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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속/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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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유비의 평가
2.1. 유비가 실제로 마속을 그렇게 평했는가?2.2. 반론
3. 능력4. 강유에게 라이벌 의식?

1. 개요

마속의 평가를 다룬 문서.

2. 유비의 평가

마속에 대한 정사 삼국지의 기록에 의하면 유비의 언급은 다음과 같다.
先主臨薨謂亮曰 : 「馬謖言過其實, 不可大用, 君其察之!」亮猶謂不然,
선주(유비)가 훙(사망)할 때 (제갈)량에게 말하길, "마속은 말만 요란하고 실속이 없어 크게 쓸 사람이 아니니 그대가 주의해야 할 것이오!" (제갈)량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여(이하 생략)
▶ <마량전>

마속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유비가 임종의 자리에서 그에 대해 했다는 위와 같은 말로 요약된다. 즉, 말이 실질보다 앞서니 크게 쓸 자가 못된다는 것. 결과적으로 이 말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2.1. 유비가 실제로 마속을 그렇게 평했는가?

2.2. 반론

3. 능력

기본적으로 마속은 참모나 보급장교라면 큰 그릇이나 야전 지휘관이라면 작은 그릇이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건 몰라도 인재를 보는 눈만큼은 득도한 유비의 말이다. 다만 참모로 일할 때는 나름대로 괜찮은 조언도 했고, 제갈량이 병법도 논하며 신임했다는 것을 보면 참모로는 적어도 평균치 이상은 했을 것이다.[6] 가정에서 거하게 말아먹기는 했지만 야전 사령관과 참모는 임무가 전혀 다르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7] 그런데 참모도 결정권이 없을 뿐, 무조건 작전지휘와 담을 쌓는 게 아니라 전황을 제대로 파악해서 작전지휘에 대한 조언도 해야 하고, 경우에 따라서 지휘관 대신 지휘를 하기도 한다.[8] 따라서 마속이 가정에서 설령 참모직을 맡아도 군사를 산 위에 주둔시켜야 한다는 헛소리나 했을 것이며, 그나마 마속이 활약할만한 분야는 비서나 행정 등일 것이다.직접 군사를 지휘하는 사령관이 아니라 사령관에게 조언이나 해주거나 옆에서 상관을 보좌하는 역할만 했으면 그럭저럭 활약했을지도 모를일.

제갈량은 형제처럼 가까웠던 마량에 대한 옛정 이외에도 마속에게 나름의 가능성을 보았던 것 같다. 그에게 전략가로서의 자질을 보고는 가정을 중요 포인트로 삼아 위군이 오는 방향에 따라 병력을 운용해야 하는 가정 전투에 파견한 것으로 그가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실적을 올릴 계획까지 지참해주고 부장을 주르륵 딸려주고[9] 여러 부대를 따로 인솔하게 해 마속을 선봉으로서 가정에 투입했다. 이때 병력의 수가 결코 적지 않았으리라는 점을 알 수 있는데 이는 한진춘추에 나오는 "기산과 기곡 양쪽에서 아군의 수가 적보다 많았다"는 제갈량의 언급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당시 위는 오와의 전선에 신경쓰느라 촉을 상대하는데 많은 병력을 투자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북벌 초기에는 촉이 병력 면에서 우위에 있었다. 또한 마속의 대패로 촉군은 왕평이 흩어진 병사들을 수습하고 서현의 1천호의 백성들을 데려와도 피해가 복구가 안될 정도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으니 원래 데려갔던 부대 규모도 컸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결정적으로 이때 제갈량 곁에는 사람이 부족했다. 촉한은 이릉대전 몇년 전부터 관우, 황충, 장비 등의 일급 사령관들을 비롯한 여러 인재들이 줄줄이 죽어나갔고 이릉에서는 황권과 제갈량의 의형제로까지 추정되는 마속의 형 마량을 잃었기 때문에 재능이 보였던 마속을 기용하는건 이상한 일까지는 아니었던 것. 적극 가정에 갈 다른 후보 중에 조운은 조진과 대치하고 있으니 제외, 주변에서는 위연 오의를 가정으로 돌리라고 권했지만 그럴 경우 그들의 빈자리를 마속이 메워야 하고, 가정에서 막는 동안 농서지역을 장악하는 더 어려운 임무가 마속에게 주어진다.[10] 3군이 호응했다고 하지만 민심이 쏠렸다는 것이지 관리들까지 죄다 문열고 투항한 게 아니다. 특히 위의 명장 곽회가 필사적인 노력으로 농서 지역을 촉이 완전히 장악하는 것을 저지했다. 우선 신속하게 상규의 곽회를 제압해서 천수, 남안을 완전히 장악해 촉군이 옹양주에 머물곳을 만드는게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한진춘추의 저자인 습착치는 마속을 인재라 평하며 비록 실패했으나 그를 처형한 것은 잘못된 일이라며 반박했다. 유비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제갈량이 마속을 기용했던 것은 그만큼 마속이 능력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이고 안그래도 인재가 부족한 작은 나라에서 그런 인물을 없앤 것은 스스로의 힘을 깎아먹은 이야기라는 뜻이다. 참고로 습착치는 촉한정통론의 시조격인 인물이다. 아무리 한 개인이 뛰어나다고 해도 집단을 통솔하는 원칙과 규율보다도 중요할 수는 없기 때문에 실패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하지만, 처형을 하는 것이 당연한지는 별개의 문제다. 적어도 당시에는 마속의 재능을 아까워하는 의견이 있었다.
“제갈량이 상국(上國-위나라)을 겸병하지 못한 것이 어찌 당연하지 않겠는가! 무릇 진나라는 순임보를 살렸으니 폐법(廢法)하여 공을 이루었고, 초성왕은 득신이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몰랐기에 그를 죽이고 거듭 패배했다. 이제 촉은 궁벽한 한 귀퉁이의 나라로 인재가 상국보다 적은데 그 준걸을 죽이고 물러서서 어리석은 자를 거두어 쓰니 명법(明法)을 인재보다 중히 여겼던 것이다. 이는 삼패지도(三敗之道)를 배우지 못한 것으로 장차 대업을 이루는 것이 어찌 어렵지 않았겠는가! 또한 선주(유비)가 마속을 크게 쓰지 말라고 경계했지만 어찌 마속이 인재가 아니라 말할 수 있으리? 제갈량이 유비의 가르침을 받들고도 이를 따르지 않은 것은 분명 마속을 완전히 버리기에는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천하의 재상으로 큰 공을 세우려 하면서 재능을 헤아려 임무를 제한하지 않고 그 그릇에 따라 일을 맡기지 않았다. 만약 사람을 알아보는 일에 허물이 있었다면 주군의 가르침을 위배한 것이고, 능력을 헤아림에 실수가 있었다면 유익한 인재를 죽인 꼴이다. 이를 두고 보면 (제갈량을) 지혜로운 자라 말하기 어렵다 할 것이다."
습착치

그런데 마속이 단지 패군지장이라 처형당한 게 아니라 정사 상랑전의 기록대로 도망가려 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때문에 이런 견해도 있다.
"이를 살펴본즉 마속은 군사가 패하자 도망하였고 후에 다시 잡아들이니 하옥(下獄)되어 죽은 것이다. 마속은 말이 그 실제보다 지나쳐 본래 취할 바가 없었다. 또한 제갈량의 절도(節度-군사 명령)를 어겨 군사를 잃는데 이르렀으나 복죄(伏罪)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아니하고 오히려(尙) 멀리 도망갔으니, 죄가 있으면 형벌을 피하지 아니하는 가르침을 어겼으매 제갈량이 그를 주륙(誅戮)한 것은 심히 마땅하거니와 습착치(習鑿齒) 등이 제갈량이 잘못 형벌을 내렸다라고 기록한 것은 지나치다." 라고 하였다.
사사발복(四史發伏)에서 홍량길(洪亮吉)[11]이 말함

또한 명나라 시대 학자인 왕세정도 다음과 같이 습착치의 견해를 비판했다.
마속이 이야기한바, 마음을 공격하는 것이 상책이고, 성을 공격하는 것이 하책이며, 마음으로 싸우는 것이 상책이고, 병사로 싸우는 것이 하책이니, 비록 태공, 손무가 법을 만들어도, 누가 이를 능가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장합은 일개 기장(騎將)으로, 익덕의 얕은 꾀로, 그를 단절시키기에 넉넉했으나, 마속은 공명의 정비된 군을 부리고도, 한번 싸우곤 꺾이고 무너져, 다시 떨쳐 일어나지 못했으니, 이가 마음으로 싸운다는 견해로, 천한 선비가 주의를 기울여 살펴 가정이 흔들리고 패한 것이다. 공명이 미처 유생을 모두 떼어놓을 수 없었음이 옳고, 마속을 경솔하게 믿어 그를 크게 기용했다가, 그 후 마속을 주살했음이 옳다. 습착치는 공명이 그가 주살됨은 얻었으나 그가 주살될만한 까닭은 얻지 못했다고 논했다. 위연, 오의는 쓰일 수 있었으나 쓰이지 않아, 그들의 불평이 오래 지속됐다. 진실로 마속을 아껴 주살하지 않았으면, 무엇으로 복종시킬 것이고, 자신만이 옳다 여겨 다시 법을 그르치는 이는, 무엇으로 장차 법을 행할 것이며, 장차 법을 행하더라도 무리의 의견은 뒤섞여 어지러워져 사태가 엉클어질 것이고, 법을 행하지 않으면 군기는 와해돼 부진할 것이다. 마속은 청담이나 떠드는 선비인데, 어찌 성득신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순림보(荀林父)가 사면돼 진(晉)이 패국(覇國)이 됐으나, 성득신이 주살됐어도 초(楚)가 굳셈을 해하지 못했으니, 그런즉 초 또한 잘못됐다고 할 수 없다. 거듭 상랑전을 고찰하니, 제갈량을 따라 한중으로 갔는데, 상랑이 본디 마속과 친해, 마속이 도망가나 상랑이 사정을 알고도 알리지 않아, 제갈량이 이를 한스러워하여 면관시켜 성도로 돌려보냈으니, 그런즉 마속 또한 도망갔던 것이다. 바로 사형하지 않고 사패(司敗)가 찾은 이후에야 그를 잡았으니, 주살하지 않으면 어쩌란 것인가?
왕세정(王世貞)[12]의 독서후(讀書後) 서마속전후(書馬謖傳後)

또 속후한서를 지은 학경은 습착치의 평을 비판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갈량이 장완(蔣琬)의 말에 대답한 것을 살피건대, 성심(誠心)을 열어 보이고 공평한 도리를 베풀었음을 알 수 있다. 죄를 밝히고 법을 세우는 것은 적을 토벌하는 규범이 되는 것이니, 습착치가 제갈량을 지적하여 법을 폐하여 재주 있는 이를 보전(保全)함이 마땅하다 말한 것은 잘못이다.

4. 강유에게 라이벌 의식?

강유가 촉에 합류해서 제갈량의 가르침을 받게 되자, 마속이 자신의 입지에 위기를 느껴서 강유를 질투하게 되었다는 얘기도 있고, 실제로 근, 현대의 삼국지 관련 창작물에서는 이런 식으로 각색되는 경우도 많다.[13]

이러한 이야기는 연의에서 묘사된 제갈량의 1차 북벌에서 강유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연의에서 강유는 등장부터 천수 전투에서 적수가 없고 거의 신선이나 신 급으로 묘사되는 천하의 제갈량을 계책으로 한 번 이기고 오호대장군중 한명인 조운과의 일기토를 벌여 제갈량에게 큰 임팩트를 심어준다. 이후 제갈량은 강유를 사로잡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어야겠다며 조위의 부마인 하후무까지 풀어주는 등 공을 들여 강유를 얻으며 평생 깨우친 것을 물려줄 자를 얻었다고 기뻐하며, 제갈량의 기대에 부응하듯 강유는 천수성을 화살 한 대로 얻는 공을 세우고 대 조진전, 대 강족전에서도 활약한다. 마속은 이 모습들을 모두 보고 난 후에 사마의가 재등판하자 가정을 지키러 갔다가 대패한다. 마속과 강유 둘 다 당시 젊은 인재로 묘사되었고 제갈량이 큰 기대를 걸었다는 점에서 볼 때, 마속이 강유에게 제갈량의 으뜸가는 총애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가정에서 무리수를 두었다는 추측이 나올 법 하다.

하지만 실제 역사를 살펴보면 전혀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이다. 강유는 제갈량의 1차 북벌 당시 상관인 태수 마준에게 기현 출신이라는 이유로 의심을 받아 버려졌고, 이후 기현 주민들의 대표격으로 촉군 진영에 가서 항복 협상을 진행하다가, '마속이 가정에서 장합에게 참패당해서' 촉군이 퇴각하게 될 때 함께 가면서 귀순했다. 당연히 강유가 군사를 지휘해 촉군과 전투를 치른 일은 한 번도 없었고, 1차 북벌 당시 촉군을 위해 공을 세우거나 촉나라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줄 만한 일 자체도 전혀 없었다. 애시당초 마속과 강유가 서로 만난 일조차도 한 번도 없었을 확률이 크다. 마속이 도망치다 붙잡혀 왔을 때 서로 얼굴 도장이나 한 번 찍었을까.

게다가 촉군 내에서의 입지를 따져 봐도 강유는 마속이 라이벌 의식을 느끼고 말고 할 짬이 되지 못했다. 마속은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에 촉 진영 내부에서 꽤나 촉망받는 인재였고 제갈량에게도 상당히 신임받고 있었던 반면, 강유는 이제 막 들어온 항장이고 나이는 서른도 안 된 햇병아리였으니[14][15] 당시 그의 입지는 마속이 라이벌 의식을 느낄 가치조차 없을 정도로 미미했다. 설령 강유가 촉나라에서 촉망받았더라도 마속 입장에서는 본인 다음 세대를 맡을 뛰어난 인재이지 본인의 직접적인 라이벌은 아니었다. 당장 위에 왕평이 아직 짬이 낮아 마속 대신 대장을 할 여지가 없다고 언급되어 있는데, 강유는 그보다도 아래였고 실제로 왕평 사후에야 촉의 총대장 역할을 맡게 되었다.[16]


[1] 위연과 오의라는 대안이 이미 제시되고 있었고, 무엇보다 이 두 장군은 1차 북벌 당시 그 역할 자체가 불분명하다. 마속이 성공한 뒤의 다음 작전에 투입하려고 했는데 마속이 말아먹어서 아무것도 못하고 퇴각한 거라는 설도 있지만 뒷받침되는 사료가 없어서 추측의 영역. [2] 유비와 제갈량의 사이가 수어지교로 비유될 만큼 워낙 가까웠던 만큼 제갈량이 자주 만나고 아꼈던 사람들을(그들이 현재 중임을 맡고있던 아니던) 유비가 모를리 없었을 것이다. [3] 마속의 형이자 제갈량과는 의형제 같은 사이인 마량은 유비의 명에 따라 촉한과 무릉만이의 동맹을 위한 외교관으로 종군했다가 촉에게 전황이 불리해진 뒤 뚜렷하지 않은 죽음을 맞이했다. 어떤 이유로 죽었든 이릉대전으로 인해 사망한 마량과 그의 유족에 대해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마속이 언급됐다고 봐도 이상하지 않다. [4] 당장 제갈량의 후계자 장완은 본인 잘못으로 유비한테 밉보여서 한때 벼슬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는데 유비 사후 제갈량이 다시 데려다 놓고 기용해서 재상 자리까지 물려받았던 사람이다. [5] 제갈량은 실제로 가정전투의 패배로 우장군으로 자진 강등하였고, 3차 북벌의 성과를 바탕으로 승상에 복귀하였으나, 우장군 시절에 이엄이 제갈량보다 권위 상 위였다는 근거 역시 없다. [6] 마속의 능력을 보여주는 일화중 하나가 양양기의 '공심위상'. 남만을 정복하러 가는 제갈량에게 "용병의 대원칙은 적의 마음을 치는 것이 상책이고 성을 공격하는 것은 하책이며, 마음으로 싸우는 심리전이 상책이고 군사로 싸우는 전투는 하책입니다(夫用兵之道 攻心爲上 攻城爲下 心戰爲上 兵戰爲下). 그러므로 마음을 정복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라고 말한 일화.실행이 쉽냐고 물으면 또 다르지만 정말로 구구절절이 옳은 소리라 안 할 수 없고 이렇듯 제갈량에게 조언을 하는것만 봐도 나름대로 식견이 있던것으로 보이다. [7] 이에 대해서 차라리 왕평을 부장이 아닌 총대장으로 쓸 수도 있지 않냐는 반론이 있다. 하지만 당시 왕평은 참군이었던 마속에게 소속되어 선봉 역할을 맡았을 정도로 낮은 직급이었던 데다가, 항장이라 내부입지가 적을 수밖에 없는(훗날 강유도 제갈량-장완 라인을 탔음에도 중앙정계에서 그다지 힘을 못 썼다) 왕평을 아무 이유없이 하루 아침에 승진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이 상황에서 제갈량이 마속에게 군사적 식견이 뛰어난 왕평을 붙여준 것만 해도 그의 꼼꼼한 성격을 볼 수 있다. 이후 왕평을 중용한 것도 그가 군사적 식견을 통한 실적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8] 실제 삼국지에서 참모의 조언에 따라 부대가 산에 올라간 사례가 있다. 이쪽은 제대로 판단해서 오히려 성공한 사례인데, 참모 역시도 전황을 제대로 파악하는 안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9] 상대 장군인 장합조차도 중요 부장으로 비요만 확인되는 정도인데 마속은 이름이 확인되는 부장만 4명이다. 아무리 허접해 보여도 역사에 이름이 남은 네임드 인물은 능력이든 명성이든 뭐 하나는 무명 장수들과 차별화되는 비범한 구석이 있다고 봐야 한다. [10] 그런 의미에서 후일 자신의 후계자인 장완에게 강유를 소개시켜 주어 그가 장완을 군사적으로 도와 순조롭게 승진할 수 있도록 한 것처럼 마속에게도 군사적인 조언을 해줄 부장을 붙이면 마속이 그 역할을 다해주고 향후 마속의 중요 측근으로 마속을 보좌하는 역할로 왕평을 제갈량이 여겼을 가능성이 있다. 문제는 왕평은 충분한 조언을 해줬으나 마속이 그 말을 듣지 않았다는 것이지만. [11] 산문 및 사륙문(四六文:騈文)에도 능했던 청나라의 문인 겸 학자. 변문팔대가(騈文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경학(經學)·역사지리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주요 저서에는 《홍북강전집(洪北江全集)》,《권시각집(卷施閣集)》등이 있다. [12] 가정칠재자(嘉靖七才子:後七子)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고, 학식은 그 중에서도 제1인자였던 중국 명나라의 문학자. 명대 후기 고문사(古文辭)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격조를 소중히 여기는 의고주의(擬古主義)를 주장했다. 주요 저서에는 《엄주산인사부고(弇州山人四部考)》등이 있다. [13] 삼국지 공명전, 진삼국무쌍 시리즈. 진삼국무쌍에서의 마속은 클론 무장이긴 하지만, 주변 인물들의 평이나 진지 대화 등을 통해 마속이 강유에게 라이벌 의식을 지니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언급하기도 하며 진삼국무쌍 BLAST에 레어 등급으로 나왔기 때문에 나중에라도 플레이어블로 참전하여 강유와 라이벌 기믹을 이어갈 가능성도 있다. [14] 강유는 202년생, 마속은 190년생으로 12살 차이가 나는 띠동갑이다. 228년에는 각각 27세, 39세. [15] 나이나 경력을 비교한다면 장완과의 비교과 더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장완과 마속 모두 유비의 입촉 시기부터 활동하였으며 입촉 이후 비슷한 시기에 현령, 현장을 역임하였다. 장완이 227년 참군으로 승진한 것과 마속이 1차 북벌 당시 참군을 역임하고 있던 것을 본다면 두 사람의 경력이 비슷한 것을 알 수 있다. [16] 강유가 대장군이 된 것은 256년으로, 제갈량이 죽고 무려 22년이나 지난 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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