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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1-17 09:35:27

루트비히 에른스트 폰 벤젠도르프



파일:Benekendorff.jpg

1. 개요2. 일생
2.1. 초기 경력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2.3. 7년 전쟁2.4. 이후 경력

1. 개요

작센군 기병대 지휘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7년 전쟁에서 활약했다.

2. 일생

2.1. 초기 경력

에른스트는 1711년 6월 5일 호엔촐레른 가문의 방계가 다스리는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국의 수도 안스바흐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여러 갈래로 나뉜 독일의 옛 귀족 가문을 기원으로 하며, 아버지는 참의원과 포이흐트방겐의 황실령 소작인인 아차티우스 폰 베네겐도르프이다. 그는 여섯 형제 중 장남이었다. 에른스트는 16세까지 집에서 교육을 받았고 1727년부터 1729년까지 예나의 법학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1730년부터 1732년까지 루돌슈타트의 성에서 승마 강급을 받으며 지냈다.

1733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졌을 때, 에른스트는 드레스덴에서 작센군에 입대하여 가르 연대의 2번째 중위를 지냈다. 이 연대는 1734년 여름까지 폴란드-리투아니아 국경에 주둔했고, 에른스트는 가을에 사부아 공자 외젠 오스트리아군에 입대하여 자유 연대에 배속되었다. 1736년, 에른스트의 자유 연대는 바르샤바로 파견되었고 1737년 제1 중위로 승진했다. 1738년 가르 연대의 지휘를 맡은 폴렌츠 소장의 부관을 맡은 그는 1739년부터 1741년까지 가옥에 거주하면서 몇 개의 독일 주요 도시들의 법정을 견학했다.

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41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에른스트는 제2 대위로서 마펠 흉갑기병 연대에 배속되었다. 마펠 소령은 프랑스어를 잘 아는 에른스트를 높이 평가하고 그와 자주 프랑스어로 대화를 나누곤 했다. 그해 11월, 마펠 연대는 보헤미아로 진군해 프라하 공략전에 참가했다. 1742년, 마펠 연대는 모라비아 전역에 참가했다. 그러던 중 마펠 소령이 병에 걸리자, 에른스트는 그를 대신해 군대를 이끌었다. 이후 에른스트는 모라비아에서 일련의 작전들을 수행했고 1742년 후반기에는 뒤르펠트 소장의 부관, 레놀드 중장의 병참 장교로 활약했다. 7월 28일 베를린 조약이 체결된 뒤, 에른스트는 제2 대위의 자격으로서 프린츠 카를의 경기병 연대로 이관되었다.

1743년, 에른스트가 소속된 경기병 연대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에 주둔했고 1744년 프리드리히 대왕이 작센 선제후국을 통해 보헤미아 왕국을 침입했을 때 저지대 라우지츠에 수립된 저지선에 배치되었다. 이후 1745년 12월 15일 에른스트는 케셀스도르프 전투에 참가했으나 패배를 막지 못하고 보헤미아로 퇴각하는 오스트리아군과 동행했다. 1746년 연대와 함께 폴란드-리투아니아로 파견된 그는 소령으로 승진했고 1747년 중장으로 진급했으며, 1756년까지 연대와 함께 폴란드-리투아니아에 남아 있었다.

2.3. 7년 전쟁

1756년 7년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작센군 기병대에 소속되어 오스트리아군과 함께 프로이센군에 맞서 싸웠다. 1757년, 에른스트는 프리트비츠 중령이 병에 걸리자 그를 대신해 프린츠 카를 경기병 연대를 지휘했다. 6월 18일, 그의 연대는 프란츠 레오폴트 폰 나르다시 장군의 군단에 배속되어 콜린 전투를 치렀다. 그는 이 전투에서 훌륭한 활약을 선보이면서 대령으로 진급했다. 또한 그는 모이 전투에서도 두각을 드러내 명성을 떨쳤지만 연말에 연대에게 지급할 보수를 받기 위해 빈으로 갔다가 돌아오던 중 병이 나서 브룬에서 7주간 요양해야 했다.

1758년 프로이센군이 모라비아를 침공하자, 에른스트는 연대를 이끌고 오스트리아군과 합세해 이에 맞서 싸웠으며 6월 30일 요제프 폰 지스코비츠 장군 휘하에서 돔슈테트 전투를 치러 프로이센군 보급 마차 4,000대를 모조리 박살냈다. 1760년, 에른스트의 연대는 작센으로 귀환해 프란츠 모리츠 폰 라시 장군의 군단에 소속되었고 안드레아스 그라프 하디크 폰 푸타크 장군의 베를린 습격 작전에 참가했다.

1762년, 에른스트는 칼스바드에서 몇 주를 보냈고 그곳에서 소장으로 진급했다. 그후 그는 스톨베르크 왕자의 지휘하에 작센 흉갑기병 2개 연대와 일부 제국 보병대로 구성된 소규모 군단에 배속되었다. 그러나 프라이베르크 전투에서 패전을 면치 못했고, 1763년 4월 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 체결로 전쟁이 종식된 뒤에 드레스덴으로 돌아가기 전에 마리아 테레지아와 면대했다. 그 후 작센 기병대는 폴란드로 진군했지만 그 본인은 건강이 안 좋아서 휴가를 얻고 에게르로 가서 요양했다.

2.4. 이후 경력

1763년 작센 선제후 겸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아우구스트 3세가 사망한 후, 에른스트는 아우구스트 3세의 장남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기병 연대를 통솔하기 위해 폴란드로 파견되었다. 그는 크로카우에 모든 연대를 집결시키고 상부 슐레지엔, 모라비아, 보헤미아를 거쳐 상부 라우지츠까지 행진했다. 이후 1765년 5월 25일에는 384명의 병사와 62마리의 말로 구성된 비츠툼 흉갑기병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하츠 지역에 주둔했다.

1768년 작센 훈장을 수여받은 에른스트는 1769년 연대가 줄어들면서 수입이 5천 탈러에서 2천 탈러로 줄어들자 베네치아 공화국 군대에 입대하는 걸 고려했지만 작센에 남는 쪽을 택했다. 이후 1775년 1월 작센 기병대의 감찰관으로 임명된 에른스트는 1778년 바이에른 계승 전쟁에서 프로이센 기병대 장군 렌툴루스 중장의 치휘하에 2개의 드래온 연대를 맡았다. 1779년 전쟁이 끝난 후, 에른스트는 작센 기병대 총감찰관으로 복귀했고 같은 해 작센의 전체 기병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1786년 12월 25일 기병대 대장으로 진급한 에른스트는 이후로 작센군 기병대장으로서 영예를 누리다가 1801년 5월 5일 드레스덴에서 작센군에서의 68년간의 복무를 끝으로 사망했다. 향년 90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