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북한의 정치인.2. 생애
1925년 11월 25일에 출생했다. 남한에선 전라남도 순천군 출신으로 파악했으나, 최영림 회고록에 따르면 함경남도 요덕군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3세에 어머니를 잃고 운곡탄광에서 탄부를 하다가 흥남 카바이드 공장에서 일했다고 한다. 해방 후 6.25 전쟁 때 김일성 중앙경위련대 정치부 책임지도원으로 배치. 이후 부연대장까지 승진하였고, 유엔군이 북상함에 따라 고산진까지 후퇴했다. 이후 당의 문화예술사업에 주로 투신했다.해방 이후 김일성대학 문학부를 졸업했으며 1948년 10월, 조선문화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을 지냈다. 1953년 8월 내각 사무국 참사를 거쳐 1957년 7월, 문화선전성 부상을 지냈다. 1958년 교육문화성으로 이동하여 문화국장을 지냈고 1961년 1월 21일 문화성이 신설되자 문화성 선전국장에 임명되었다. 1962년 7월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부부장을 지냈다. 1962년, 김창만과 함께 함경남도에 청산리방법총화 료해를 나갔다가, 김창만이 농사를 짓는데 무슨 정신이요, 방법이 따로 있는가 하는 것을 보고 상급자인 김창만에게 덤벼들어서 뒤집어 놓은 일이 있다고 한다. 최영림의 회고에 따르면 리창선이 하도 사납게 달려들어서 김창만 역시 한성깔함에도 "부책임자와 의가 맞지 않아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라고 얼버무렸다고. 1962년 10월에 문화성 부상, 1963년 3월 대외문화연락위원회 문화부장을 거쳐 영화총국장을 겸하였으며, 1970년 3월 문화성 제1부상에 임명되었다. 문화성 부상 겸 영화총국장 재임 시절, 김정일의 예술영화촬영소 당원협의회 지도 때 김정일이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그를 도촬하다가(...) 걸려서 노한 김정일이 하지 말라면 하지 말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며 혼을 냈다고 한다. 이후 박영신의 뒤를 이어 1972년 8월 8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내각 문화상에 임명되었다.
이후 1972년 12월, 사회주의 헌법이 채택되면서 문화성이 문화예술부로 개편되었는데 문화예술부장에 임명, 1986년에 장철에게 자리를 물려줄때까지 무려 16년간 문예부장을 지냈다. 1972년에 중앙선거위원회 위원,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73년 남북대화가 한창일때 남북연락대표회의에 참서했으며 1973년 10월,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조연준 회고록에 따르면, 1978년 2월 15일, 예술인 여관을 개건한다면서 예술인 여관에 합숙하던 500명의 예술인과 평양영화대학 교직원, 학생들을 대책도 없이 엄동설한에 내몰았다가, 이들로부터 문예부장이 인간성이 희박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에 김일성은 리창선이 전횡, 해독행위를 저질렀다고 비판하고 리창선과 문화예술부 정치국장 장춘섭을 책벌하고 사상투쟁회의에 내보냈다. 이후 1978년 3월에 가봉에 김일성 특사로 파견되었으며, 7월에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보선되었다. 이후 이완기란 가명을 쓰면서 신상옥, 최은희 부부 납치를 주도했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재선되었으며 1982년, 1986년, 1990년에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1982년과 1992년에 걸쳐 2차례나 김일성 훈장을 수훈받았다. 1984년 11월, 김만금 장의의원을 지냈다. 1986년에 장철에게 자리를 물려준 이후에는 중앙당학교를 거쳐 1989년에 통일전선부에서 기존의 연락부에 해당하는 사회문화부가 분리되면서 사회문화부장에 임명되었다. 리창선은 대남 공작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인물이었으나 문화예술계의 거물로 김정일의 총애를 받고 있기 때문에 사회문화부가 무슨 문화예술을 담당하는 부서인 것으로 위장하기 좋은 인물이었기 때문에 선임되었다. 당연히 실무는 산하의 부부장들이 담당했다.
1987년 8월, 리진수 장의위원, 1991년 허담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2년 4월 1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김일성훈장을 수훈받았다. 김정일은 1991년 7월, 교시를 통해서 자신을 가장 적극적으로 옹호한 인물 중 한명이 리창선이었다고 하였다.
1994년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오진우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2000년 5월 26일에 사망하였다. 월간조선에서 중국에서 팩스로 보내온 익명의 제보에 따르면, 이한영 암살을 주도한 것이 다름아닌 리창선이며 다름아닌 김정남의 지시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월간조선은 이를 2001년 2월호로 보도했다. 이후 애국렬사릉에 중앙위원회 부장 직함으로 안치되었다. 하지만 부고가 따로 발표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범 수용소에 갇혀 있다는 엉뚱한 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
3. 참고문헌
- 통일부 정보분석국, 북한의 주요 인물 자료집 2000(서울: 통일부,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