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마우리치오 참파리니 Maurizio Zamparin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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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41년 6월 9일 |
이탈리아 왕국
프리울리베네치아줄리아 우디네현 세벨리아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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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2022년 2월 1일 (향년 80세) |
에밀리아로마냐 코티냐 | |
국적 |
[[이탈리아|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Mercatone Zeta CEO[1] |
프런트 |
베네치아 FC 회장 (1987~2002) US 치타 디 팔레르모 회장 (2002~20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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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이탈리아의 기업인으로, US 팔레르모의 구단주를 오랫동안 역임했다.젊었을 때에는 축구 선수를 하기도 하였으나[2] 20살에 은퇴하였고 이후 1972년부터 2001년까지 이탈리아 제일의 슈퍼마켓 체인점을 운영하는 사업가로 변모하였다.
2001년에 이를 프랑스의 콘포라마에 매각한 후 막대한 재산을 바탕으로 팔레르모를 운영하였다.
1.1. 베네치아 시절
잠파리니는 젊은 시절에 'Emmezeta'라는 이름의 체인점을 설립했다. 그는 탁월한 장사 수단을 발휘하여 자신이 보유한 회사를 이탈리아 제일의 슈퍼 체인점으로 육성시켰다. 알아주는 부자가 된 잠파리니는 어린 시절부터 꿈꿔왔던 축구 구단의 구단주가 되기 위해 여러 팀들을 알아보다가 1987년 포르데노네 칼초를 인수했다가 베네치아 FC를 인수하기 위해 매각하였다.당시 베네치아는 세리에 C2에 속해 있었는데, 잠파리니는 이 구단을 단시일 내에 세리에 A로 올리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하지만 그가 처음 구단주 직을 맡은 시기인 1987-88 시즌엔 베네치아가 승격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했다. 그 까닭은 빚이 너무 많이 쌓여 있어서 재정 관리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에 잠파리니는 베네치아에 있는 축구 클럽들을 모조리 베네치아로 묶어서 경쟁력을 강화시키고자 했다. 이후 4년간, 베네치아 FC는 역량을 쌓아가며 순조롭게 승격했고 마침내 4년만에 세리에 A 승격이라는 영광을 얻을 수 있었다. 1999년에는 '나카타 붐'에 편승하며 일본 J리그의 주빌로 이와타 선수 나나미 히로시를 임대 영입한 바 있었다.
잠파리니는 세리에 A로 승격한 베네치아를 위해 신구장을 건설하고자 여러 투자자들과 접견했다. 하지만 신구장 건설 계획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후 잠파리니는 구단을 그럭저럭 경영하다가 2002년 베네치아 FC를 팔고 팔레르모를 인수한다.[3]
참고로 FM의 르테를 까서 이 사람의 관계를보면 베네치아가 싫어하는 구단으로 되어 있다.
1.2. US 치타 디 팔레르모 시절
잠파리니는 2002년 7월 21일 팔레르모를 1500만 유로의 금액을 지불하고 인수하는 데 성공했다. 시칠리아의 주도 팔레르모를 연고지로 한 이 축구 클럽은 1940~50년대에 세리에A에서 활동한 것을 제외하면 역사 내내 하부 리그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잠파리니가 구단주로 부임한 후 적극적으로 영입을 한 효과가 드러나면서 2004년에 마침내 세리에 A로 승격했고 매 시즌 잔류에 성공한 데다 2010-11 시즌 구단 역사 최초로 유로파 리그에 진출하는 데 성공하는 빛나는 성공을 거두었다.[4]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이탈리아 대표팀이 우승할 당시 팔레르모에 소속된 대표팀 선수는 안드레아 바르잘리, 크리스티안 자카르도, 파비오 그로소, 시모네 바로네 등 4명이었다. 아는 유벤투스 소속의 5명에 이어 2번째로 많은 선수를 대표팀에 보낸 것이다. 또한 그는 새 구장을 짓겠다고 약속하며 팬들을 설레게 만들었다.
수익 구조상 선수를 싸게 발굴해서 비싸게 팔거나, 경기 입장 수익이 매우 중요했다. 따라서 경기 결과에 따른 감독 경질이 잦았고 라커룸의 긴장감은 줄 수 있었겠지만 선수들의 발전에는 썩 좋지 못하였다.[5]
파스토레, 시리구, 노체리노 등이 나간 후 진행된 영입들이 시원찮은 결과를 보이며 2012-13 시즌에 18위를 기록하며 2004년에 승격한 후 8년 만에 강등되고 말았다. 하지만 곧바로 2013-14 시즌에 세리에 B 우승을 확정지으며 세리에 A로 승격했지만 디발라와 바스케즈 이후 다른 대박이 터지지 않으며 조금씩 재정난에 빠져들고 말았다.
2. 평가
특징을 한 마디로 설명하자면, 요상하고 괴팍하지만 개성이 있는 구단주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설명이 과장이 아닌 것이, 이 양반이 구단주를 맡으면서 취한 행동은 실로 타인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괴상해서 감히 누구도 따라할 수 없을 정도다. 첼시의 구단주 로만 아브라모비치와 전 회장 켄 베이츠를 비롯해 레알 마드리드 회장 플로렌티노 페레스와 전 회장 라몬 멘도사, 로렌소 산스, 그리고 전 아스톤 빌라 회장 덕 앨리스 등이 인내심이 부족하여 감독을 자꾸 경질한다며 비판을 받지만, 이 사람에 비하자면 아무것도 아니다. 심지어 2015-16 시즌엔 감독을 8번이나 교체하는 희대의 막장 행정까지 선보이고 만다. 또한 세리에에서 알아주는 거상이며 희대의 독설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파스토레나 일리치치, 디발라 영입 과정에서 보이듯 어린 재능에 과감한 투자를 하는 것을 즐겼으며 또한 그 재능들이 경기를 뛰는 것을 즐기기도 하였다.2022년 2월 1일 복막염으로 투병하다 별세했다. 향년 80세.
3. 구단 운영 방식
3.1. 싸게 사서 비싸게 판다.
잠파리니가 운영하는 팔레르모는 시칠리아를 연고지로 하고 있다. 충성심이 높은 지역이긴 하지만 섬 지역을 무대로 삼다보니 팬층을 불리는 데 한계가 있고 오랫동안 중소 클럽에서 벗어나지 못한 만큼 자금 운영에 어려움이 많다. 이에 잠파리니는 유망주를 발굴하여 잘 키운 뒤 비싼 값에 팔아치우는 데 능수능란한 솜씨를 발휘했다. 특히 남미 출신의 공격 자원을 싼 값에 영입 한 후 엄청난 가격에 되파는 것에 있어서는 가히 신급이라 해도 무방하다. 그가 영입을 주도하여 데려온 대표적인 선수로는 안토니오 노체리노, 루카 토니, 에딘손 카바니, 아마우리, 하비에르 파스토레 등이 있다. 각 선수들의 이적 현황을 살펴보면1. 아마우리 : 키에보로부터 적은 돈을 들여 영입. 이후 2 시즌 동안 하얀 드록바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대단한 활약을 한 뒤 2008년 360억원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유벤투스에 입단. 그후 아마우리는 정확히 반 년 간 활약하며 모 게임에 진리카드를 만드나 그 후 희대의 먹튀가 되었다.[6]
2. 안토니오 노체리노 : 유벤투스의 유스였지만 임대를 내내 전전하던 선수를 공동소유권 중 절반을 사들여서 데려온 후 3시즌 동안 잘 써먹고 2011년 8월 31일 50만 유로를 받고 AC밀란으로 넘김.[7] 이후 노체리노는 AC밀란에서도 솔리드한 활약을 펼쳤다. 허나 노체리노도 즐라탄이 이적한 12-13 시즌 이후 보아텡과 함께 즐라탄빨이였다는 약점이 드러나 쩌리로 전락했다. 무려 문타리에게 주전경쟁에서 밀릴정도였으니 더 긴 말 안하겠다.
3. 루카 토니 : 잠파리니가 인정한 몇 안 되는 실패작. 루카 토니는 팔레르모에서 세리에 B에서 45경기 30골, 세리에A에서도 20골을 터트리며 엄청난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잠파리니는 그와 불화를 겪은 후 피오렌티나로 이적시켰다. 그 결과 토니는 2005-06 시즌 31골을 기록하며 세리에A 득점왕에 등극했다. 서로 매우 싫어하는 사이로 서로 온갖 독설을 퍼붓는게 인상적이다.
4. 에딘손 카바니 : 2007년 팔레르모로 이적 후 초기에는 별로 좋은 활약을 펼치지 못하다가 2008년부터 좋은 기량을 뽐냈다. 이후 2011년에 나폴리에게 12M의 이적료를 받고 팔아치웠다. 당시에는 나폴리가 오버페이를 했다는 이야기가 많았는데, 그 후 카바니는 세리에 A를 씹어먹고 64M 유로를 기록하며 PSG로 이적했다.
5. 하비에르 파스토레 : 2009년에 팀에 입단한 후 팀의 핵심 공미로 자리잡았다. 2011년 잠파리니는 그를 영입하려는 구단들의 제안을 튕기며 몸값 불리기에 전념했다. 급기야 "파스토레는 2년 내 메시와 동급", "30M 파운드로는 파스토레의 오른쪽 다리도 사지 못한다. 파스토레의 가치는 100M이다!"라는 말까지 했다. 그러다가 2011년 7월 30일, PSG가 4500만 유로의 이적료를 지불하며 파스토레를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팔레르모 구단 역사상 가장 많은 이적료 수입이었다.
14-15 시즌 중에는 파울로 디발라를 가지고 낚시질을 시전했다. 그가 이시기 행한 언플을 몇 가지만 들자면
“디발라, 빅클럽에서 뛸 운명”
잠파리니, "新 메시 디발라 최소 이적료 483억 원"
“디발라, 1순위는 아스널”
잠파리니, "유벤투스, 디발라 영입하려면 서둘러"
또한 잠파리니는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유벤투스가 디발라를 35M 유로에 오퍼했다. 경쟁팀들이 디발라를 데려오고 싶다면 분발했으면 좋겠다.", "나폴리도 디발라를 원한다." 같은 주옥같은 발언을 하며 수많은 구단 관계자들과 팬들을 낚았다. 오죽했으면 세리에매니아의 한 유저는 잠파리니가 입터는걸 이렇게 실시간으로 보다니 영광입니다라며 감격해 했을까.
결국 디발라는 유벤투스로 3200만 유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이적했다. 이후 잠파리니는 언론과 자주 인터뷰를 하여 "디발라가 초반에 저조한 성적을 거두는 것은 알레그리가 그를 제대로 쓰지 못하기 때문", "알레그리가 디발라를 망쳐놓고 있다" 등의 주옥같은 발언을 하며 디발라가 분명 대성할 것이라고 장담했고 디발라는 실제로 세리에 A 최고의 공격수로 성장했다. 팀을 떠난 선수에게 아직도 아낌없는 조언을 하고 소속 구단 감독에게 이런 저런 비판을 가해가며 디발라를 중용해야 한다고 강변하는 걸 보면, 이 영감은 디발라를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듯.
3.2. 경질계의 레전드
이 세상에 인내심이 적은 구단주가 많다지만, 어느 누구도 이 분만큼 감독을 마구잡이로 경질하진 않았다. 그는 베네치아를 이끌 때도 수많은 감독들을 경질했는데 이러한 모습은 팔레르모의 구단주로 부임한 후에는 극에 달했다. 2002년 팔레르모 구단주로 부임한 후 그가 선임한 감독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가장 오래 버틴 감독은 주세페 이아키니로, 2013년 9월부터 2015년 11월까지 2년 2개월을 버텼다. 그러나 2015년 11월 10일 강등권에 헤매는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경질되었다. 이아키니를 경질하고 6년 전 고용했다가 경질했었던 다비데 발라르디니를 선임했다. 그러나 발라르디니가 팔레르모 선수들과의 불화설이 터지면서 팀의 경기력도 형편없었고, 결국 3개월만에 그도 경질되었다. 이렇게 되자 잠파리니의 장대한 감독 경질사에서도 손꼽히는 촌극이 일어나는데, 발라르디니의 후임으로 아르헨티나 리그에서 감독을 했던 기예르모 스켈로토를 데려온다. 문제는 스켈로토가 라이센스 문제로 감독을 할 수 없었던 것. 결국 3명의 임시 감독을 기용하며 라이센스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실패. 스켈로토는 단 한 경기도 필드를 밟지 못한 채 경질되며 잠파리니 감독 경질사 최단 기록을 갈아치웠다.
이후 잠파리니는 어처구니없게도 이아키니와 그의 스탭진을 복귀시켰다. 그러나 이아키니가 2무 1패로 부임 이후 3경기에서 승리를 따내지 못하자 다시 경질되었다. 한 명의 감독을 거쳐서 발라르디니를 재선임했다. 15-16시즌 9번째 감독 교체였다.
가장 많은 경질 횟수를 기록한 감독은 스완지 시티 감독이었던 프란체스코 귀돌린으로, 2004년 1월에 감독을 맡아 2005년 6월까지 감독직을 유지했다가 경질, 2006년 6월에 복귀하여 2007년 4월에 경질, 2007년 6월에 부임하여 해를 넘기지 못하고 경질, 2007년 11월에 갑작스레 감독으로 부임한 후 2008년 3월에 경질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총 4번 부임하여 4번 경질되는 대기록을 세웠다.
3.3. 죽어도 마피아에겐 협조하지 않는다
2008년 시칠리아에 거점을 구축하고 있던 마피아 집단 'Lo Piccolo' 조직의 스파이가 팔레르모 구단에 잠입했다. 이 스파이는 당시 구장을 신축하려는 계획에 몰두하고 있던 잠파리니에게 마피아가 소유한 돈을 쓸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잠파리니와 당시 팔레르모 풋볼 디렉터였던 리노 포스키는 그가 마피아 조직원임을 파악하고 "팔레르모는 절대로 검은 돈을 받지 않는다. 우리는 깨끗한 클럽이다."라며 단호히 거부한 후 경찰에 신고하여 스파이 3명을 체포하게 했다.이후 'Lo Piccolo' 조직은 자신들의 제의가 거절된 것에 격분, 팔레르모의 리노 포스키 스포츠 디렉터에게 잘린 양 머리를 보내는 방식으로 협박했다. 이 일로 충격을 받은 포스키는 잠파리니가 부구단주 직을 제의하는 것을 뿌리치고 팔레르모를 떠났다. 하지만 잠파리니는 그 후에도 마피아의 팔레르모 구단 개입을 원천 봉쇄했고 그에 따라 마피아로부터 살해협박을 수차례 받았음에도 전혀 물러서지 않고 있다.
끝을 모르는 기행과 독선적인 행보 때문에 많은 팔레르모 팬들이 잠파리니에게 등을 돌린 상황이지만, 이런 팬들조차 잠파리니가 '마피아에 맞선 구단주'라는것 만큼은 절대 부정하지 않는다.[8]
4. 지독한 독설가
감독 경질, 독설의 '달인', 잠파리니잠파리니는 세리에에서 악명이 자자한 희대의 독설가다. 이 괴팍한 구단주는 조금만 신경이 거슬려도 즉각 지나칠 정도의 수위의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그가 오죽이나 독설을 퍼부어댔는지, 이젠 세리에 팬들이 그가 언제 독설을 할 지 학수고대할 지경이 되었다. 다음은 그가 지금까지 한 독설 중 일부를 정리한 목록이다.
4.1. 명언 목록
"아드리아누는 항상 노리던 선수였어 임대로 영입하고 싶어. 아드리아누의 정신 상태는 상당히 좋지 않아. 하지만 내 휘하로 들어오면 내가 확실히 개조시켜 주겠어." - 08-09시즌 아드리아누의 영입을 희망하며[10]
"귀돌린의 경질은 오른쪽 팔을 떼어내는 고통이었어." - 07-08 시즌 프란체스코 귀돌린을 세번째로 경질하면서
"이번 일은 전적으로 나의 결정이다. 두 사람(단장과 풋볼 디렉터)은 기분 나빴을 지도 모르지만 나도 이틀 간 고민한 후 결정을 내렸다." - 08-09 시즌 개막 첫 경기 만에 스테파노 콜란투오노 감독을 경질한 후 인터뷰에서
"이건 남자들이 아니다. 여자들이 모여있는 팀이야." - 07-08 시즌, 토리노에게 3:1 역전패를 당한 후 팔레르모를 비판하며
"만약에 나에게 선택권이 있다면, 그들에게 더 이상 월급을 주지 않을 것이다." - 04-05 시즌, 트레비소와 2:2로 비긴 후 그의 팀을 비판하며. 이후 그는 모든 선수들을 발로 차 버리고 싶다며 격한 심정을 토로했다.
"이번 일? 별거 아니야. 난 단지 협박에 절대 굴하지 않았을 뿐이야." - 08-09 시즌 구단에 마피아가 침투하여 자신들의 돈을 쓰고 손을 잡자고 하자 경찰에 신고한 후 두렵지 않았냐는 기자의 질문에
"우리는 카로지에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08-09 시즌 수비수 카로지에리가 코카인 양성 반응을 보여 2년간 출전 정지를 당하자 계약 해지를 하지 않고 약물 치료를 도우며
"모지가 감옥에 안 간다니! 어차피 그러려니 했지. 왜냐고? 이 나라는 웃기거든." - 모지가 무죄 판결을 받았다는 소식에 비아냥거리며
4.2. 망언 목록
"UEFA컵에서 우리 팀이 지길 바라." - 2006-07 시즌 유로파 대회와 리그를 동시에 하는 것이 힘들다고 이야기하며[11]
"무투는 천성이 영약하고 비열한 집시 같아. 루마니아 인들의 민족성이 그렇지." - 06-07 시즌 팔레르모의 수비수 비아바가 경기 도중 부상으로 쓰러져 있는 사이 루마니아 출신
아드리안 무투가 골을 넣고 세레모니를 한 것에 대해 비난하며.[12]
"그들의 고환을 잘라서 내 샐러드에 넣어 함께 먹어버릴 것이다." - 2002-03 시즌 끝내 세리에A 승격이 실패하자 격노하며
5. 근황
팔레르모는 2016년 3월 현재 시즌 28경기에서 7승 6무 15패를 기록하며 승점 26점을 획득 리그 17위를 기록하고 있다. 강등권 순위인 18위에 위치한 프로시노네 칼초와 불과 1점 차에 불과하니 자칫하면 강등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팔레르모가 이 지경이 된 것은 15-16 시즌 잠파리니의 행보가 매우 비정상적이었기 때문이다.잠파리니는 2013년 9월 주세페 이아키니를 선임한 후 웬일인지 그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아끼지 않았다. 이에 이아키니는 2013-14 시즌 세리에B로 강등된 팔레르모를 단숨에 우승시키는 데 성공했고 2014-15 시즌에서도 승점 50점을 획득하며 넉넉하게 리그 잔류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데 2015-16 시즌, 팔레르모가 부진에 휩싸이자 잠파리니는 또다시 경질병이 발동하여 이아키니를 경질했다.
이아키니를 홧김에 경질하긴 했는데, 문제는 그를 대신할 감독감을 미쳐 준비하지 못했다. 부랴부랴 새 감독을 찾아나섰지만 어느 바보가 팀 명성도 그닥인데다 감독을 저렇게나 수없이 바꿔대는 클럽으로 가고 싶어하겠는가. 당연히 어느 누구도 잠파리니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다비데 발라르디니라는 인물이 제노아에서 해고된 후 2년간의 휴식기를 마치고 팔레르모 감독 직을 수락하면서 간신히 공백을 메꿀 수 있었다. 하지만 세간에서는 잠파리니의 이 같은 결정에 의문을 표했다. 이아키니는 그래도 팀을 승격시키고 다음 해에도 팀을 잔류시키는 데 큰 공을 세우기라도 했지만, 발라르디니는 감독 인생을 시작한 이래 어느 곳에서도 성공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경력을 요약하자면
2007년 칼리아리 감독 부임. 2008년 경질
2008년 팔레르모 감독 부임. 2009년 성적 부진으로 경질
2009년 라치오 감독 부임. 2010년 경질
2010년 제노아 감독 부임. 2011년 경질.
2011년 칼리아리 칼초 감독 부임. 2012년 경질됨.
2013년 제노아 감독 부임. 그러나 리그 꼴지로 추락하자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경질.
팔레르모 선수들 또한 이아키니를 함부로 내친 잠파리니를 거세게 비난했다. 하지만 잠파리니는 이 모든 비난을 무시하고 발라르디니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겠다고 선언했지만...
2016년 1월 지역 라이벌 피오렌티나에게 3:1로 패하자 그 책임을 물어 두달 만에 경질시켰다.
이후 잠파리니는 새 감독을 물색해봤지만 누가 그런 데 가려고 하겠는가. 그는 아쉬운 김에 이아키니에게 염치 불고하고 다시 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아키니의 답변은 단 한마디, "싫습니다." 였다. 결국 잠파리니는 발라르디니에게 연락해서 "경질이 취소되었다."라고 통보했다.
이후 발라르디니는 계속 감독 직을 수행할 수 있었지만 3일 후 헬라스와의 원정 경기에서 1:0 승리를 거뒀는데도 발라르디니를 끝내 경질하고 말았다.
잠파리니는 발라르디니를 경질한 후 조반니 트라파토니를 선임하려 했지만 트라파토니는 이를 거부했다. 결국 잠파리니는 이탈리아 출신 감독 선임을 포기하고 구단 최초로 아르헨티나 출신의 기예르모 바로스 스켈로토를 선임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이 모든 과정이 불과 3일만에 벌어졌다. 즉, 피오렌티나에게 3:1로 패한 뒤 감독을 경질했다가 일이 안 되니까 다시 신뢰하고 3일 뒤 경기를 했는데 이겼음에도 끝내 경질하고 새 감독을 선임한 것이다.
그런데 새롭게 부임한 스켈레토 감독은 라이센스 미취득으로 1개월 만에 사임했다! 졸지에 새 감독을 잃어버린 잠파리니는 주세페 이아키니를 재영입했다.
사실 이아키니가 바로 감독으로 선임된 것은 아니다. 스켈로토가 라이센스 문제로 감독직을 수행하지 못하는 동안, 수석코치였던 비비아니가 20라운드에서 임시 감독을 맡았고 뒤이어 팔레르모 B팀을 이끌던 보시가 21라운드 감독 직을 수행했다. 그 후 1월 25일에 비비아니, 보시가 본래의 자리로 복귀하고 테데스코가 임시 감독을 수행했다. 그 후 2월 10일에 스켈로토 감독이 라이센스 취득에 실패하여 선임이 무산되자 보시가 다시 임시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그후 5일 후 보시는 다시 본연의 자리로 복귀하고 이아키니가 마침내 감독직에 복귀했다.
즉, 팔레르모는 한 달 동안 감독직에 6명을 선임한 것이다.(발라르디니, 스켈로토, 비비아니, 보시, 테데스코, 이아키니)
그리고 2016년 3월 9일, 이아키니 감독은 팔레르모를 떠날 것이며 더 이상 팔레르모와 인연을 맺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가 떠나기로 결심한 것은 잠파리니와의 불화 때문이다. 잠파리니는 수비에만 치중하는 이아키니의 전술에 많은 불만을 가졌고 허구헌날 말다툼을 벌이다 결국 이아키니가 제풀에 지쳐 물러나게 된 것이다. 잠파리니는 그런 이아키니를 "멍청하다"고 비난했다. 이로서 이아키니는 팔레르모를 떠나게 되었고 잠파리니는 이제 15-16 시즌 8번째 감독을 선임해야 한다.
한편, 잠파리니는 16/17 시즌을 끝으로 새 구단주를 모셔온 후 구단주 일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마땅한 새 구단주를 찾지 못했는지 요즘들어 다음 시즌에도 구단주 직을 맡으려 한다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다. 또한 새 구장을 세우는 일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시 의회의 동의를 얻지 못하고 투자자들의 충분한 지원도 이끌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그런데 잠파리니가 런던의 한 회사에 팔레르모를 10유로 (한화 약 1만 3천원)에 매각했다는 소식이 나왔다.
허나 위 회사가 지불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며 인수를 포기하였고 다른 인수자가 나타났으나 이 사람들 역시 지불 보증을 하지 못하여 잠파리니는 가택연금 상태에서 팀의 파산을 바라봐야만 했다.
[1]
약어인 MZ는 본인 이름의 이니셜이기도 하다.
[2]
메짤라 자리에서 뛰었다고 한다.
[3]
신구장이 중요했던 이유는 쇼핑 센터가 결합되어 새로운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모델을 원했기 때문이다.
[4]
공로로 팔레르모 명예 시민권을 받았다.
[5]
우디네세에게 홈에서 0-7로 패배한 날, 라커룸에 0-7이라고 적힌 수건을 채워뒀다고 한다.
[6]
허나 아마우리가 망한 이유는 유벤투스가 자조한 감도 크다. 아마우리를 그저 전봇대로만 활용했다. 세코 단장이 감독한테 안 맞는 선수만 쥐어주거나 그냥 수준이 딸리는 감독을 선임했다. 아마우리 말고도 당시에 실패한 선수가 넘쳐난다.
[7]
재계약 과정에서 연봉 문제로 틀어졌다.
[8]
아닌게 아니라 잠파리니가 구단주를 맡기 전의 팔레르모 팀은 수십년간 시칠리아 마피아들과 크든 작든 커넥션이 끊이지 않는 상태였다.
[9]
당시 인테르는 즐라탄, 크레스포를 영입하면서 아드리아누의 파트너와 교체선수를 구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드리아누의 멘탈이 드디어 터져버리면서 즐라탄과 크레스포가 주전으로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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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9 시즌 후반기(봄 A매치 기간) 결국 무단이탈한다. 그 무리뉴조차 모라티의 간곡한 설득에 아드리아누를 갱생시키려 노력한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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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시 팔레르모는 리그 중반기까지 1위를 달리는 이변을 일으키고 있었고 챔스, 더욱 나아가 리그 우승을 위해 UEFA컵에서 2군을 내보내며 광탈당한다. 세상사 이렇게 쉽다면 좋겠지만 결국
아마우리의 부상 이후 쭈욱 하향세로 떨어져 리그 우승은 인테르에게, 리그 4위마저
호나우두,
마시모 오또의 영입으로 파죽지세를 달리던 밀란에게 내주며 다시 UEFA컵에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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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잠파리니는 루마니아 축구협회로부터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받자 "무투를 교활한 집시라고 부른 건 사실이지만 모욕할 의도는 없었다."라는 변명을 늘어놓아 다시 한 번 비판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