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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0 08:23:03

리필규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1. 개요

한국 독립운동가 출신의 북한 정치인.

2. 생애

1910년 10월, 함경남도 함주군 천원면 원흥리의 빈농가에서 태어났다. 1921년 리 소학교에 진학했으며 1924년에 졸업하였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고 어머니는 직물공장에서 일했는데 급여가 아주 적었기 때문에 고등교육은 받지 못하고 1924년에 함흥으로 가서 인쇄소 잡지 배달원으로 일했다. 인쇄소에서 일하면서 정치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고 조선청년총동맹에 가입, 1925년에 만주로 건너가서 중학교에 진학했다. 이후 중학교 청년단체에 가입해 학생운동에 참가했고 1928년에 청진으로 돌아와 세탁소 노동자로 일했다. 경찰의 탄압으로 1926년부터 1945년까지 7번 체포되었는데, 마지막으로 1944년에 체포되어 8개월간 복역하다가 치료를 위해 병원으로 이송된 틈을 타서 탈출해서 산골로 도주해서 지냈고 함흥시의 학생운동을 지휘했다.

해방 후 함경남도 보안국장이 되었고, 1945년 8월 김하경, 안섭, 유명기, 문태화와 함께 함경남도 인민위원회 및 사무국을 조직하였으며 1945년 9월 북조선공산당에 가입했다. 북조선인민위원회 내무국 부국장이 되었다. 1947년 6월 28일, 풍수해방지대책위원회가 신설되면서 김책, 리동화와 함께 위원에 선출되었다. 1948년 9월부터 1950년 7월 사이에 중앙당학교에서 공부했으며 그런대로 좋은 성적을 받았고 "학업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탁월한 근면함과 인내심으로 학업에서 성과를 달성했음. 학업 기간 이론을 다루는 방법이 눈에 띄게 성장했음. 활력 있고 열심인 청강생."이라는 소련 측의 평가를 받았다. 이후 소련에 유학했으며 소련과 김일성 모두 그를 정치적으로도 높이 평가했다.

1948년 9월 9일, 초대 내무성 부상에 임명되었다. 6.25 전쟁 중에 내무상 박일우가 조중연합사령부 부정치위원에 임명되면서 내무상 직책을 수행할 수 없게 되자 내무상 직무를 대행했다. 이후 1954년 화학건재공업성 부상을 거쳐서 1956년 초 내각 건재공업국장에 임명되었으며,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김일성 우상화 정책에 강한 불만을 품고, 최창익, 박창옥, 고봉기, 서휘 등과 함께 김일성에 대항하여 1956년 8월 전원회의에서 그에게 맞서기로 하였다. 특히 7월 14일, 소련대사관을 방문한 리필규는 김일성 개인숭배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으며 김일성이 친일파와 변절자들을 끌어모아서 아첨을 받고 있다고 맹렬히 비난했다. 그리고 만약 김일성이 간부정책을 시정하라는 자신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강제로 정치적 국면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이때 최용건이 김일성의 반대파라고 주장하는 등 여러모로 논란이 있는 주장을 많이 했다.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가 발굴한 수기 기록 원고에 따르면, 리필규는 인쇄 기록보다 김일성을 더욱 거칠게 비난했으며 심지어 중국 인민지원군의 지지를 얻어 지하투쟁을 할 수 있다고까지 주장했다.

이들은 1956년 8월 30일 열린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김일성 비판에 나섰으나 참혹한 패배를 당했고, 사태가 잘못되고 있음을 직감한 리필규는 윤공흠, 서휘, 김강과 함께 차를 타고 신의주를 통해 중국으로 도주하였다. 한편 이 회의에서 리필규는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서 제명, 출당되었으며 당연히 내각에서의 직위도 박탈당했다.

소련과 중국의 개입으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1956년 9월 전원회의가 열리자 일시적으로 당적이 복구되었으나, 중소분쟁으로 두 나라 모두 더 이상 북한에 신경쓰지 않게 되면서 11월 다시 반당종파분자로 규정되었으며 12월 24일 최고재판소 재판에서 그의 '종파적 행동'이 폭로되었다. 건재공업국도 초급 당단체 전원회의를 열어 자아비판해야 했다.

한편 중국에서도 그가 쓸모없어지면서 대접이 박해졌는데, 1958년 2월 21일, 저우언라이는 심양에서 요녕성 간부들과의 회담을 열고 이들이 "가는 곳마다 근거없이 함부로 말하며, 조선로동당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소련공산당과 중국공산당에도 반대한다."며 비난했다. 1958년 3월, 중국은 북한의 1차 당대표자회 결의를 지지하기로 결정하고 윤공흠, 서휘, 리필규, 김강을 사천성 성도로 보내버렸다. 60년대에 가면 중국은 그들을 '조선반당 종파분자'로 취급하였다.

1962년 4월 중공중앙 대외연락부는 망명한 북한 간부들 중에서 서휘, 홍순관, 김충식, 리규철, 박현, 김준근은 범죄자로 간주하고 농장에 보내버렸으나 리필규의 경우에는 좀 더 판단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후 소련 망명을 시도한 것으로 보이는데 체포되지는 않고 경고처분만 받았다. 이후 중국에서 사망하였고 1993년 길림성 용정시에 추모비가 세워졌으나 북한 총영사관 측에서 달려와서 추모비를 박살내버렸다.(...)

3.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