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9-15 14:45:28

리처드 제퍼슨

리차드 제퍼슨에서 넘어옴
리처드 제퍼슨 관련 틀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리처드 제퍼슨의 수상 이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파일:오륜기(여백X).svg
2004

파일:external/vignette2.wikia.nocookie.net/2985.gif
2016

베스트팀
파일:NBA 로고.svg
}}} ||
리처드 제퍼슨의 역대 등번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뉴저지 네츠 등번호 24번
스티븐 잭슨
(2000~2001)
리처드 제퍼슨
(2001~2008)
래리 오웬스
(2012)
밀워키 벅스 등번호 24번
데스몬드 메이슨
(2007~2008)
리처드 제퍼슨
(2008~2009)
제리 스택하우스
(2010)
샌안토니오 스퍼스 등번호 24번
로이드 대니얼스
(1992~1994)
리처드 제퍼슨
(2009~2012)
말콤 토마스
(2013~2014)
{{{#FFC61E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등번호 44번}}}
앤서니 톨리버
(2010)
리처드 제퍼슨
(2012~2013)
결번
유타 재즈 등번호 24번
폴 밀샙
(2006~2013)
리처드 제퍼슨
(2013~2014)
제프 위디
(2015~2017)
댈러스 매버릭스 등번호 24번
파벨 포드콜친
(2004~2006)
리처드 제퍼슨
(2014~2015)
코비 브라이언트
( 영구 결번)
{{{#fdbb30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등번호 24번}}}
스카티 홉슨
(2014)
리처드 제퍼슨
(2015~2017)
래리 낸스 주니어
(2017~2018)
덴버 너기츠 등번호 22번
자말 프랭클린
(2015)
리처드 제퍼슨
(2017~2018)
지크 나지
(2020~)
}}} ||
}}} ||
파일:리처드제퍼슨.jpg
리처드 앨런 제퍼슨 주니어
Richard Allen Jefferson Jr.
출생 1980년 6월 21일 ([age(1980-06-21)]세)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출신학교 애리조나 대학교
신장 201cm (6' 7")
체중 106kg (233 lbs)
윙스팬 213cm (7' 0")
포지션 스몰 포워드
드래프트 2001 NBA 드래프트 1라운드 13순위
휴스턴 로키츠 지명
소속 팀 뉴저지 네츠 (2001~2008)
밀워키 벅스 (2008~2009)
샌안토니오 스퍼스 (2009~2012)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2012~2013)
유타 재즈 (2013~2014)
댈러스 매버릭스 (2014~2015)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2015~2017)
덴버 너기츠 (2017~2018)
등번호 24번 - 뉴저지 / 밀워키 / 샌안토니오 / 유타 / 댈러스[1] / 클리블랜드
44번 - 골든스테이트
22번 - 덴버
SNS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아마추어 시절3. NBA 입성 후4. 은퇴 이후5. 수상 내역6. 플레이 스타일7. 여담

[clearfix]

1. 개요

미국의 前 농구선수. 별명은 RJ, 느바판 둘리.

2. 아마추어 시절

로스앤젤레스의 기독교 집안[2]에서 태어나자마자 애리조나 주 피닉스로 이사를 가면서 성장했다.

문 밸리 고등학교 졸업반 때 4A 주 챔피언에 오른 경험을 살려 애리조나 대학교로 진학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루트 올슨 감독 밑에서 뛰었는데 84경기동안(77경기 선발) 평균 11.2점, 2.8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대학교 3학년 때 듀크 대학교와의 NCAA토너먼트 결승전에서 후반에만 15득점을 넣는 등 올파이널에 발탁되기도 했지만 아쉽게도 우승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여담으로 대학 동기에는 길버트 아레나스와 루크 월튼 등이 있다.

3. NBA 입성 후

제퍼슨은 대학교 3학년 재학중에 2001 드래프트 1라운드 13순위로 휴스턴 로키츠에 지명되지만, 뉴저지 네츠로 트레이드되었다. 트레이드 후 처음에는 스몰 포워드인 키스 밴 혼의 교체 선수로 경험을 쌓으면서 좋은 수비 능력과 올어라운드 능력을 선보였다. 밴 혼과 파워포워드 캐년 마틴과의 불화, 그리고 제퍼슨의 잠재력을 본 네츠는 밴 혼을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로 트레이드 시킨 후 제퍼슨을 믿고 선발로 기용한다. 제퍼슨은 능력이 만개하게 되어 좋은 미드, 롱 레인지 슈터이자 뛰어난 슬래셔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며 팀의 핵심 선수로 자리매김한다. 네츠는 2년 연속 동부 컨퍼런스 우승을 하며 NBA파이널 무대를 밟았지만, 01-02 시즌에는 코비와 오닐이 있는 LA 레이커스, 02-03 시즌에선 완전체 괴물이었던[3] 팀 던컨이 버티고 있는 샌안토니오 스퍼스와 맞붙어 패하며 파이널 우승을 경험하지는 못한다. 제퍼슨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미국 남자 농구팀에 발탁되어 동메달을 목에 걸었고, 또 1년 전인 2003년에는 NBA 슬램 덩크 콘테스트에도 참가했다.

2004년 8월 13일, 제퍼슨은 6년 7800만 달러의 계약 연장을 체결한다.

2008년, 6년간 뛴 네츠를 떠나 밀워키 벅스로 트레이드가 된 제퍼슨은 마이클 레드와 듀오 멤버로써 주목을 끌었지만, 레드가 부상으로 대부분의 시즌에서 아웃되어 고군분투를 강요당한 것 외에, 팀은 디비젼리그 최하위로 내려갔다.

2009년부터 샌안토니오 스퍼스로 이적하였다. 그러나 이적 후 첫 시즌 때 좀처럼 적응하지 못하고 데뷔 이래 두번째로 안 좋은 평균득점으로 시즌을 마쳤다.

2010년 오프 시즌 때, 자유 계약 신분이 되어, 스퍼스와 재계약을 하지 않는다고 보도하는 등, 타 팀의 이적은 결정적이라고 생각이 되었지만, 4년3900만 달러로 재계약에 합의했다.

파일:external/www4.pictures.zimbio.com/Golden+State+Warriors+v+Los+Angeles+Lakers+YDWAiKqIQlfx.jpg
2012년 3월 15일, 제퍼슨은 시즌종료까지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로 이적을 하였다.

2013-14시즌에는 유타 재즈와 계약을 하였다. 팀이 침체기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82시합에 나갔다.

2014-15시즌에는 댈러스 매버릭스와 계약을 하였다.

파일:external/is.ill.in.ua/351524_in.jpg
2015시즌부터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로 이적. 골든스테이트와의 2016시즌 결승전 3차전에서 케빈 러브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33분을 소화해 득점 9점과 8개 리바운드를 기록하여 120-90으로 승리했다. 그 후, 1-3에서 기적같은 4-3의 역전드라마를 만들어 팀을 52년만의 우승에 이끌었다. 생애 처음으로 우승한 제퍼슨은, 우승 세레모니 인터뷰에서 현역을 은퇴한다고 선언했지만, 더 뛰고 싶다는 강한 의지도 있어, 2년 계약 500만달러로 캐벌리어스에서 플레이하게 되었다.

2017년 1월 2일, 뉴올리언스 펠리컨스와의 홈 경기에서 3점 필드 골 1000개를 기록했다.

2016-17 시즌에는 준우승으로 머무르게 되자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서 애틀랜타 호크스로 트레이드 되었으나 곧바로 애틀랜타 호크스에서 방출되었다. 그 후 덴버 너기츠와 230만 달러(약 26억 원)에 1년 계약을 맺고 플레이 한 뒤, 현역을 은퇴했다.

4. 은퇴 이후

2018년 10월 16일, 브루클린 네츠의 지역방송국 Yes Network에서 중계진을 맡게 되었다. 이때 닉스의 러브콜이 있었으나 대차게 까버렸다고 회상했다.

이후 간간히 ESPN에서 평론가로도 활동하는데, 좋은 발음과 모나지 않으면서도 정확한 논설등으로 농잘알 평가를 받고있다. 특히 벤 시몬스 관련 혹평은 촌철살인 수준.[4]

2022년 7월 6일 NBA 써머리그 뉴욕 닉스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와의 경기에서 심판으로 데뷔했다! 대부분 심판은 현역 NBA 선수와는 거리가 있거나 다른 일을 하다가 오는 케이스가 많다는 점에서 NBA 커리어가 이정도 되는 선수가 심판이라는 궂은 일을 하는 경우는 충분히 이례적인 일이다. 선수가 슛을 쏠 때 손을 들지 않는 등 사소한 실수들이 있긴 했지만, 심판 옷을 입고 있는 모습만은 베테랑 심판 같다는 팬들의 평가가 있었다.

5. 수상 내역

수상 내역
파일:NBA-Champion.png NBA 챔피언 (2016)
파일:NBA 로고.svg NBA 올-루키 세컨드 팀 (2002)
파일:오륜기(여백X).svg 2004 아테네 올림픽 동메달

6. 플레이 스타일

골든스테이트의 전성기나 르브론으로 유입된 팬들이 간과하는 사실이, 제퍼슨은 현역 전성기시절 뛰어난 신체 능력을 지녔고, 공격과 수비에서도 활약할 수 있는 올 라운더였다는 점이다. 국가대표, 파이널진출, 우승 등 해볼 수 있는건 다해봤던 선수였다.

전성기에는 평균 19득점 이상, 5개의 리바운드가 보장되는 수준급 선수였으며 덩크 등 화려한 플레이도 잘소화했다. 또한 운동능력도 매우 뛰어나서 인게임 덩커로서 멋진 장면을 수 없이 연출했고 수비에서도 인상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다. 다만 볼핸들링이나 드리블이 너무 평범했으며 밀집된 수비에서 상대를 비집고 들어가는 능력은 한계가 있었다. 이런 문제 때문에 1옵션에서 점차 내려와서 2옵션, 식스맨 역할이 많아지게 된다.

뉴저지 네츠 시절엔 주전과 식스맨을 오갔으나 스퍼스로 이적하는 09-10시즌 부터는 확실히 한정된 역할만하는 롤플레이어가 된다. 이후엔 다시는 12득점 이상을 기록하지 못하게 된다.

네츠 시절에는 확실한 주전이었다. 키드, 마틴과 함께 네츠를 파이널로 이끌었고 마틴 이적 후 에도 카터와 함께 키드의 어시스트를 받았다.

그런 그가 운동능력을 점점 잃어가면서도 꾸준히 NBA에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통산 37.7%의 3점슛의 옵션 때문이다.

40%이상의 성공률을 기록한 시즌이 4번이나 있을 정도로 3점 슛이 좋은 선수였다. 10-11시즌 스퍼스에선 무려 44%의 성공률을 기록한 적도 있다. 비록 팀내 1옵션을 한 적은 거의 없지만 성실한 성격과 팀에 대한 헌신적인 자세를 보여, 그 동안 뛰었던 모든 팀에서 평가되고 있다.

2017년 파이널에서 듀란트를 블락하고 속공득점을 올렸다. 2017 파이널에서 가끔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데 좋은 역할을 했다.

7. 여담

리처드 제퍼슨은 클리블랜드에서 생애 첫 우승을 달성한 후 은퇴했다. 그는 르브론에게 자신의 커리어를 우승으로 마무리 시켜준점을 고맙게 생각했다고 한다. 다음은 그 일화이다.
저는 평범하고 천부적인 재능이 없는데다가, 경기를 끝낼 수 있는 배포도 없어요. 심지어 경기 클러치 때에 공을 잡으면 손이 떨립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 빌어먹을 반지를 얻을 수 있을까요? 저의 그 대단하지 않은 능력으로 말이죠. 이렇게 고민할 때 마크 큐반이 저에게 말하더군요.

"RJ, 클리블랜드로 가. 댈러스에서는 당신이 원하는 것을 줄 순 없지만, 클리블랜드에서는 가능할 수 있어. 그곳에는 클리블랜드의 저주에 도전하고있는 놈이 한 명 있잖아."

그 놈은 바로 르브론 제임스를 뜻했습니다.

"혹시 그라면 너를 도와줄 수 있을꺼야. 또, 너도 그를 도와줄 수 있을지 모르지."

그의 말을 듣고 클리블랜드로 이적했죠. 이적한 뒤에는 르브론과 함께 우승에 도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만, 저 서부 반대편에는 역사적인 73승을 달성한 스테픈 커리가 기다리고 있었어요. 파이널이 시작되고 저희는 1승 3패로 몰리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절망하고 있었던 그 때 르브론이 라커룸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던, 여기까지 온 이상 우리가 이길꺼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거야. 그들은 우리를 박살내고 있고 게다가 깔보고 있어. 그런데, 나는 내가 그리고 우리가 깔보여지는 선수가 되는 것이 싫어. 나를 따라와. 우리는 꼭 클리블렌드에서 6차전을 치를 수 있다는 걸 보여줄께."

그는 4차전이 끝나고 자신있기 이야기하더군요. 그리고, 거짓말같이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마지막에 우승한 뒤에 르브론이 저에게 그러더군요.

"클리블랜드로 돌아가 마티니나 마시죠"

그렇습니다. 이건 제가 시즌이 시작할 때 르브론에게 꼭 우승반지와 함께 마티니를 마시고 싶다고 한 것을 기억하고 정확히 되돌려 준 감동의 순간이었어요. 이런 과정과 세밀함과 배려심에 저는 르브론이 리더로써 가지고 있는 그 능력에 감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1] 2020년 1월 26일에 헬리콥터 추락 사고로 사망한 코비 브라이언트의 영구 결번이 되면서 댈러스에서 사용한 마지막 번호다. [2] 부모가 선교사였다. [3] 던컨의 특유의 심심한 분위기 때문에 잊혀지는 사실이지만 이 시즌 던컨의 활약은 가히 더 맨 우승의 절정이었다. 파이널에서 평균 25-15-5-3(블락)을 기록했고 특히 6차전에서 21득점, 20리바, 10어시, 8블락을 기록하며 거의 쿼드러플에 가까운 괴물같은 활약을 펼쳤다. [4] 요약하자면, 14개 쏘고 2개 들어갔다는 소리조차 듣기 싫으니 시도조차 안하는것 아니냐는 비판이었다. 당시에는 제퍼슨이 과한게 아니냐는 말도 있었으나 21년 플레이오프때 밑천 다 드러난 시몬스의 야투시도에 재평가 받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