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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7-04 18:33:34

리봉원



1. 개요2. 생애3. 여담4. 참고문헌

1. 개요

북한의 군인, 정치인.

2. 생애

1925년 함경남도에서 태어나 부모를 따라 간도로 이주, 서당과 야학을 다녔다고 알려졌다. 이후 아버지가 빨치산 부대에 합류했다가 전사한 덕분에 해방 후 만경대혁명학원 1기로 입학했으며 1949년 김일성종합대학 철학부로 진학했다고 한다. 하지만 강명도의 책에는 1995년 시점에서 68세로 나와 있는데, 만경대혁명학원을 정말로 나왔다면 1925년생보단 더 젊을 것으로 추정된다. 1953년 모스크바로 유학, 1956년에 귀국하여 조직지도부 지도원으로 배치되었고, 8월 종파사건 때 함경남도당 검열에서 공이 컸다 카더라. 이후 1967년 조직지도부 부부장을 거쳐 1969년 혹은 1970년 개성시 책임비서에 임명되었고,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개성시 책임비서 재임 시절 개성시 토박이들을 불순분자들로 몰아서 대대적으로 추방하였다고 한다.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최고인민회의 5기 1차 회의에서 예산심의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73년 개성시 인민위원장 겸직이 확인되었으며, 1974년에 황해남도 책임비서 겸 인민위원장으로 조동되었다. 그러다가 1976년 제2집단군 정치위원에 임명되면서 총정치국에서 사업하게 되었고,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대회 집행부원에 선출, 당중앙위원회 위원,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순 없으나 6기 대의원에도 재선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1982년 2월,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4월 최고인민회의 7기 1차 회의에서 대의원 자격심사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다. 1982년 4월, 최현 장의위원, 1984년 4월, 오백룡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6년 11월,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역시 대의원 자격심사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다. 1986년 12월, 상장 승진 및 총정치국 부국장 임명이 확인되었으며 강명도에 따르면 총정치국 조직부국장 임명과 함께 조선인민군 간부인사권을 모두 장악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간부 인사철만 되면 거액의 뇌물을 부하들에게 요구하여 군내부에서 많은 원성을 샀다고 한다. 1987년 8월, 리진수 장의위원을 지냈다. 80년대 오진우와 오극렬의 싸움에서 오진우 편을 들면서 오극렬에 대한 정보를 오진우에게 보고하는 등 모습을 보였는데, 총정치국 조직부장 김기선 등이 반격하기 시작했고 1989년 리봉원파로 몰린 강명도도 대좌 계급장을 그대로 뜯기고 뇌물죄로 수용소에 끌려갔다. 이때 하필 리봉원이 출장 중이라 강명도를 돕지 못했다고. 강명도는 탈북 후 리봉원에 대한 김정일의 신임이 떨어졌으니 곧 리봉원이 별볼일 없게 될 것이라고 매우 정확한 평가를 하였다.

1990년 4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대의원 자격심사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다. 1992년 4월 23일, 최고사령관 명령 0024호에 따라 대장으로 진급하였으며 1992년 9월, 서철 장의위원을 지냈다. 하지만 리봉원의 몰락이 슬슬 다가오고 있었는데, 리봉원은 1993년, 김명국에 대한 비판을 김정일에게 제출하였으나 김정일은 오히려 대노하여 "김명국의 권위를 헐뜯는 것은 나를 헐뜯는 것과 같다."라고 리봉원을 질책했다. 이때 김정일이 하도 화를 내서 놀란 리봉원이 기절했고 병원으로 실려가서 한달간 치료를 받았으나 퇴원하자마자 군복을 벗었다고 한다.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 1995년 7월, 김봉률 장의위원을 지냈고 여러 공개활동도 일부 보였으나 1995년 이후로는 다 끊겼고, 실각설이 돌았다. 일부 증언에 따르면 1996년에 보위사령부의 주도로 안기부 간첩으로 몰려서 체포, 처형되었다고 한다. # 1997년에 공개처형되었다는 일본 쪽의 보도도 있었다. # 여러 소스에서 처형당했다는 걸 봐서 90년대 후반에 처형된 것은 확실해보이며 그가 처형된 후에 프룬제 사건도 리봉원의 음모로 뒤집어썼다고 한다. #

3. 여담

4.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