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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27:55

마츠다이라 타다테루

파일:Matsudaira_Tadateru.jpg
松平 忠輝
1592-1683
1. 개요2. 생애3. 기타

1. 개요

센고쿠 시대~ 에도 시대 초기 인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6남.

2. 생애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측실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다.

마쓰다이라 타다테루는 성품이 거칠기는 했지만 글과 그림, 차도에 능했으며 무에도 능통하고 약학의 지식도 있는 데다가 인맥도 넓은 팔방미인이었다.

하지만 아버지 이에야스는 유독 타다테루를 미워하여 생애에 걸쳐서 홀대했다. 심지어 임종의 때 자신의 방에 들어오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으며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이에야스와의 사이가 생각보다 괜찮았다는 설도 있는데, 노카세라는, 노부나가 - 히데요시 - 이에야스의 손을 거친 천하인의 상징과 같은 피리를 하사받았기 때문이다. 임종을 지키지 못하게 한것도 아래에 언급할 오사카의 진에서의 여러가지 행동들에 크게 실망하여 향후 대면을 금지하는 명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타다테루는 후에 장군이 된 형 도쿠가와 히데타다에 의하여 개역당하여 쫓겨난다. 또한 타다테루의 아들도 아버지의 죄에 휘말려서 유배지에서 홀대를 받다가 분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 단, 타다테루 본인은 몇몇 유배지를 전전하다 최종적으로 스와 다카시마 성에 정착했는데, 감금은 아니어서 지역문인들과 교류한다던지, 스와호에서 수영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지금 기준으로도 상당히 장수한 92세에 사망했다.

3. 기타

이에야스 생전의 대우는 부자관계라는 점을 때면 75만 석을 줄 정도였으니 나쁘지는 않았다. 당시 많고 많은 다이묘 중에서도 50만 석 이상의 다이묘는 손가락으로 꼽힐 정도밖에 없었기 때문. 다만 이것도 타다테루와 동복 형제인 마츠치요에게 줬다가 마츠치요가 젊어서 죽자 그 때까지 얼추 10만 석 정도밖에 안 되던 것에 마츠치요의 자리까지 준 것이다. 동년배의 그의 형제들에 비하면 그의 석고는 반절밖에 안 되었고, 이것조차 이에야스의 애첩이었던 타다테루의 모친이 부탁하여 그리 되었다는 것이 정설. 이런 홀대의 이유는 쌍둥이설 혹은 추남설이 지배적이며 그 밖에도 인품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형인 히데타다가 타다테루를 개역시킨 원인은 표면적으로 오사카 여름의 진 때 총대장을 명령받았음에도 전장에 지참[1]하였고, 그의 가신이 히데타다의 하타모토 두 명을 참살한 것, 그리고 조정에 갈 때 병을 이유로 불참해놓고 뱃놀이에 나갔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고작 그 정도 이유로 이에야스의 핏줄을 개역에 유형까지 보내는 것은 다소 부적절한 처사이다. 실제로 히데타다도 지참하여 폐적될 뻔한 적이 있으며[2] 나머지 두 건도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따라서 사실상의 원인은 따로 있어서 첫 번째가 가톨릭에 심취했다는 것이고, 두 번째가 그의 장인이 역신감으로 찍힌 다테 마사무네였기 때문이라는 것이지만, 어느 쪽이나 후세의 추측에 불과할 뿐 근거는 없다. 가톨릭설은 타다테루가 외국 문물에 심취했고 그의 아내였던 이로하히메가 크리스천이었다는 것이 그 근거이지만 이로하 히메는 타다테루하고 관계가 좋지는 않았다. 타다테루가 유배를 가게 된 다음 이로하히메는 이혼하고 다테로 돌아가는데 아버지인 마사무네의 권고에도 끝끝내 재혼을 하지 않았고 이것은 그녀가 충실한 크리스천이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그런만큼 타다테루가 크리스천이었다면 양자의 관계가 안 좋았다는 것은 다소 앞뒤가 맞지 않는다.

또 마사무네의 건의 경우 마사무네를 경계한 것은 다른 막신들이지 정작 이에야스는 마사무네를 무겁게 썼고 임종시에서도 마사무네를 부를 정도로 신뢰했기 때문에 타다테루가 마사무네의 사위였기 때문에 유배를 보냈을 거라는 추측은 전혀 근거가 없다. 다만 타다테루, 마사무네, 오오쿠보 나가야스가 에스파냐와 협력하여 막부를 뒤엎으려는 음모가 있었다는 소문이 있기는 했으나 다른 두 명은 그건으로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결국 타다테루의 개역은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이런 저런 일로 앙심을 품고 있다가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걸림돌인 타다테루를 숙청했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특히 좋게도 나쁘게도 범골이었던 도쿠가와 히데타다에 비해서 타다테루는 성품이 거칠기는 했지만 글과 그림, 차도에 능했으며 무에도 능통하고 약학의 지식도 있는 데다가 인맥도 넓은 팔방미인이었다고 한다. 거기에 75만 석이나 가지고 있으니 숙청의 이유는 충분한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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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遲參, 지각과 동의어 [2] 이쪽은 도쿠가와의 패권이 걸린 세키가하라 전투에 지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