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류영모(柳永模)[1] |
호 | 다석(多夕) |
출생 | 1890년 3월 13일 |
한성부 | |
사망 | 1981년 2월 3일 (향년 90세) |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자택 | |
학력 |
수하동 소학교 (중퇴) 경성일어학당 (졸업) 경신학교 (명예졸업) [2] 도쿄 물리학교 (수료) |
약력 |
양평학교 교사 오산학교 교사 오산학교 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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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개신교 사상가, 교육자, 철학자.최초로 노자의 도덕경[3]을 국역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2. 생애
1890년 3월 13일 서울 숭례문 인근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잠시 소학교에서도 2년만 수학하다가 다시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했다.15세에 개신교에 입문하여 연동교회에 다녔고 경성일어학당에 입학하여 일본어를 공부했다. 이후 1907년 서울 경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였다. 1909년 경신학교 졸업시험이 있었고 36명 졸업생 가운데 수석졸업을 할 예정이었으나 교장서리를 맡고 있는 레이너가 기존 교사들을 퇴임시키고 새로운 교사를 뽑는 것에 반대하여 동기들과 졸업장 받기를 거부했다. 결국 그 해 경신학교 졸업생은 14명뿐이었다.[4]
경신학교 졸업 거부 후 양평학교 교사를 잠시 맡게 되었으나 1910년 이승훈의 초빙을 받아 오산학교 교사로 2년간 근무하였다.
1912년 일본 도쿄에 가서 도쿄 물리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하던 중 신앙에 대한 깨달음으로 출세를 멀리하자는 결심을 하여 1년만에 유학생활을 접고 조선으로 귀국했다.
1914년부터 최남선과 교류하면서 여러 잡지에 철학적인 글을 기고했다.
1915년에 김효정과 결혼하였다.
1919년 3.1 운동 때 이승훈이 3.1 운동 거사 자금으로 모은 돈 6000원을 보관하다가 발각되었으나 아버지가 경영하는 경성피혁에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가 대신 체포되었다.
1921년부터 1922년까지 조만식의 후임으로 오산학교 교장을 지냈다.
1942년 성서조선사건에 언루되어 종로경찰서에 구금되어 57일 만에 풀려나기도 하였다.
그리스도교에 입교하기도 하였으나 톨스토이[5]와 노자를 공부하면서 무종교주의적인 입장으로 전향하였다.
1955년 자신이 1956년 4월 26일 사망한다 예언을 하고 다석일지 4권을 집필하였다.
1959년 노자의 도덕경을 '늙은이'라는 제목으로 최초로 국역하였다.
1981년 2월 3일 18시 30분에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3. 사후
2005년 류영모를 기리기 위해 다석사상연구회와 다석학회가 설립되었다.4. 여담
-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인 함석헌의 스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