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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시노페의 마르키온 Marcion of Sinop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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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키온 (우측 인물)[1] | ||
출생 | 약 85년 | |
로마 제국 시노페 | ||
사망 | 약 160년 (향년 75세?) | |
로마 제국 아나톨리아 | ||
국적 | 로마 제국 | |
사상 | 마르키온주의 | |
종교 | 그리스도교 | |
영향받은 인물 | 사도 바울로, 케르도 | |
영향을 준 인물 | 아돌프 폰 하르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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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초기 그리스도교의 이단 신학자. 말시온, 마르치온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아나톨리아 출신으로 2세기 초에 로마 제국에서 이단 교리를 설파하다 파문당하고 독자적인 이단교파인 마르키온파를 세웠다.2. 생애
1세기 말 또는 2세기 초에 시노페에서 태어난 마르키온은 오랬동안 선박 상인이자 선장으로 살았으며, 135년과 140년 사이에 로마로 이주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에 따르면 그는 60세가 되어서야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했다고 한다.부자였던 마르키온은 수많은 재산을 교회에 기부했다. 그는 144년에 로마 교회의 주류 입장이었던 영지주의(그리스 철학과의 혼합주의)에 맞서 바울로의 의인론에 영향을 받은 독자적, 극단적인 칭의론을 주장했다가 로마 교회를 분열시키는 원인이 되었다.[2] 160년경에 사망하기까지, 마르키온은 이집트와 페르시아 등으로 가서 자신의 가르침을 전파했다.
3. 사상
3.1. 급진적 바울로주의
마르키온은 스스로를 바울로의 제자라고 여겼을 정도로 바울로의 신학을 자신의 신학의 정초로 삼았다. 마르키온은 바울로의 의인론에 나타난 칭의적 개념,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율법을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보여지는 구약성경을 배격했다. 바울로의 금욕주의를 확장시켜 결혼과 성교를 금지시키기도 했다.3.2. 신론
마르키온은 구약의 하느님을 정의의 하느님 (율법의 하느님)으로, 신약의 하느님을 사랑의 하느님 (복음의 하느님)으로 나누어 생각했다. 마르키온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상에 기초해, 율법의 하느님은 더 이상 세상을 구원시킬 수 없다고 보았다. 마르키온의 신론은 두 하느님 다 선한 하느님으로 여겼다는 점에서, 영지주의가 악한 하느님과 선한 하느님으로 양분시켜 생각했다는 것과는 확연히 선을 그었다.3.3. 그리스도론
마르키온은 사랑의 하느님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이제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시키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십자가에 달렸다. 따라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고백하고 신뢰하는 것이 복음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완벽한 그리스도가 탄생하고 죽었다는 생각을 비판했다.3.4. 최초의 정경
마르키온은 구약성경의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한다는 생각을 의심했다. 또한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아무 책의 내용을 신뢰한다는 것도 부적절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구약성경을 제외한 최초의 정경을 정립했다. 이 마르키온의 정경에는 루카의 복음서와 로마인들, 고린토인들, 갈라티아인들, 에페소인들, 필립비인들, 골로사이인들, 데살로니카인들, 및 필레몬에게 보낸 편지가 담겨 있었다.전통적으로 마르키온의 루카의 복음서와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그가 편집한 것이라고 보았지만, 오늘날 학자들 사이에는 오히려 마르키온이 가지고 있었던 판본이 원래 판본이었을 수도 있다는 견해가 일부 존재한다.
3.5. 교회 제도
마르키온은 원정통 교회에 맞서 체계적인 교회 제도와 직분을 내놓았다. 그의 이러한 체계화는 마르키온파가 마르키온 사후에도 몇 세기 동안 보편교회에 맞서 계속 존속시킬 수 있게 한 공급처가 될 수 있었다.4. 여파
마르키온의 운동은 결과적으로 교부들과 교회가 정경과 체계적 교회 제도를 구성시키는 데 요인 및 원인으로 작용했다.마르키온의 영향을 받은 개신교 신학자 아돌프 폰 하르낙은 성서비평에 근거해,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지 않는 구약성경을 정경에서 배제시키려 했다. 또한 그리스도교의 본질은 헬레니즘 철학과 상관 없다고 본 하르낙의 신학에도 영향을 주었다.
5. 평가
마귀의 입
-성 이레네우스
-성 이레네우스
마르키온 사후, 테르툴리아누스는 마르키온을 영지주의 이단으로 지목하고 비판했다.
마르키온이 영지주의자냐, 아니냐에 대한 논란은 지속되고 있다. 이유는 당시 영지주의는 개념이 남용되어 조선 시대의 사문난적처럼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가톨릭에서도 의견이 갈리는데, 영성사 학자인 전영준 신부 등은 강의에서 "영지주의자라기보다는 교계에 반한 독자적인 교단을 세우려 했다." 주장하고, 반대로 방효익 신부 등은 저서 <영성사>에서 '마르키온은 분명히 영지주의자였다.'고 말하였다. 관점에 따라 평이 갈리는 경계선에 선 반(半) 영지주의라는 평 정도가 적절할 것이다.
마르키온을 "최초의 개혁자"로 재평가한 루터교 신학자 아돌프 폰 하르낙 이후, 독일 개신교 신학계에서는 전반적으로 마르키온의 성과에 대해 긍정적이기도 하다.
6. 매체
커맨드 앤 컨커3 케인의 분노에 등장하는 Nod의 반 케인파 블랙 핸드 장교인 마르시온의 이름이 여기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1]
좌측은
사도 요한이다. 1000년 ~ 1100년 사이 그려진 그림이며, 현재 모건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2]
영지주의는 2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보편 교회에 의해 배격된다.
[3]
사도 요한의 제자이자 스미르나 주교.
이레네우스가 폴리카르포스의 제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