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6-12 07:43:12

리카르도 카라펠레세

리카르도 카라펠레세의 역임 직책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주장
발렌티노 마촐라
(1947~1949)
리카르도 카라펠레세
(1949~1950)
카를로 안노바치
(1951~1952)
}}} ||
파일:Riccardo Carapellese.jpg
이름 리카르도 카라펠레세
(Riccardo Carapellese)
생년월일 1922년 7월 1일
사망년월일 1995년 10월 20일 (향년 73세)
국적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이탈리아
출신지 이탈리아 왕국 체리뇰라
포지션 아웃사이드 레프트 포워드
신체조건 168cm | 65kg
소속팀 마냐디네 리보르노 (1939-1940)
토리노 FC (1940-1942)
스페치아 칼초 (1942-1943)
카살레 FBC (1943-1944)
비제바노 칼초 (1944-1945)
코모 1907 (1945-1946)
노바라 FC (1946)
AC 밀란 (1946-1949)
토리노 FC (1949-1952)
유벤투스 FC (1952-1953)
제노아 CFC (1953-1957)
칼초 카타니아 (1957-1959)
테르나나 칼초 (1961-1962)
국가대표 16경기 10골 (1947-1956)
감독 카타니아 칼초 (1957)
피날레 (1959-1960)
ACD 삼마르게리테세 1903 (1960-1961)
테르나나 칼초 (1961-1964)
US 살레르니타나 1919 (1965)
스카파테세 칼초 1922 (1967-1968)
US 사보이아 1908 (1972-1973)
ASD 마르티나 칼초 1947 (1973-1974)



1. 개요2. 생애
2.1. 선수 생활2.2. 이후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4. 수상
4.1. 선수
4.1.1. 클럽
4.2. 감독
4.2.1. 클럽

[clearfix]

1. 개요

이탈리아의 전 축구 감독.

2. 생애[1]

2.1. 선수 생활

2.1.1. 클럽

카라펠레세는 체리뇰라(Cerinogla)에서 태어나 여러 유스팀에서 축구를 접하고 마냐디네 리보르노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카라펠레세는 1940년부터 2시즌을 토리노 FC에 몸담았지만 출전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리그가 중단되었다 재개되었을 때 여러 팀을 거쳐 AC 밀란의 선수가 되었다.

밀란에서 카라펠레세는 날개를 펼쳤고 그는 밀란에서의 3시즌간 꾸준히 15골 이상을 넣어주는 준수한 공격수로 발전했다. 그러나 그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당시 세리에 A의 맹주는 그란데 토리노였고 밀란도 준우승까지는 성공했지만 그란데 토리노를 제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란데 토리노의 군림은 수페르가의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고 카라펠레세는 사고로 휘청이던 토리노의 재건에 힘을 보태게 되었다. 수페르가의 비극이 끝나고 맞은 토리노의 첫 시즌에 카라펠레세가 합류했지만 토리노는 사고의 후유증을 치유할 순 없었다. 토리노는 카라펠레세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세리에 A 하위권으로 떨어져 간신히 강등을 면하는 신세로 전락했고 카라펠레세는 1952년, 유벤투스 FC로 이적하고 말았다.

카라펠레세는 유벤투스에서 스쿠데토를 노렸지만 유벤투스는 그 시즌에 준우승에 머물렀고 카라펠레세도 9득점에 그쳤다. 유벤투스에서의 1시즌을 뒤로 하고 카라펠레세는 다시 세리에 A에 복귀한 제노아 CFC로 팀을 옮겨 4시즌을 더 뛰었다.

카라펠레세는 이후 칼초 카타니아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1957년을 보내고 테르나나 칼초에서 다시 선수 겸 감독으로 뛰며 1962년에 선수 생활을 마쳤다.

2.1.2. 국가대표

카라펠레세는 1947년, 오스트리아와의 경기에서 이탈리아 대표팀 데뷔전을 치렀으나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에 1:5 대패를 당했다.

1949년에 터진 수페르가의 비극은 이탈리아 대표팀에게도 적지 않은 손실이었고 사고로 사망한 발렌티노 마촐라의 뒤를 이어 카라펠레세가 주장 완장을 이어받았다. 카라펠레세는 사고로 약해진 이탈리아 대표팀의 주장으로 1950년 월드컵에 출전했고 2경기에서 2골을 넣어 팀 내 최다 득점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1승 1패로 상위 라운드 진출에 실패, 그란데 토리노 동료들의 영전에 쥘 리메 트로피를 바치려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월드컵 이후 카라펠레세의 대표팀 소집은 상당히 드물게 이뤄졌고 주장 자리도 카를로 안노바치에게 넘어갔다.

2.2. 이후

선수 은퇴 이후 카라펠레세는 여러 팀의 감독을 맡았지만 큰 성과는 없었다. 말년의 카라펠레세의 인생은 불우했는데 그는 가난과 치매, 딸의 죽음 등 상당한 고난을 겪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카라펠레세는 매우 재능 있는 윙어였으며 빠른 스프린트, 현란한 드리블 및 수비수들을 괴롭히는 페이크로 인해 막기가 어려운 선수였다. 그는 공을 자신의 발에서 멀리 떨어뜨리지 않는 터치와 볼 컨트롤 능력이 있었고 중장거리 슈팅보다 근거리에서의 정확한 슈팅을 선호했다.

카라펠레세가 기분이 좋을 때 필요한 것은 하프백이나 수비수에서부터 날아오는 패스 또는 단순히 그 자신이 유리한 상황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는 항상 예측할 수 없는 무언가를 시도했기 때문에 정형화된 패턴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상대 수비수를 연구하고 계산한 후 트릭을 써서 돌진하는 드리블을 한 다음 가장 유리한 위치에서 슛을 쐈다.

4. 수상

4.1. 선수

4.1.1. 클럽

4.2. 감독

4.2.1. 클럽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