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7f022b, #c70243 20%, #c70243 80%, #7f022b); color: #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카를로스 1세 | 펠리페 2세 | 펠리페 3세 | 펠리페 4세 |
포르투갈의 이자벨 |
1
메리 1세2
엘리자베트 드 발루아3
오스트리아의 안나
|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리타 |
1
프랑스의 엘리자베트2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
|
|
카를로스 2세 | 펠리페 5세 | 루이스 1세 | 페르난도 6세 | |
1
오를레앙의 마리 루이즈2
팔츠노이부르크의 마리아 안나
|
1
사보이아의 마리아 루이사 공녀2
파르마의 엘리사베타 공녀
|
루이즈 엘리자베트 도를레앙 | 포르투갈의 바르바라 | |
카를로스 3세 | 카를로스 4세 | 호세 1세 | 페르난도 7세 | |
작센의 마리아 아말리아 |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 공녀 | 줄리 클라리 |
1
포르투갈의 마리아 이자벨2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 아말리아3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
|
|
아마데오 1세 | 알폰소 12세 | 알폰소 13세 | 후안 카를로스 1세 | |
마리아 비토리아 달 포조 |
1
오를레앙의 메르세데스2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
|
바텐베르크의 빅토리아 유지니 공녀 | 그리스와 덴마크의 소피아 | |
펠리페 6세 | ||||
레티시아 오르티스 로카솔라노 |
}}} }}}}}} |
<colbgcolor=#C2DEE9><colcolor=#000000> 스페인 페르난도 7세의 왕비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 공주 Principessa Maria Cristina delle Due Sicilie |
||
|
||
이름 | 이탈리아어 |
마리아 크리스티나 페르디난다 디 보르보네 (Maria Cristina Ferdinanda di Borbone) |
스페인어 |
마리아 크리스티나 페르난다 데 보르본 이 보르본 (María Cristina Fernanda de Borbón y Borbón) |
|
출생 | 1806년 4월 27일 | |
시칠리아 왕국 팔레르모 | ||
사망 | 1878년 8월 22일 (향년 72세) | |
프랑스 제3공화국 르아브르 | ||
배우자 | 페르난도 7세 (1829년 결혼 / 1833년 사망) | |
제1대 리안사레스 공작 아구스틴 페르난도 무뇨스 (1833년 결혼 / 1873년 사망) |
||
자녀 | 이사벨 2세, 루이사 페르난다, 마리아 암파로, 마리아, 아구스틴 마리아, 페르난도 마리아, 마리아 크리스티나, 후안, 안토니오, 호세 마리아 | |
아버지 | 프란체스코 1세 | |
어머니 | 스페인의 마리아 이사벨 | |
형제 | 루이사 카를로타[1], 페르디난도 2세, 카를로 페르디난도, 레오폴도, 마리아 안토니아, 안토니오, 마리아 아말리아, 마리아 카롤리나, 테레사 크리스티나, 루이지, 프란체스코 | |
종교 | 가톨릭 |
|
초상화 |
[clearfix]
1. 개요
스페인 페르난도 7세의 네번째이자 마지막 부인. 이사벨 2세와 루이사 페르난다의 어머니이다.양시칠리아 왕국의 프란체스코 1세와 스페인의 마리아 이사벨 공주의 차녀이자 페르디난도 2세의 누나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1806년 4월 27일 시칠리아 왕국 팔레르모에서 태어났다. 쾌활하고 활발한 성격에, 사냥을 좋아하고 그림에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유럽을 여행하던 한 아일랜드의 여류작가의 글에 의하면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흠잡을 데 없는 얼굴, 표현력 있는 눈, 매력적인 미소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1829년 5월 27일에 페르난도 7세의 왕비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 아말리아가 사망했다. 후계자가 없던 페르난도 7세는 새 신붓감을 물색했다. 페르난도 7세의 동생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의 아내이자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언니인 루이자 카를로타는 마리아 크리스티나를 추천했다. 1829년 12월 11일, 페르난도 7세와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마드리드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2.2. 왕비
|
페르난도 7세와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 1831년 |
후계자가 없던 외삼촌 페르난도 7세와 결혼하면서 후계자 문제를 두고 생긴 갈등에 휘말리게 되었다. 당시 봉건주의자들은 페르난도 7세의 동생인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를 차기 국왕으로 밀고 있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적극적으로 남편을 국왕의 자리에 올리려는 몰리나 백작부인 브라간사의 마리아 테레자[2]와 궁중 내에서의 영향력을 다투었다.
1830년 3월 18일, 페르난도 7세는 딸이 태어날 것을 대비해 살리카 법을 폐지했다. 이는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낳은 아이가 성별과는 무관하게 왕위 계승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럼에도 페르난도 7세는 갈등의 여지를 남기지 않기 위해 왕비가 아들을 낳아줄 것을 기대했으나,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딸 2명을 낳았다.
2.3. 왕대비. 섭정과 망명
1833년 9월 29일에 페르난도 7세가 숨을 거두었다. 페르난도 7세의 장녀인 3살의 이사벨 2세가 왕위에 올랐다. 왕대비가 된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유언에 따라 섭정을 맡았다. 그러자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는 이사벨 2세의 왕위 계승이 무효라고 주장하며 자신이 스페인의 국왕이라고 선언했다. 이로 인해 카를로스 전쟁이라 부리는 내전이 발발했다. 7년의 전쟁 끝에 이사벨 2세의 진영이 승리했다.그러나 문제는 끝이 아니었는데,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스캔들이 터져버렸다. 사실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왕실 근위대 소속이었던 아구스틴 페르난도 무뇨스와 재혼한 상태였다. 일설에 의하면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왕비였을 때, 그녀의 마차에서 도망가는 말을 붙잡아 준 아구스틴과 눈이 맞았다고 한다. 페르난도 7세가 사망하고 석 달 만에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비밀리에 그와 결혼하고 자식을 두었다. 이 사실이 공개되자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국민들의 신망을 잃고 대신들은 그녀를 불신하게 되었다.[3]
1840년, 진보당을 이끄는 발도메로 에스페르테로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섭정 자리에서 물러나라는 압박을 받게 되자 섭정직을 발도메로 에스페르테로에게 양도하고 남편과 함께 망명했다. 부부는 잠시 로마에서 지내다가 프랑스로 가 조제핀 드 보아르네가 말년을 보낸 것으로 유명한 말메종 궁전을 구입해 거주지로 삼았다.
1843년에 발도메로 에스페르테로가 실각하고 이사벨 2세가 친정을 하면서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이사벨 2세는 어머니의 재혼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아구스틴에게 리안사레스 공작위를 수여했다. 이후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아구스틴은 철도 사업과 노예 매매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그러나 1854년에 부정부패를 이유로 연금이 취소되고 스페인에서 추방되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다시 프랑스로 돌아갔다.
2.4. 말년
|
말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 1870년대 |
1873년, 프랑스 르아브르의 자택에서 아구스틴이 숨을 거두었다. 5년 뒤인 1878년 8월 22일에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열병에 시달리다 숨을 거두었다. 유해는 엘 에스코리알에 안장되었다.
3. 가족관계
3.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 (Maria Cristina of the Two Sicilies) |
<colbgcolor=#fff3e4,#331c00>
프란체스코 1세 (Francesco I) |
<colbgcolor=#ffffe4,#323300>
페르디난도 1세 (Ferdinando I) |
|
카를로스 3세 (Carlos III) |
|||
작센의 마리아 아말리아[4] (Maria Amalia of Saxony) |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 여대공 (Archduchess Maria Carolina of Austria) |
|||
프란츠 1세 (Franz I) |
|||
마리아 테레지아 (Maria Theresia) |
|||
스페인의 마리아 이사벨 (Maria Isabella of Spain) |
|||
카를로스 4세 (Carlos IV) |
|||
카를로스 3세 (Carlos III) |
|||
작센의 마리아 아말리아 (Maria Amalia of Saxony) |
|||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 (Maria Luisa of Parma) |
|||
파르마 공작 필리포[5] (Filippo, Duke of Parma) |
|||
프랑스의 루이즈 엘리자베트 (Louise Élisabeth of France) |
3.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페르난도 7세 (Fernando VII) |
||||
1녀 |
이사벨 2세 (Isabel II) |
1830년 10월 10일 | 1904년 4월 9일 |
카디스 공작 프란시스코 슬하 1남 4녀[6] |
2녀 |
몽팡시에 공작부인 루이즈 페르낭드 (Infante Louise Fernande, Duchesse de Montpensier |
1832년 1월 30일 | 1897년 2월 2일 |
몽팡시에 공작 앙투안 슬하 4남 5녀 |
제1대 리안사레스 공작 아구스틴 페르난도 무뇨스 이 산체스 (Agustín Fernando Muñoz y Sánchez, 1st Duke of Riánsares) |
||||
3녀 |
비스타 알레그레 여백작 마리아 암파로 (María Amparo, Countess of Vista Alegre) |
1834년 11월 17일 | 1864년 8월 19일 |
라디슬라우스 차리토리스 슬하 1남 |
4녀 |
카스티예호 여후작 마리아 (Maria de los Milagros, Marchioness of Castillejo) |
1835년 11월 8일 | 1903년 7월 9일 |
필리포 델 드라고 슬하 4남 |
1남 |
제1대 타란콘 공작 아구스틴 마리아 (Agustín Maria, 1st Duke of Tarancón) |
1837년 3월 15일 | 1855년 7월 15일 | |
2남 |
제2대 리안사레스와 타란콘의 공작 페르난도 마리아 (Fernando Maria, 2nd Duke of Riansares and Tarancon) |
1838년 4월 27일 | 1910년 12월 7일 |
엘라디오 베르날도 슬하 3남 8녀 |
5녀 |
라 이사벨라 여후작 마리아 크리스티나 (Maria Cristina, Marchioness of La Isabella) |
1840년 4월 19일 | 1921년 12월 19일 |
캄포 사그라도 후작 호세 마리아 베르날도 슬하 2남 2녀 |
3남 |
리쿠에르도 백작 후안 (Juan, Count of Recuerdo) |
1841년 8월 29일 | 1863년 4월 2일 | |
4남 |
안토니오 무뇨스 (Antonio Muñoz) |
1842년 11월 3일 | 1847년 | |
5남 |
그라시아 백작 호세 마리아 (Jose Maria, Count of Gracia) |
1843년 12월 21일 | 1863년 12월 17일 |
[1]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의 어머니.
[2]
포르투갈 왕국
주앙 6세와
카를로타 호아키나 왕비의 장녀. 카를로스의 아내이자 조카, 다시 말해 페르난도 7세의 조카였기에 마리아 크리스티나에게는 동서인 동시에 시조카였다.
[3]
이 당시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공식 지위는 국왕의 어머니이자 왕대비이다. 동양도 그렇지만 서양이라도 왕대비의 주요 역할은 명목상으로라도 국왕의 후견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 후견인의 이미지와 행동을 거스르는 재혼을 하고 자식까지 둔 것이니 당연 불신할 수밖에 없다.
[4]
아우구스트 3세의 장녀이자
요제프 1세의 외손녀이다.
[5]
펠리페 5세의 5남이다.
[6]
알폰소 12세,
갈리에라 공작부인 에우랄리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