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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10-03 16:55:31

류종개

이름 류종개(柳宗介)
자(字) 계유(季裕) 또는 유계(裕季)
본관 풍산 류씨
출생 1558년( 명종 13)
경상도 예안현 서면 가야리
(現 경상북도 안동시 녹전면 사신리 가야마을)
사망 1592년( 선조 25) 음력 7월 말
경상도 봉화현
(현 경상북도 봉화군)
서훈 예조참의 추증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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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기의 의병장. 류운룡, 류성룡 형제의 8촌 아우이다.

2. 생애

1558년 경상도 예안현 서면 가야리(現 경상북도 안동시 녹전면 사신리 가야마을)에서 아버지 류빈(柳贇)의 3남 1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형 류종화(柳宗和)와 류종직(柳宗直), 누이 1명이 있었다.

그는 1579년(선조 12) 식년 진사시에 2등 14위로 입격하고 정9품 훈도(訓導)를 지내던 중 1585년(선조 18) 식년 문과에 병과 18위로 급제하였다. 급제 후 권지(權知:견습 관원) 교서관 정자(校書館正字, 정9품)와 성균관 전적(典籍, 정6품)을 역임했으나 1591년 부친상을 당하자 향리로 돌아왔다. # 그 뒤 다시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향리의 유지로서 살아가다가 임진왜란을 맞았다.

당시 강원도를 담당한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의 일본군 제4군은 5월 19일 한성을 떠나 북상하여 임진강에서 경기도와 강원도의 경계인 자등현을 넘어 강원도를 침략했다. 이후 김화, 금성을 경유하여 6월 5일 회양부사 김연광(金鍊光)을 참살하고 회양부를 장악했다.[1] 이어 6월 12일에는 강원도와 함경도의 경계인 철령에서 함경도 남병사 이혼(李渾)의 군대를 격파하고 안변부로 진입했다.

이후 모리의 일본군은 17일 가토 기요마사의 2군과 합세한 뒤 다시 원산을 거쳐 동해안을 따라 남하해 흡곡(歙谷)에 도착한 뒤 강원도 전역에 격문을 보내 자신이 강원도를 통치할 것이니 반항하는 자는 가차없이 처단하겠다고 선포했다. 이후 1개월 동안 강원도에서의 지배권 강화에 주력한 모리는 7월 상순 삼척에 도착한 뒤 계속 남하하여 평해와 울진을 거쳐 경상북도 영해부로 진군했다.

일본군은 울진에서 군대를 나누었다. 1대는 동해안을 따라 영해 방면으로 계쏙 남하하고, 2대는 울진에서 서진하여 태백산맥을 넘어 예안 일대로 침입했다. 울진에서 계속 남하하던 일본군 1대는 영해에서 영해부사 한효순(韓孝純)에게 격파되었지만, 2대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채 예안으로 순조롭게 진군했다. 당시 경상북도의 산협(山峽)과 해빈(海濱)의 10여 고을은 일본군의 진군로와 동떨어진 곳에 있었기에 전화를 모면했다. 사족들은 괜히 군대를 모았다간 적을 불러들일 게 뻔하다고 여겨 험한 지역을 의지해 병란을 피할 뿐 전혀 군사를 모으지 않았다. 이때 류종개는 홀로 향리에서 장정 수백 명을 모아 태백산에 웅거하여 스스로 지켰다.

동몽교관 용담 임공 묘지명(童蒙敎官龍潭任公墓誌銘)에 따르면, 류종개는 박승임(朴承任)의 문인이었던 임흘(任屹)의 주도하에 춘양에서 거병한 수백 장정들의 대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임흘이 정한 16조목의 약속을 세웠다고 한다. 16조목의 약속 중에서 묘지명에 적힌 것은 10가지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거짓된 말을 하지 말고,
2. 놀라서 움직이지 말고,
3. 시끄럽게 떠들지 말고,
4. 해괴하게 장난하지 말고,
5. 아랫 사람이 윗사람을 능멸하지 말고,
6. 천한 사람이 귀한 사람을 능멸하지 말고,
7. 공을 자랑하지 말고,
8. 어려움을 사양하지 말고,
9. 뜻이 다르고 같음으로써 즐거움과 노여움을 삼지 말고,
10. 즐거움과 노여움으로써 향하거나 등지지 말 것이다.

임흘은 또 7조목의 군령을 세웠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북소리를 들으면 나아가 싸우고 징소리를 들으면 그쳐야 한다.
2. 북소리가 끊어지지 않으면 전진은 있을지언정 후퇴는 없으며 함부로 후퇴하는 자는 벨 것이다.
3. 징소리가 두 번 들린 연후에 후퇴할 것이요 후퇴함에 뒤지는 자는 벨 것이다.
4. 군중의 기밀을 누설하는 자는 벨 것이다. 5. 모이는 기한에 늦게 이르는 자는 벨 것이다.
6. 사사로이 민간의 물건을 취하는 자는 비록 그것이 작더라도 반드시 벌을 줄 것이다.
7. 군령을 따르는 자는 상을 줄 것이고, 군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벌을 줄 것이다.

이후 한달 동안 병사들을 훈련시키던 류종개는 일본군 3천 명이 광비촌을 경유하여 태백산맥을 넘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안집사 김늑(金玏) 등에게 통문을 보내 구원을 요청한 뒤 7월 26일 노루재로 군대를 이끌고 가서 살부령에 복병을 두어 일본군이 오는 걸 기다렸다. 그러나 류종개가 이끄는 부대는 무기를 미처 충분히 갖추지 못한 상황이라서 일본군과 대결하는 게 어려웠다. 그래도 류종개는 살부령에 매복하여 일본군 선봉대를 기습해 격파하는 전과를 거뒀다.

그러나 29일 일본군 본대가 온다는 첩보를 받고 군사를 거느리고 조라(助羅)의 물가로 나아가 구원병을 기다렸으나 구원병은 오지 않고 오히려 일본군의 기습을 받았다. 난중잡록에 따르면, 적의 선봉이 변장을 하고 가만히 왔으나 척후병이 이를 깨닫지 못하는 바람에 매복했던 의병대가 갑작스런 습격을 받고 모두 흩어졌다고 한다. 이때 류종개는 윤흠신 형제와 군관 권경 등과 함께 도망치지 않고 용감하게 싸우다가 힘이 다해 마침내 전사했고, 임흘, 김중청 등은 겨우 몸만 빠져나왔다. 일본군은 전투가 끝난 뒤 경주로 퇴각했다.

이후 향인들은 더욱 군사를 모으길 꺼렸지만 안집사 김늑과 김성일이 서로 호응하여 함께 격문으로 타이르자 사대부들이 비로소 곳곳에서 군사를 모아 각자의 고을을 지켰다. 다만 일본군은 산세가 험한 경상북도 죽령 일대에 굳이 진군하지 않았기 때문에, 임진왜란 내내 죽령 아래의 풍기, 영천, 예안, 봉화와 그 남쪽의 청송, 진보 등 여러 고을이 다행히 병화를 입지 않았다. 이에 사람들은 이 지역을 복지(福地)라고 불렀다.

류종개는 전후 예조참의에 추증되었고, 봉화의 경현사우(景賢祠宇)에 제향되었다.

[1] 김연광은 병사와 관리들이 모두 도망친 상황에서도 절명시 한 수를 써놓고 홀로 회양상 문 앞에 조복을 갖추고 단정히 앉아 있다가 일본군에게 참살되었다. 사후에 예조참판으로 추증되었고 개성의 숭절사(崇節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