증적 문헌적 해석을 통해 고전을 연구하여 일본 고유의 정서를 규명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일본서기가 중국 등 외래의 영향력이 나타나는 것을 규명해 비판하고 대신 '일본 고대정신의 정수'라 여긴 고사기를 중시했다.[4] 당시 고사기는 역사책으로서나 신화 모음집으로서나 일본서기에 밀리는 상황이었고 심지어 위작 논란까지 제기되었는데, 그는 고사기를 연구해 당시 남아있던 가장 오래된 고사기 필사본을 기준으로 위작이 아님을 밝혀냈다.
당시 일본에서는 막부의 무분별한 성리학과 양명학의 수입에 대한 반발로 고학(古學)이 일어나 선진 유학의 연구를 거쳐 일본 고유의 미학을 파악하는 국학이 일어나고 이러한 면모에서 일본 고유의 미를 최고로 쳤다.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을 긍정적으로 보거나 (무리하게 출병한 사실은 인정한다.) 조선 통신사를 셔틀로 보고 에도에 조선과 중국의 사신이 입조해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일본 고대사에 장대한 떡밥을 던진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고사기를 연구한 저서 <고사기전>에서 삼국지 동이전에 나오는 왜국 여왕 히미코가 종래의 여자 무당으로서 종교적 권위를 가진 사람일 뿐 일본의 지도자로는 볼 수 없다는 해석과 달리 히미코가 야마타이국의 지도자였을 거라고 주장하며, 야마타이국의 위치는 규슈라 보았다. 즉 야마타이국 위치 논쟁의 서막을 알린 사람이다 이 주장은 이전 세대의 아라이 시라이시가 주장한 야마타이 재긴키설과 대립하는 것으로 이 논쟁은 무려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일본 중심 사상을 가진 사람치고 진공황후를 부정하고 히미코를 긍정한 것은 의외의 부분.
또 하나 중요한 점으로, 이주갑인상 문제를 최초로 제기한 사람이다.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분석할 때 동국통감을 꼼꼼히 챙겨본 그는 일본서기 신공황후의 삼한정벌 기사 및 이후에 등장하는 백제에 대한 기년이 동국통감과 일치하지 않고 앞서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또 삼한정벌 기사에서 고사기는 신라만이 등장하는 데에 비해[5] 백제, 고구려까지 진공황후에 항복했다고 나온 일본서기의 기사가 거짓임을 지적했다. 하지만 삼한정벌 자체는 긍정했고, 이주갑인상의 경우도 일본서기의 신뢰성을 지적하는 데에만 그쳐 더이상의 결론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이후 이주갑인상 문제는 메이지 유신 이후에 제기되기 시작한다.
4. 기타
2013년도부터 신설된 동아시아사에 국학의 중심인물로 시험에도 빈도 있게 출제된다.동방 프로젝트에 나오는 모토오리 코스즈의 모티브가 되었다. 동방영나암 작중 등장하는 스즈나안은 노리나가의 서재였던 '스즈노야'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1]
밑에 나온 중국과 조선이 에도에 입조해야 한다 드립은 역설적이지만 그가 무력을 동원한 정복전쟁에 반대했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전통적으로 입조하여 조공을 바친다는 것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상대가 위임을 인정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2]
다만 요시다 쇼인이 말한 조선 침략이 경술국치와 같은 전면적인 식민지화가 아닌 속국화 정도에 불과(?)하다는 의견도 있다.
[3]
이는 일본의 천황관이 천명 사상과 정면으로 충돌하기에 그런 것이기도 하다. 천명 사상에서는 하늘이 군주에게 천명을 '부여했다'고 보는 반면 전통적인 일본 신토적 관점에서 군주의 권리는 하늘이 부여된 것이 아니라 신으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이며, 이는 부정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4]
사실, 고사기라고 해서 중국 물이 안들은건 아니다. 고사기 편찬 목적 자체가 천황가의 정통성 강조와 충 사상 강조와 같은 지극히 유교적인 것들이었다. 물론 아예 중국 출신 귀화인들이 편찬에 참여한 일본서기보다야 중국 물이 덜 들었겠지만.
[5]
정확히는 고사기에는 백제도 등장한다. 하지만 일본서기에 백제가 조공을 바친 시점이 더 이후로 나와있기에 고사기에서 백제를 언급하는 부분은 오류라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