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
Lou Andreas-Salom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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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61년 2월 12일 |
[[러시아 제국| ]][[틀:국기| ]][[틀:국기| ]] 상트페테르부르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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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37년 1월 5일 (향년 75세) |
[[나치 독일| ]][[틀:국기| ]][[틀:국기| ]] 괴팅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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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독일|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작가, 정신분석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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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작가이자 정신분석학자.프리드리히 니체,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비롯한 당대 지식인들에게 영감을 준 여인으로 유명하다. 루 살로메는 그녀의 지성으로 당대 지식인들 사이에서 러시아에서 온 뮤즈라며 칭송을 받았다. 그녀는 당대의 종속적인 남녀관계를 부정하였던 초기 페미니스트라고 볼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의 지적 욕구를 채워줄 수 있고 자신과 인문학적인 관심사가 일치하는 남자 지식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으나, 그들과의 성관계를 철저히 거부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파울 레에와의 동거 생활에서 이를 찾아볼 수 있으며, 유일한 남편이였던 안드레아스와의 성관계를 거부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다만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의사 프리드리히 피넬레스[1]처럼 일반적인 연인 관계에 가까웠던 남성들도 있다.
2. 생애
1861년 2월 12일 프랑스계 위그노 교도인 러시아 야전군 참모본부의 고급장교 구스타프 살로메와 북 독일- 덴마크계 상인의 딸인 루이스 윌리엄의 딸로 태어났다.그녀의 저작 《자유로운 여자 이야기》에 따르면 첫사랑은 루터교 교회의 목사였던 하인리히 길로트로, 그로부터 철학, 형이상학, 논리학, 종교사를 배웠다. 후에 길로트가 그녀와 결혼할 것을 원했고, 결혼과 성생활을 원치 않았던 그녀는 당시 여성을 받아주는 몇 안 되는 대학 중 하나였던 취리히 대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심,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 대학에 입학했다.
취리히에서 공부하던 중, 원인불명의 질병으로 폐에 이상이 생겼다. 기후를 바꿔야 한다는 처방에 따라 1882년 1월 어머니와 함께 이탈리아 로마로 가서 젊은 철학자 파울 레에(Paul Rée)를 만나 사귀기 시작하며 철학과 신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교감했고 레에는 루에게 그의 스승이자 친구인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를 그녀에게 소개했다.
루를 보고 첫눈에 반한 니체는 자신의 철학을 이해하고 함께 논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며 리하르트 바그너를 소개하는 등 루를 각별히 아꼈고 루 역시 니체의 사상에 큰 관심을 보이며 레에와 절교하고는 니체와 사귀기 시작한다. 이윽고 니체는 살로메에게 청혼을 하는데 그녀는 니체의 청혼을 거절하고 오히려 절교했던 레에에게 다시 연락하여, 자신과 레에와 니체, 이렇게 3명이 어떠한 육체적 관계를 맺지 않고 오로지 서로 철학만을 논의하면서 지내는 동거 생활을 하자는 의견을 낸다. 루는 이 관계를 두고 ' 삼위일체'라고 불렀다. 다소 일반적이지 않은 삼각관계였지만, 레에와 니체는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레에는 살로메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녀의 주장을 미련없이 받아들였고 니체는 루의 주장에 엄청 화를 냈으나 '루와 같은 집에 살 수만 있다면 괜찮아'하면서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직후, 니체는 다시 루에게 청혼을 하나 루는 다시 거절했고, 루는 15일간 니체와 철학적 대화를 나눈 후 더 이상 그에게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는, 니체에게는 알리지 않고 레에와 함께 몰래 그 집에서 도망친다.
이후 레에와 살로메는 계속 베를린에서 동거 생활을 하면서 사회학자, 작가 등 여러 부류의 지성인들과 교류한다. 1887년 계속해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살로메를 짝사랑하고 있었던 레에가 살로메에게 청혼을 했지만 루는 지금처럼 친구로서의 관계까지만 유지한 채 동거 생활을 계속하자며 레에의 청혼을 다시금 거절했다. 레에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자 살로메는 두 사람이 동거하던 집에서 나가버렸고 같은 해, 당시 그녀에게 '너와 결혼하지 않으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라며 열렬한 구애를 하던 동양언어학자인 F.K.안드레아스와 결혼해버린다.
루 살로메의 결혼 소식을 들은 니체는 슬픔에 빠져 그 유명한 말을 자신의 책[2]에 쓴다. "당신이 나에게 거짓말을 해서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당신을 믿을 수 없다는 사실에 화가 납니다." [3]
사실 살로메는 안드레아스를 사랑해서 그와 결혼한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에게 계속해서 구애를 하는 주변의 남자 지식인들로 하여금 자신과의 연애를 단념하게 만들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결혼을 선택한 것에 불과했다. 실제로 살로메는 안드레아스와 혼인신고를 하는 조건으로 그에게 성생활이 없는 결혼 생활을 할 것을 내걸었다고 한다. 안드레아스는 살로메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였으며, 1930년까지 서류상의 결혼 관계가 유지되었다. 당시 기준으로는 파격적이였던 자유로운 연애 관계로 유명한 루 살로메지만 1890년대 중반까지는 성생활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1895년, 살로메는 15살 연하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만났으며 이후 3년간 연인 관계가 되었다. 원래 릴케의 이름은 르네 카를 빌헬름 요한 요세프 마리아 릴케였는데, 살로메의 주장에 따라 프랑스식 '르네'를 독일식 '라이너'로 바꾸고, 글씨체도 바꾸었다고 한다. 이 외에 살로메는 릴케에게 톨스토이 같은 문호들을 소개시켜주는 등 릴케의 문학에 큰 기여를 한다. 결별한 뒤에도 친구로서 연락을 이어갔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릴케와 헤어진 후 살로메는 1902년 의사였던 프리드리히 피넬스(Friedrich Pineles)와 연인 관계가 되었으며, 임신하기도 하였으나 낙태하였다. 살로메는 평생 아이를 낳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4]
1912년 바이마르에서 열린 제3차 정신분석학회에서 당시 그녀의 연인이었던 정신분석학자 폴 비에레로부터 정신분석학계의 대가 프로이트를 소개받아 죽을 때까지 친분을 유지했다. 이 시기 프로이트와 카를 융이 결별을 하는데 이것이 루 살로메에게 프로이트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70세부터 노쇠로 인해 앓기 시작한 당뇨병으로 몸이 허약해져 병원에서 요양하기 시작한 살로메는 병원에서 '프로이트에 대한 나의 감사'를 집필하고 1937년 1월 5일 당뇨, 요통, 유방암 등으로 75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3. 저작
1885년 《하느님을 차지하려는 싸움》1894년 《작품에 나타난 니체》
1895년 《Ruth(루트)》
1896년 《모르는 영혼에서》
1898년 《Fenitschka(페니취카)-어떤 방탕》
1899년 《인간의 아이들》
1901년 《마, 어떤 초상》
1902년 《중간지대에서》
1910년 《에로티시즘》
1917년 《소년에게 보낸 세 통의 편지》
1919년 《집》
1922년 《하느님 없는 시간. 그 밖의 동화》, 《악마와 그 할머니》
1923년 《Rodinka(로딘카)》
1928년 《하얀 길 위의 릴케》
1931년 《프로이트에 대한 나의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