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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몽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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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폴리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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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폴리 백국 툴루즈 가문 제 1대 백작
레몽 1세
Raymond I
파일:Raymond_IV_of_Toulouse.jpg
이름 레몽 드 툴루즈 (Raymond de Toulouse)
출생 1041년
프랑스 왕국 툴루즈
사망 1105년 2월 28일 (향년 63~64세 전후)
몬스 페레그리누스(Mons Peregrinus) 성채 [1]
매장지 트리폴리 백국 트리폴리 트리폴리 성채
가문 툴루즈 가문
배우자 이름 불명[2] (1066년 결혼/1076년 파혼)
마틸다 디 시칠리아 (1080년 결혼/1094년 사별)
엘비라 데 카스티야[3] (1094년 결혼)
자녀 베르트랑, 알퐁스 주르당
부모 아버지 폰스 드 툴루즈
어머니 알모디스 드 라 마르셰
종교 로마 가톨릭
재위기간 1102년 12월 25일 ~ 1105년 2월 28일 (2년 2개월 6일)
1. 개요2. 생애3. 1차 십자군 종군4. 예루살렘 수복과 소득 없는 맹활약5. 트리폴리 백국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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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툴루즈의 레몽 4세(Raymond IV de Toulouse, 1052년경 ~ 1105년)는 툴루즈의 백작이며, 프로방스 제후로써 제1차 십자군 원정의 주요 지도자이다. 사실상의 트리폴리 백국의 설립자이다. 일명 생질의 레몽(Raymond de Saint-Gilles)이라 불리기도 한다.

2. 생애

레몽은 폰스 드 툴루즈(Pons de Toulouse)와 알모디스 드 라 마르셰(Almodis de La Marche)의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생질(Saint-Gilles)의 백작이라는 칭호와 함께 백작위를 받았고, 1094년에 그의 조카딸이자 동생 윌리엄 4세의 딸인 아키텐 공작부인 필리파를 툴루즈 공작위 상속에서 몰아냈다. 1094년에 프로방스의 윌리엄 베르트랑이 죽고 그의 프로방스 후작 작위도 레몽에게 넘어갔다. 1096년 7월 22일에 작성된 우르바노의 교황 칙서에서 레몽은 "툴루즈의 공작이자 프로방스의 후작, 루에르그의 백작 레몽"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야말로 프랑스의 대귀족이다.

3. 1차 십자군 종군

레몽은 어려서부터 매우 신앙심이 깊었고 궁극적으로 성지에서 삶을 마감하기를 소망했기에 제1차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었을 때 그는 기꺼이 십자가를 지는 첫 번째 사람이었다. 그는 때때로 예루살렘으로의 이전 순례 중에 성묘 교회의 문지기와 싸움을 벌여 한쪽 눈을 잃었다는 소문 때문에 "외눈박이"(monoculus)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십자군 종군 지도자 중에 가장 나이가 많고 부유했던 레몽은 1096년 10월 말에 아내 카스티야의 엘비라, 어린 아들(여행 중에 죽음)과 교황 특사인 르퓌의 주교 아데마르를 포함한 많은 일행과 함께 툴루즈에서 출정했다. 그는 툴루즈의 합법적 상속녀인 조카딸 필리파가 자신 대신 툴루즈의 통치권을 그녀에게 부여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무시하고, 대신 그는 장남 베르트랑(Bertrand)이 통치하도록 맡겼다. 그는 알바니아의 두러스(Durrës)로 진군한 다음, 타란토의 보에몽이 지나간 길을 따라 동쪽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했다. 1097년 4월 말, 그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 에게 충성서약을 하지 않은 유일한 십자군 지도자였다. 대신 레몽은 우정의 맹세를 했고, 레몽과 알렉시오스 모두의 적이었던 보에몽에 대항해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그는 1097년 니케아 포위전과 도릴라이온 전투에 참여했지만, 그의 첫 번째 주요 역할은 1097년 10월 안티오크 공방전이다. 십자군은 안티오크가 셀주크 투르크에게 버려졌다는 소문을 듣고, 레몽은 자신의 군대를 앞서 보내 포위하고, 이는 도시를 차지하려는 타란토의 보에몽을 분노하게 했다. 그러나 안티오크의 저항은 완고하여 1098년 6월 8개월의 어려운 포위전을 거친 후에야 십자군에게 함락된다. 레몽은 카시니 궁전(palatium Cassiani)[4]과 성문 위의 탑을 점령했다. 그는 안티오크를 구원하러 하루 늦게 도착한 모술의 카르부가와의 두번째 안티오크 포위전 동안 병을 앓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피에르 바솔로뮤라는 수도사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성창을 재발견하면서 그의 열성적인 신앙심은 정점에 달하면서 이성을 잃었다. 그 기적은 십자군의 사기를 북돋웠고, 성문을 열고 돌격한 전략은 놀랍게도 안티오크 외곽에서 무슬림 지원군을 궤멸시켰다.

롱기누스의 창 자체는 르퓌의 아데마르를 위시한 여러 성직자의 회의주의 보에몽의 불신과 때때로 조롱에도 불구하고 레몽의 추종자들 사이에서 귀중한 성물이 되었다. 레몽은 또한 도시에 대한 자신의 지배권을 보에몽에게 넘기는 것을 거부하면서, 보에몽에게 자신이 맹세했듯이 안티오크를 알렉시우스 황제의 행정력 안으로 돌려보낼 의무가 있다고 상기시켰다. 그러자 레몽의 지지자들과 보에몽의 지지자들 사이에 성창의 진위 여부를 놓고 부분적으로 다툼이 일어났지만, 이면에는 안티오크의 지배권을 차지하기 위한 대리전이었다. 안티오크의 처리가 결판나지 않고 미뤄지자 많은 하급 기사와 보병들은 예루살렘으로 진군을 계속하는 것을 선호했다. 1098년 선선한 가을이 되자 그들은 레몽에게 성도 예루살렘으로 그들을 인도해달라고 레몽을 설득했다. 그래서 레몽은 안티오크에 휘하의 작은 분견대를 남겨두고, 그들을 이끌고 안티오크 근방의 마라트 알-누만을 포위했다. 당연하게도 보에몽운 안티오크에 남았있었다. 그런데 아데마르가 안티오크에서 병사했다. 이후 레몽은 성창이 준 명예와 함께 십자군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보에몽은 1099년 1월에 레몽의 분견대를 안티오크에서 추방하며 안티오키아 공국을 선포한다.

4. 예루살렘 수복과 소득 없는 맹활약

그 어처구니없는 소식을 들은 레몽은 분개하며 자신의 도시를 찾기 시작했다. 그는 1098년 12월에 함락된 마라트에서 출발하여 트리폴리로 진군하였고, 1099년 2월 14일에 트리폴리 북쪽의 아르카(Arqa)를 포위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굳이 공격할 위치가 아닌 곳을 기여이 시간을 할애하며 시도했다. 이는 보에몽이 안티오크 공국의 남쪽으로 향하는 영토를 제한할 수 있는 포섭이었다. 자신만의 독립 영토인 미래의 예루살렘 왕국을 트리폴리까지 획정하려는 장밋빛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트리폴리 외곽의 도시인 아르카의 포위 공격은 레몽이 기대했던 것보다 오래 지속되었다. 그는 나중에 중요한 케라크 데 슈발리에가 되는 요새인 히스 알-아크라드를 성공적으로 점령했지만, 트리폴리를 점령하려는 그의 고집으로 예루살렘으로의 진군이 지연되었고, 안티오크 이후 얻은 지지의 대부분을 잃었다. 이 고집으로 인하여 잃어버린 신망은 나중에 레몽에게 큰 절망으로 이어진다. 레몽은 마침내 트리폴리 점령을 포기하고, 5월 13일에 예루살렘으로의 진군을 계속하기로 동의했다. 바야흐로 수 개월간의 포위 공격 끝에 7월 15일, 포위당한 성스러운 도시 예루살렘은 해방되었다. 레몽은 다윗의 탑을 꿰차고 새로운 예루살렘 왕국의 왕관을 제안 받았지만, 예수가 고통을 겪었던 도시에서 통치하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거절했다. 그는 "예루살렘의 왕"이라고 불리는 것을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쳤다고 점잔 빼면서 말했다. 그러다가 털컥 예루살렘의 왕위는 고드프루아에게 넘어가버렸다. 지나친 겸손을 일삼다가 고집을 부리면 신망을 잃은 차에 프랑스의 대귀족이라는 강력한 왕의 등장을 꺼린 동료들이 온건한 고드프루아가 왕이 되는 것을 선호했다. 이후 국왕이 정해지자 레몽은 예루살렘에 머무르기보다는 여리고로 순례를 떠났다. 정말로 신앙심이 투철하거나, 트리폴리 포위를 계속하고 싶었을 가능성도 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레몽은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 빼앗은 다윗의 탑을 내주고 싶지 않아 했고, 고드프루아 드 부용은 어렵게 탑을 양도받고, 직 후 레몽은 예루살렘을 떠났다.

레몽은 예루살렘을 점령한 직후 여리고에서 머물다가 이집트의 무슬림들이 예루살렘 수복을 목표로 진군해오자, 출정하여 아스칼론 전투에 참전했는데, 이 전투에서 이집트의 침략군은 크게 격파되었다. 이후 아스칼론 공방전에서 레몽은 고드프루아에게 주는 것보다 직접 아스칼론을 점령하기를 원했고, 점령할 수 있는 결정적인 상황에서 마타도어하며 아스칼론 함락에 소극적으로 임했다. 그로 인한 분쟁에서 아스칼론은 이후 1153년까지 무려 50년간 점령되지 않은 채로 남았고, 예루살렘 왕국은 이집트 원정의 교두보를 얻지 못해 힘겨워 했다. 고드프루아는 또한 그의 군대가 아르수프를 점령하지 못한 것에 대해 레몽을 비난했다.
이후 레몽은 1099년~1100년의 겨울에 북쪽으로 진군했고, 그의 첫 번째 대대적인 활동은 트리폴리의 점령이 아닌 보에몽 1세에 대한 복수였다. 안티오키아 성립 후 보에몽 1세는 알렉시오스 황제로부터 라오디케아(Laodicea)[5]를 점령했는데, 그 지역을 레몽이 계략으로 획득했던 것이다. 라오디케아에서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서 보에몽 1세의 가장 강력한 적이었던 알렉시오스 1세와 동맹을 체결했다. 보에몽은 당시 안티오크를 비잔틴 영토로 확장하려고 시도했고, 안티오크 점령 당시 지원을 거부한 황제의 배신을 근거로 동로마 제국에 대한 맹세를 이행하기를 노골적으로 거부했다.

5. 트리폴리 백국 설립

레몽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머물다가 1101년 예루살렘이 해방되자 도중에 포기하고 돌아간 영주들이 보속을 한답시고 성립된 소규모 십자군, 1101년 십자군에 참여했고, 아나톨리아의 메르시반 전투에서 끔찍하게 패배했다. 그는 탈출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왔다. 1102년 그는 보에몽이 무슬림에게 붙잡히자 쾌재를 부르며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안티오크로 바다를 건너갔고, 그곳에서 보에몽이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안티오크의 섭정이었던 탕크레드에게 생각지도 못하게 감금되었다. 탕크레드에게 안티오크와 아크레 사이의 나라에서 어떠한 정복도 시도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후에야 해방되었다. 황당하고 억울했던 레몽은 즉시 약속을 어기고 타르투스를 공격하여 점령했으며, 트리폴리 포위 공격에 도움이 될 몬스 페레그리누스[6]에 성을 짓기 시작했다. 그는 안티오크의 적대적인 국가를 견제하기 위해 트리폴리에 우호적인 알렉시우스 1세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아직 트리폴리의 어떤 부분도 가지고 있지 못한 상태였지만서도 주변 성채를 점령한 기반으로 결국에는 조바심을 내며 자신이 트리폴리 백작임을 선포했다. 1105년, 그가 이끄는 마지막 처절한 돌격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때맞추어 도착해 온 파티마 왕조의 지원 함대를 막을 해군전력이 없었던 십자군은, 결국 항구를 점령해내지 못하고 도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제노바 공국에 해상전력을 읍소하는 서신을 보낸 후 기다리던 차에 트리폴리의 반격으로 1104년 9월 몬스 페레그리누스 성채의 한쪽에 화재가 났고, 레몽 자신은 옥상을 건너 탈출했지만 심하게 화상을 입었고 마지막 몇 달을 고통 속에 보냈다. 이미 고령이었던 레몽 4세는 트리폴리를 가질 모든 준비를 마친 그였으나, 결국 자신의 생애에서는 새 백국의 탄생을 지켜볼 수 없었다. 그는 트리폴리가 함락되기 직전인 1105년 2월 28일 부상으로 사망했다.
[1] 훗날 트리폴리 성채 [2] 고드프레이 1세 드 아를의 딸 [3] 레온 알폰소 6세 사생아 [4] 에미르 야기 시얀의 궁전 [5] 라타키아(Latakia) [6] 순례자의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