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오 페라촐로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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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
이탈리아의 축구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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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 이름 |
<colbgcolor=#fff,#1F2023> 마리오 페라촐로 Mario Perazzol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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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1년 6월 7일 | |
이탈리아 왕국 파도바 | ||
사망 | 2001년 8월 3일 (향년 90세) | |
이탈리아 파도바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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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축구 선수 ( 수비형 미드필더 / 은퇴) | |
소속 | <colbgcolor=#eeeeee> 선수 |
칼초 파도바 (1928-1933) ACF 피오렌티나 (1933-1936) 제노아 CFC (1936-1942) 브레시아 칼초 (1942-1948) AC 시라쿠사 (1949-1950) |
감독 |
브레시아 칼초 (1946) AC 시라쿠사 (1950-1951) US 트리에스티나 칼초 1918 (1951-1953) ASD 판풀라 (1953-1954) 브레시아 칼초 (1954-1955) 타란토 FC (1955-1957) AC 시라쿠사 (1957-1959) AC 시타 디카스텔로 (1961-1962) SSC 디캄포바소 (1965-1966) 니사 FC (1970-1972) AC 시라쿠사 (1972) 칼초 파도바 (1972-19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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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 8경기 ( 이탈리아 / 1936~19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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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의 전 축구 감독.2. 생애[1]
2.1. 선수 생활
2.1.1. 클럽
1928년부터 고향팀 칼초 파도바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한 페라촐로는 1929년 인테르를 상대로 프로 첫 골을 넣었지만 팀은 1대6으로 대패했다.1929년, 세리에 A 출범 당시 파도바는 세리에 A에서 출발했지만 17위에 그쳐 세리에 B로 강등당했고 세리에 A로 다시 올라오는 데에는 2년이 걸렸다.
1933년에 페라촐로는 ACF 피오렌티나로 이적했고 3시즌 후 제노아 CFC로 다시 이적했다.
제노아에서 맞이한 첫 시즌, 페라촐로는 코파 이탈리아 결승전에서 루이지 토르티(Luigi Torti)에게 어시스트를 기록했고 그의 클럽 커리어에서 유일한 트로피를 차지했다. 제노아에서 페라촐로는 6년을 보냈고 이 시기가 그의 축구 선수 생활 중 전성기였다.
1942년, 제노아에서 나온 페라촐로는 브레시아 칼초에서 7년을 더 뛰었고 1946년에는 잠시 선수 겸 감독으로 브레시아를 지휘하기도 했다.
페라촐로는 1949년에 AC 시라쿠사에서 선수로서 마지막 1년을 보냈고 단 한 경기를 더 뛰었다.
2.1.2. 국가대표
페라촐로는 1936년 11월 15일, 독일과의 베를린 원정 경기에서 처음 대표팀 경기에 출전했다.페라촐로는 1938년 월드컵에도 선발되었지만 경기 출전은 없었다.
그는 8번의 대표팀 경기 출전 기록이 있다.
2.2. 감독
축구 감독으로 페라촐로는 여러 클럽을 맡았지만 길게 재직하지는 못했다.1951-52 세리에 A에서 US 트리에스티나 칼초 1918의 감독을 맡아 팀을 강등 위기에서 구한 좋은 기억도 있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축구계에 존재했던 많은 위대한 선수들처럼 페라촐로도 테크닉을 중시했다.4. 뒷이야기
5. 수상
5.1. 클럽
5.2. 국가대표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