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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1-19 18:06:10

리하르트 폰 코우덴호페칼레르기

파일:리하르트 니콜라우스 폰 코우덴호페칼레르기.jpg

1. 개요

리하르트 니콜라우스 폰 코우덴호페칼레르기는 유럽 연합 건설을 주도한 오스트리아-일본인 외교관이자 정치인이다.

2. 생애

코우덴호페칼레르기는 1894년 11월 16일에 도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외교관 하인리히 폰 코우덴호페칼레르기의 아들로 태어났다.

빈으로 돌아온 이후, 1917년에 빈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수여한다. 1차 세계 대전으로 철학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평화주의적인 범유럽적 정치기구를 건설하기 위해 외교/언론 업무에 전념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자 체코슬로바키아 국적을 딴다. 1922년에 단 28세의 나이로 빈 신자유일보 (Neue Freie Presse)에 유럽 정치인들의 이목을 끄는 "유럽 문제에 관하여"라는 기사를 기고하고, 이듬해에 프랑스와 독일의 철강/석탄 산업의 협력을 제안하는 "범유럽"(Paneuropa)라는 책을 출판한다. 코우덴호페칼레르기는 1924년에 동명의 신문사를 창간하고, 1926년에 최초의 범유럽 회의를 열고,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를 유럽 기구의 국가로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오스트리아 병합 이후, 코우덴호페칼레르기는 스위스로, 그 뒤 프랑스와 미국으로 망명하고, 프랑스 국적을 획득한 이후 뉴욕대 교수로 임명된다. 2차세계대전 이후 스위스로 회귀하고, 1947년부터 헤이그에서 윈스턴 처칠과 함께 유럽 평의회의 초석이 되는 유럽 회의를 개최한다. 1952년에 국제유럽운동의 명예총장으로 임명된다. 1972년에 오스트리아에서 사망한다.

3. 여담

1950년에 유럽 건설에 공헌한 인물들을 위한 카롤루스 대제상의 최초 수상자가 되었다. 노벨 평화상 후보 명단에 54번 올랐지만 수여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