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우 콜루나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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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 · 1964 · 1965 · 1966 · 1967 | |||
포르투갈의 前 축구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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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
마리우 콜루나 Mário Colun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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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마리우 에스테베스 콜루나 Mário Esteves Colun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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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35년
8월 6일 포르투갈령 모잠비크 인하카섬 인하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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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2014년
2월 25일 (향년 78세) 모잠비크 마푸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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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포르투갈| ]][[틀:국기| ]][[틀:국기| ]] | [[모잠비크|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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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키 172cm | |
포지션 | 미드필더 ( 중앙, 공격형) | |
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유스 | 데스포르티보 로렌수 마르케스 (1951~1954)[1] |
선수 |
SL 벤피카 (1954~1970) 올랭피크 리옹 (1970~1971) 에스트렐라 포르탈레그레(1971~19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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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 57경기 8골 ( 포르투갈 / 1955~19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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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르투갈의 전 축구 선수. 선수 시절 주로 중앙 미드필더로 활동하며 벤피카에서의 두 번의 유러피언컵 우승, 포르투갈의 월드컵 3위를 차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콜루나를 대표하는 별명으로는 ‘신성한 괴물’(O Monstro Sagrado)[2]가 있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마리우 콜루나는 모잠비크 인하카에서 포르투갈인 아버지와 모잠비크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운동 신경이 뛰어났던 콜루나는 모잠비크에서 SL 벤피카의 지원을 받는 제휴구단 데스포르티보 로렌수 마르케스에서 유소년 선수로 활약하였으며 그렇게 벤피카의 눈길을 끌더니 1954년 마침내 19살의 나이에 벤피카에서 프로 선수로 데뷔하게 된다.콜루나는 당시 벤피카 첫 시즌에 인사이드 포워드로 뛰면서 프로 데뷔 첫 시즌만에 바로 두 자리수가 넘는 14골을 득점하는 등 엄청난 대활약을 펼쳤고, 자신의 첫 프리메이라 리가 우승까지 경험하게 된다. 이런 대형 유망주인 콜루나에게 벤피카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이후 두 번째 시즌을 맞이하자 당시 팀의 감독이였던 오토 글로리아 감독은 다재다능한 콜루나의 포지션을 미드필더로 변경한다. 그리고 공격형 미드필더 또는 중앙 미드필더로 뛰면서 완전히 포텐을 터트리게 되는데, 미드필더로 뛰게 되니 자신의 주된 장점인 뛰어난 체력과 피지컬이 크게 돋보였으며 정확하고 강력한 중거리슛과 화려한 기술들까지 맘껏 뽐내기 시작한다.
벤피카는 1959년 팀에 새롭게 부임한 벨라 구트만 감독과 콜루나를 비롯해 주제 아구아스, 주제 아우구스투와 같은 월드 클래스 포워드들을 바탕으로 프리메이라 리가를 지배했고, 1960-1961 시즌에는 유러피언컵 결승전 FC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중거리 슛 득점까지 성공한다. 콜루나의 득점포를 비롯해 벤피카는 총 3골을 기록하며 바르셀로나를 3:2로 격파하였으며 결국 자신의 첫 번째 유로피언 컵 우승을 차지한다.
이후 1961-1962 시즌 새롭게 특급 유망주 에우제비우가 등장하고 콜루나는 에우제비우와 함께 벤피카를 이끌면서 유러피언컵 결승전에 다시 한번 진출한다. 그리고 1961-1962 시즌 레알 마드리드 CF와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페렌츠 푸스카스에게 해트 트릭을 얻어맞았으나 콜루나가 3:3을 만드는 동점골을 기록하고 에우제비우가 5분만에 2골을 성공시키며 5:3 대역전승을 거두게 되면서 유로피언컵 2연패 달성은 물론 유럽 축구를 지배하던 레알 마드리드 시대의 종언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 시즌 이후 벨라 구트만 감독은 연봉 협상 관련해서 고위 관계자들과의 마찰로 팀을 떠났고, 구트만은 벤피카를 떠나면서 벤피카는 100년 동안 유럽 대항전에서 우승하지 못할 거라고 저주한다. 하지만 당시 이 말은 믿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왜나하면 에우제비우와 콜루나가 이끄는 벤피카를 멈춰 세울 팀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62-1963 시즌 벤피카는 유러피언컵 3연패 달성에 도전했으나 AC 밀란에게 패해, 준우승에 그쳐 3연패에 실패했고, 1964-1965 시즌에는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에게 패해 준우승에 그쳤다. 이후 1967-1968 시즌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는 보비 찰튼 - 데니스 로 - 조지 베스트가 이끄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에게 연장 접전 끝에 4:1로 패배하여 결국 3번이나 준우승에 그쳤고 구트만의 저주는 2000년대 이후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콜루나는 1970년까지 벤피카에서 포르투갈 프리메이라 리가 우승 10회 달성, 포르투갈컵 우승 6회, 유로피언컵 우승 2회를 차지하였고, 이후 올랭피크 리옹에서 새롭게 둥지를 틀어 1년 동안 뛰다가 1972년에는 에스트렐라 포르탈레그레에서 자신의 축구 선수 인생을 끝마친다.
2.2. 국가대표 경력
콜루나는 1955년에 국가대표에 데뷔했고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대표팀 주장을 맡고 에우제비우 등 SL 벤피카 동료들과 함께 펠레와 가린샤가 버티는 브라질도 박살내는 등 조별리그를 3전 전승으로 8강에 진출했고, 이탈리아를 조별리그에서 탈락시키고 8강에 진출한 다크호스 북한과의 경기에서 1분 만에 선제골을 실점하는 등 3:0으로 밀리고 있었다. 하지만 에우제비우 혼자서 4골을 넣고 주제 아우구스트가 승부에 쐐기를 박는 골을 넣으면서 5:3으로 역전승을 거두며 4강에 진출한다.4강에서는 보비 찰튼 - 바비 무어 - 고든 뱅크스가 버티는 잉글랜드에게 2:1로 패배해, 결승 진출이 좌절되었고 3·4위전에서는 레프 야신이 버티는 소련을 상대로 승리하면서 3위를 차지하며 포루투갈의 월드컵 역사상 최고의 성적을 거둔다. 이후 1968년에 콜루나는 국가대표에서 은퇴했다.3. 개인사
이후 조용한 말년을 보내다가, 2014년 2월 25일 향년 78세로 사망하였다.4. 플레이 스타일
콜루나는 뛰어난 패싱력을 자랑했을 뿐만 아니라 강력한 킥력과 무시무시한 몸싸움도 보여주었다.5. 평가
커리어 대부분을 SL 벤피카에서 보냈으며 벤피카에서 모두 16시즌을 뛰면서 10번의 리그 우승 및 2번의 유로피언컵 우승을 포함해 19번의 우승 타이틀을 거머쥐며 벤피카의 마지막 유럽 대회 우승 및 황금기를 이끈 전설적인 선수다. 총 525경기 출전 126골을 기록해 에우제비우와 함께 팀 역사상 역대 최고의 레전드로 손꼽힌다.국가대표팀에서는 57경기를 뛰며 자신의 처음이자 마지막 월드컵인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주장으로서 팀의 에이스인 에우제비우를 잘 보좌해주면서 3등이라는 엄청난 호성적까지 거두게 된다. 이는 이후 후배들인 피구, 데쿠, 호날두, 페페 등 내로라하는 유명 선수들도 이루지 못한 포르투갈의 월드컵 최고 성적이다.
엄청난 시야와 경기를 읽는 좋은 눈을 통해 상대의 중원을 장악하며 미친 퀄리티의 패스를 뿌려대는 것도 모자라 때에 따라서는 미친 슈팅으로 골까지 때려넣는 말그대로 60년대 유럽 축구를 대표하는 중앙 미드필더였다.
그뿐만 아니라 뛰어난 리더십을 바탕으로 언제나 차분한 모습 및 겸손한 태도로 소속팀 벤피카와 포르투갈 국가대표팀에서 오랜 기간 주장을 맡았다.
6. 기록
6.1. 대회 기록
-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
- FIFA 월드컵 3위: 19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