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뤼시앵 페브르 (Lucien Febvre) |
출생 | 1878년 7월 22일, 낭시 |
사망 | 1956년 9월 25일, 생 아무르 |
1. 개요
1878년 7월 22일에 낭시에서 태어나 1956년 9월 25일 생 아무르에서 사망한 뤼시앵 페브르는 프랑스의 역사학자다. 마르크 블로흐와 함께 아날학파의 창시자로 거론된다.2. 생애
문헌학자 아버지를 둔 탓에 일찍이 역사학에 대한 사랑을 키웠다. 1899년에 뤼시앵 페브르는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고 1902년에 역사 교수고시(agrégation)을 통과한다. 그의 주 관심분야는 프랑스 근세사로, 경제사, 사회사와 정신사의 관계에 대해 연구했다. 1911년에 "펠리페 2세와 프랑슈콩테. 정치, 종교, 종교, 사회적 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페브르는 1919년에 스트라스부르크 대학교에서, 1933년에는 꼴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직을 역임한다. 1929년에는 스트라스부르크 대학의 동료 교수 마르크 블로흐[1]와 함께 "사회경제사 연보" (Annales d'histoire économique et sociale)라는 사학 학술지를 창간한다. 1932년에는 교육부 장관 아나톨 몬지와 함께 프랑스 백과사전을 공동 집필/편집하고, 1947년에는 고등연구실습원의 초대 총장으로 임명되어 2대 아날학파의 대표적 인물인 페르낭 브로델과 조우한다.
3. 실증사학 비판
페브르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프랑스 역사학의 주류를 이루던 실증주의 사학을 비판했다. 헨리 토머스 버클, 누마 드니 퓌스텔 드 쿨랑주, 샤를 세뇨보스, 레오폴드 폰 랑케와 같은 학자들이 제창한 실증사학은 역사가 자연현상과 다를 바가 없고 과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연구대상이라 주장했다. 이것의 귀결은 역사가 어떠한 패턴을 따라갈 수밖에 없고, 특정 지리적 조건은 역사를 특정 방향으로 끌고 갈 수밖에 없다는 결정론이었다.페브르는 실증사학의 지리학적 결정론을 거부하고 비달 드 라 블라슈라는 지리학자의 주장을 바탕으로 인간의 미래가 기술과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제도에 의해 좌지우지한다고 했다. 실증사학이 과거를 있는 그대로, 과학적으로 묘사하는게 목표였다면, 페브르가 주장하는 역사학은 현재 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도구인 셈이었다. 다시 말해, 현재 사회적 문제들을 바탕으로 역사적 서술을 바꾸고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논제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소위 "Histoire problème" (문제-역사)라고 명명된 페브르의 역사관은 과거를 객관화시키는 것을 지양하고 역사학자의 주관을 소개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또 거시적인 정치적 흐름에 치중했던 실증주의와 다르게 대중사 등이 더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기에 페브르는 여러 사회과학 분야를 넘나드는 학제적(學際的) 접근이 필요하다 했다. 그는 학문의 폐쇄성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던 고등사범 출신 철학자 앙리 베르의 영향을 받았고, 사학자가 마땅히 경제학, 사회학, 지리학, 법학을 통합시켜야 한다고 했다. 자신의 역사관 옹호하는 꼴레주 드 프랑스 연설에서, "하늘과 물, 마을과 숲, 모든 살아있는 것에 대한" 역사를 하고 싶다고 했다.
4. 프랑스 역사학계 비판
이런 생각 갖는 데 페브르의 개인적인 경험도 한몫했다. 페브르는 지나치게 엘리트주의적인 교수고시(agrégation)를 싫어했고, 노화되는 프랑스 역사학 교수진이 새로운 인재들의 임용을 막고 있으니 세대교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명문대 소르본 대학 교수직에 지원했지만 아웃사이더 역사관 때문에 거절당했다.페브르는 당시 역사학이 정치적 상황에 너무 타협적이라 주장했다. 특히 프랑스 제3공화국 시절 역사학자들은 정치인들의 체제를 정당화시키고 애국심을 주입시키려는 실증주의를 가장한 프로파간다와 같았다고 했다. 역사학자들이 과거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원대한 신념을 갖고 미래를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중적으론 레지스탕스 요원으로 활동해 영웅화된 마르크 블로흐와 다르게 비시 프랑스 치하에서도 조용히 교직생활을 역임해서 묻힌 감이 있다. 마르크 블로흐는 단순한 역사학자로서 업적 뿐만 아니라 유대인으로서 차별당하면서도 결국 드레퓌스 사건을 인정한 조국 프랑스를 위해 노년에도 군에 재입대하고, 조국이 '요상한 패배'[2]를 겪자 레지스탕스에 투신해서 싸우다가 마치 인생 마지막 순간에 선생님이란 본직에 돌아오듯 같이 총살당하던 어린 레지스탕스 동료를 위로하면서 총살당한 하나의 성자이자 프랑스의 애국자, 시대의 풍운자 지식인으로서 유명해졌으니 어쩔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당장 블로흐 서적중 "역사학자의 업 (Métier d'historien, 1949년 출판)"을 비롯한 사후 출판된 많은 저서들은 비록 인간으로서 그렇게 드라마틱한 삶을 살지는 않았지만, 학자로서 업적은 아날 학파의 쌍두마차 시조로서 결코 떨어지지 않으며, 또한 블로흐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지지하는 동료였기도 했던 페브르가 2차대전 후 다시 정리하지 않았으면 결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5. 저서와 학술활동
펠리페 2세와 프랑슈콩테. 정치, 종교, 종교, 사회적 연구 (Philippe II et la Franche-Comté, Étude d'histoire politique, religieuse et sociale) 1911년땅과 인간의 진보 (La Terre et l'évolution humaine), 1922년
프랑스 백과사전 (Encyclopédie française) 1935년부터 1940년까지 페브르가 지도한 백과사전 프로젝트
역사를 위한 전투 (Combats pour l'histoire) 1952년
16세기 종교적 중심에서 (Au cœur religieux du XVIe siècle) 195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