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루돌프 그람리히 (Rudolf Gramlich) |
생년월일 | 1908년 6월 6일 |
사망년월일 | 1988년 3월 14일 |
국적 | 독일 |
출신지 | 프랑크푸르트 |
포지션 | 하프백 |
신체조건 | 179cm / 74kg |
등번호 | -[1] |
소속팀 |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1929-1939) |
국가대표 | 22경기 0골 (1931-1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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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전 축구선수.2. 생애[2]
2.1. 선수 생활
2.1.1. 클럽
그람리히는 어린 시절 FC 보루시아 프랑크푸르트, 스포르트프로인트에 소속되었지만 데뷔는 1929년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에서 이뤘다.그람리히가 활동하던 당시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의 최고 성적은 1932년의 독일 챔피언십 준우승이었다. 결승전에서 바이에른 뮌헨에 0대2로 패배하여 준우승에 머물렀다. 그 해를 제외하면 챔피언십 결승전에 올라가지 못했다.
2.1.2. 국가대표
그람리히는 1931년 9월, 덴마크를 상대로 국가대표팀에 데뷔하였다.1934년 월드컵 대표로서 그람리히는 8강전 한 경기에 출전하며 독일 대표팀이 3위에 오르는데 보탬이 되었다. 뒤이은 올림픽에는 팀의 주장으로 출전했지만 노르웨이에 덜미를 잡히며 2라운드에서 짐을 싸야했다. 그 이후 감독 오토 네르츠와의 불화로 대표팀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그는 5년간 총 22경기의 출전 기록을 남겼다.
2.2. 이후
30년대의 독일 축구계는 아마추어리즘을 고수했다. 그래서 그람리히는 축구 외에도 소속팀의 스폰서인 가죽 제품 공장의 바이어로 일하기도 했다. 그리고 1936년, 그의 가죽 회사를 세우면서 슈츠슈타펠에 가입했다.1939년부터 1942년까지 그람리히는 친정팀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의 회장직을 맡았고, 1939-40년에는 슈츠슈타펠 내의 무장친위대 활동도 해서 전범으로 의심받기도 했다. 결국 전후에 미군정에 의해 체포되어 1947년, 재판을 받았지만 증거 부족으로 풀려났다.
그람리히는 1955년부터 1970년까지 클럽 회장직을 맡았고 이후에는 명예 회장에도 임명되었다. 또한 1967년부터 1974년까지 분데스리가 회장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2018년,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측에서 그람리히의 나치 부역 혐의를 다시 조사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그람리히는 당시 축구계에서 매너 좋기로 소문난 선수였다. 또한 뛰어난 기술과 축구 지능으로 안정적인 게임을 펼쳐나갔다.4. 수상
4.1. 클럽[3]
- 독일 축구 챔피언십 준우승 1회: 1932
- 독일 남부 리그 우승 2회: 1929–30, 1931–32
- 가울리가 남서부 우승 1회: 1937-38
4.2. 국가대표
4.3. 개인
- 독일 공로훈장 1급 연방공로십자장: 1974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
[2]
출처: 위키피디아, 11v11
[3]
루돌프 그람리히는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원 클럽 플레이어라 팀 이름 기입은 생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