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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20 23:30:43

리오송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1. 개요

항일 빨치산 1세대 출신 북한의 군인, 정치인.

2. 생애

공식적으로는 1925년 2월 4일에 태어났다. 하지만 리오송 본인이 인정하듯이 자기가 언제 태어났는지 자기도 몰라서 대충 때려맞춘 나이로, 1980년대까지만 해도 자신의 공식 생일을 1927년 2월 4일로 적었는데, 그 2월 4일도 리오송이 자기의 아내의 생일이 2월 4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자기 생일도 2월 4일로 일방적으로 때려맞췄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985년에 김일성이 당시 자기가 거느리고 있던 소년중대원 중에서 10살 이하는 없었는데 그렇게 따지면 리오송이 최소 1925년에 태어난 것이 분명하다고 교시하면서 공식생일을 1925년으로 고치게 된다.

1934년 여름에 아동단에 입대, 김정숙의 지휘 밑에서 연락병, 보초병으로 근무했다 카더라. 1934년 11월에 소년선봉대원이 되어 선전활동 및 후방보장사업을 했으며 유격활동 중 아버지를 잃었다고 한다. 이를 보면 아버지도 빨치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8년, 김일성 부대의 사령부 전령병으로 일하면서 여러 전투에 참가했다. 세기와 더불어에서도 리종산과 더불어 가장 어린 빨치산이었다고 회고되고 있다. 너무 어려서 김일성이 1939년에 압록강을 건너서 무산으로 갈때 김일성이 그를 직접 업어서 강을 건너게 해주었으며 압록강이 무슨 강인지 알겠냐고 하니까 그것도 모르겠다고 했다 카더라. 소련으로 퇴각해서 88여단에 배속된 다음엔 소련 운전수에게 운전 기술을 배웠다고 한다.

해방 이후 1949년, 조선인민군 대대장에 임명, 6.25 전쟁에 참전했다. 김일성 주장에 따르면 소련에서 배운 운전을 너무 좋아해서 해방 후에도 직접 운전을 하고 다녔고 자신에게 운전기술을 가르쳐준 소련인 운전수를 초청해서 만나기도 했다고 한다. 남한에서 파악한 바에 따르면 전후 중앙위원회 지도원 및 지도과장등을 지냈다고 한다. 이후 포병사령부 참모를 거쳐 1958년 3월, 민족보위성 부장에 임명되었다. 1960년 10월, 민족보위성 대열국장으로 승진하였다. 중앙위원회 부부장을 지냈다는 기록도 있다. 이후 군단 부사령관 및 정치위원을 지냈으며 남한에서 파악한 바로는 1967년에 1집단군 정치위원을 지냈다.

1971년 5월, 만경대혁명학원 원장에 임명되었다.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고 이후 1986년 8기 대의원까지 계속 재선되었다. 1977년 2월, 지병학 장의위원을 지냈으나 눈에 띠는 큰 활동은 보이지 않았다. 1979년 10월, 오재원에게 만경대혁명학원 원장 자리를 물려주고 퇴임했다. 다른 빨치산 동료들과 달리 끝내 당중앙위원회 위원에는 선출되지 못한 것을 봐서는 일솜씨가 부족했거나 건강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한영은 자신이 1972년에 만경대혁명학원에 입학했을때 리오송이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는 것을 봐선 조용히 보선했다가 조용히 소환했을 가능성도 있다. 불분명한 시기에 김일성훈장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다.

이한영 회고로는 원장으로 있으면서 김정일에게 자신을 노출시키지 말고 어떤 특혜도 제공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매주 이한영을 불러다가 불편한 것은 없는지 면담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한영의 소대장이 성혜랑에게 노골적으로 뇌물을 요구했다가 성혜랑이 거절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1] 이한영이 가지고 있던 김정일이 하사한 미제 금촉 만년필을 빌려간 후 소대를 집합하여 미제 물품 쓰는 리일남이를 당중앙위원회에 신소하겠다면서 만년필을 부러뜨리는 꼴값을 떠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한영이 엉엉 울면서 이 사건을 김정일의 부관 리수헌 대좌에게 이르자 하얗게 질린 리수헌이 리오송을 불러서 부하 교육을 이따위로 시키냐면서 또 이런 일이 벌어지면 만경대혁명학원을 다 뒤집어 놓을 테니 알아서 하라고 위협하면서 총정치국장 이용무에게 전화를 걸었고 이내 보위부에서 소대장과 중대장을 죄다 체포해서 끌고 갔다고 한다.[2]

이후 이 소동에 휘말렸는지 만경대혁명학원장에서 해임되어 지방의 군사학원 교장으로 사업하다가 그러다가 1989년 6월 1일 6시에 64세를 일기로 숙환으로 사망했다. 최종계급은 상장이었다. 당중앙군사위원회는 부고를 발표, "동지는 전후 무력기관의 중요한 직책에서 당의 군사로선을 받들고 우리 인민군대를 강화하며 후대들을 혁명의 믿음직한 계승자로 키우기 위하여 정력적으로 사업하였다. 동지는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확고히 세우고 당과 수령에게 무한히 충실하였다."라고 그럭저럭 평해주었다.

이후 애국렬사릉에 항일혁명렬사 직함으로 안장되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입대해서 큰 공적은 없었기 때문으로 추정.

3. 참고문헌


[1] 이한영은 소대장이 성혜랑에게 노골적으로 뇌물을 요구했다는 것은 몰랐고 이 부분은 성혜랑의 책 등나무집에 나온다. [2] 다만 이한영은 이 사람의 이름을 적힌 걸 보지 못하고 듣기만 해서 발음이 헷갈렸는지 리오성으로 기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