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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4 14:11:18

림동옥



1. 개요2. 생애3. 수훈4. 참고문헌

1. 개요

북한의 정치인. 대남정책의 실무자로 보인다.

2. 생애

1930년 평안북도 출생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북한에서 발표한 부고를 보면 1935~1936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1990년대 초반 자료를 보면 1937년 평안북도 철산 출신으로 더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고생했으나 해방 이후 가난한 출신이 장점이 되어 당일군으로 성장하였다. 김일성종합대학에 진학하여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기에는 림춘길이란 이름을 썼다.

1975년 중앙위원회 국제부에 배치되었으며 1978년에 통일전선부로 옮겼다. 1979년 5월 조평통 부위원장에 올랐으며 1980년 2월 정무원 국장이 되었다. 1984년 11월, 남북적십자회담 자문위원이 되었으며 1988년 3월, 조선로동당 6기 13중전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보선되었다.

1990년 5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는 한편 통일정책심의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90년 8월, 1차 남북고위급회담 참석 차 방한했을때 실향민 임춘실이 림동옥이 자기의 동생이라고 주장했으나 림동옥은 벌컥 화를 내면서 회담 분위기를 흐트리려는 모략이라면서 이를 부인했다. 1990년 12월, 3차 남북고위급회담, 1991년 12월, 5차 남북고위급회담, 1992년 5월 7차 남북고위급회담에 참석했다. 연형묵 정무원총리의 책임보좌관으로 동행했다. 1992년 4월, 림춘길의 명의로 김일성 팔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8년 9월,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며 2000년 6월 1차 남북정상회담 당시에 김대중 대통령 환영만찬 및 공항환송에 참석했다. 2000년 9월, 김용순 통전부장의 제주도 방문도 수행했다. 2001년 6월,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에 임명되었다. 2002년 4월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 자격으로 임동원 특사 방북 시에 환영만찬에 참석했다. 2002년 5월에는 박근혜 당시 의원의 방북 때도 배석했으며 2003년 1월, 임동원 특사가 다시 방북하자 접대하였다. 2003년 9월, 1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통전부장 김용순이 사망한 이후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으로 통전부장직을 대행하였으며, 2005년 6월, 방북한 백낙청을 만나기도 했다. 이때 이미 폐암설 등이 돌고 있었지만 상당히 건강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2005년 8월, 김기남, 안경호와 함께 방남하여 현충원을 참배하기도 했다. 이후 통전부장에 임명된 것이 2006년 4월에 확인되었다.

하지만 림동옥의 폐암설은 구라가 아니었고, 결국 부장 임명 후 몇달 만인 2006년 8월 20일 오전 7시에 폐암(북한에선 난치병으로 보도)으로 7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당중앙위원회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공동명의로 부고를 발표, "림동옥동지는 우리 당의 주체사상,선군사상으로 튼튼히 무장하고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우리 당에 무한히 충실하였으며 조국통일위업을 성취하기 위하여 모든것을 다 바쳤다."라고 좋게 말해주었다. 근데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서는 해임된 것인지 아님 당부장 직함만 보도하고 생략해버린 것인지는 몰라도 부고에서 후보위원이라고 언급되지는 않았다. 8월 21일에 김정일이 화환을 보내주었다.

이후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007년 8월 25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애국, 애족, 애민의 사상을 높이 받들고 조국통일을 위한 성스러운 위업수행에서 특출한 공로를 세운" 일군으로 선정되어 조국통일상을 추서받았다. 2022년 12월 24일자 로동신문 기사 "한 전사를 위해 내리신 특별휴식명령"에서 그의 일화가 짤막하게 언급되었다.

3. 수훈

4.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