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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10 17:44:29

라자르 오슈

파일:라자르 오슈.jpg

1. 개요2. 생애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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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이 라자르 오슈(Louis Lazare Hoche, 1768년 6월 24일 ~ 1797년 9월 19일)은 프랑스 혁명기의 군인이다.

2. 생애

그는 베르사유 인근에서 왕실 마굿간의 마부인 아버지와 재단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왕실 마굿간에서 조수로 일하기도 했지만, 병사로 입대해 프랑스 근위대에서 복무했다. 프랑스 혁명 이전 이미 척탄병과 하사관으로 진급한 그는, 프랑스 혁명전쟁이 발생하자 장교로 임관해 두각을 나타냈고, 그의 상관이었던 뒤무리에 장군이 망명하자 그의 일파로 몰려 감옥에 가기도 했지만, 결국 1793년 덩케르크 방어전에서 활약하며 장군으로 진급했다.

그는 라인 전선에서 여러차례 큰 승리를 거뒀고, 이에 1794년 3월에는 이탈리아 전선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지만, 부임하자마자 체포되어 혁명군의 거물이었던 피슈그리 장군으로부터 반역죄로 기소당해 다시 감옥에 갇히게 된다.[1] 그에게는 다행히도 그해 7월 로베스피에르가 몰락하자, 오슈는 곧바로 석방되어 방데 지역의 왕당파 반란을 막기위해 셰르부르 해안방어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병력은 영국의 지원을 받는 왕당파 병력보다 적었지만, 오슈는 그들을 각개격파했고, 1795년 7월에는 퀴베롱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며 전세를 뒤집었다.[2] 그는 해안 방어군 총사령관에 올랐고, 1796년에는 왕당파 지휘관들을 제거하는데 성공하여 방데 전쟁을 종식시켰다. 그해 7월 아일랜드 원정을 위한 사령관으로 임명되기도 했지만 실패했고,[3] 이후 다시 라인강 전선에 배속되어 오스트리아군을 몇차례 격파하는 등 전공을 세운다.

그는 1797년 7월 총재정부의 전쟁장관으로 임명되지만, 폴 바라스와의 불화로 얼마안가 사직하고, 9월에 다시 군대로 돌아왔다가 며칠도 되지않은 9월 19일, 30세의 나이로 급사했다.

3. 평가

프랑스 혁명 전쟁 당시 가장 뛰어난 장군중 한명으로 꼽히며 나폴레옹의 강력한 라이벌중 하나였다.나폴레옹 역시 그를 '전쟁의 달인'으로 칭하기도 했다.

만약이지만 이 때 사망하지 않았으면, 프랑스의 역사와 나폴레옹의 일생이 크게 바뀌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왜냐하면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를 막후에서 계획한 시에예스는, 부정부패와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인기가 바닥까지 떨어진 기성 정치인 대신, 일단 현 집권자 바라스와 사이가 나쁘면서, 화려한 전공으로 대중에게 인기가 높은 장군 출신에, 젊고 야심이 없어 정치적으로 다루기 쉬운 인물을 바지사장으로 내세워 쿠데타를 일으킨 다음, 본인이 실권을 잡을 계획이었는데, 오슈가 이 조건에 정확히 부합하는 최적 후보자였던 것.또한 오슈는 마르소,클레베르등과 함께 공화정 지지자중 하나 였으므로 죽지않았다면 정치적 견해로 인해 나폴레옹과 부딪히게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하지만 하필 오슈는 죽고, 이후 나폴레옹이 귀국하자 차선책으로 내세운 인물이 나폴레옹이었다는 설이다. 물론 나폴레옹은 겉보기와 달리 야심이 없거나 다루기 쉬운 인물이 절대로 아니었으니... 어쨌든 이 때문에 그의 사망이 병사가 아닌 독살이라는 의혹설도 있다. 일단 왕당파에 영국정부는 물론 바라스와 나폴레옹[4]까지, 당시 그가 죽어야 이득을 보는 인물들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공식적인 사인은 결핵으로, 독살일 가능성은 높지 않아보인다.

한편으로는 그 역시 살아남았다면 나폴레옹의 원수(계급)중 한명이 될 가능성이 있었는데 프뤽티도르 18일 쿠데타 당시 왕당파에 맞서기 위해 나폴레옹과 손을 잡은적이 있기 때문이다. 주르당, 마세나, 베르나도트등과 같은 이들이 나폴레옹과 사이가 그다지 좋지 못했음에도 원수자리에 오른 것을 보면[5] 그가 나폴레옹을 받아들일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원수가 되었을 수 있었을 것이다.


[1] 그러나 정작 루이 18세와 내통하던 인물은 바로 피슈그리였고, 피슈그리는 다음해 쿠데타 음모가 발각되자 해외로 도피했다. 그는 결국 1804년 다시한번 쿠데타를 모의하기 위해 나폴레옹 통치하의 프랑스에 입국했다가 체포되었고, 얼마안가 감옥에서 자살인지 타살인지 논란이 있는 죽음을 맞았다. [2] 다만 이때 오슈는 왕당파의 안전을 보장하며 항복시켰는데, 나중에 정치위원으로 온 장 랑베르 탈리앵( 테레사 탈리앵의 남편)이 이 포로들을 군사재판에 넘겨 처형해버리는 흑역사가 발생했다. [3] 프랑스 육군을 영국 해군 몰래 아일랜드 남부에 상륙시켜, 아일랜드 독립군을 지원하는 작전이었는데, 영국 해군을 속이는 데는 성공했으나, 악천후 때문에 결국 상륙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일부 함선들은 그 와중에 난파되어 침몰했고 수천명이 익사했다. [4] 물론 당시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중이었는데, 부인이 바람피는 걸 알면서도 두고 봐야 할 정도로 본토에 힘이 닿지 않았기 때문에, 오슈를 암살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5] 애초에 나폴레옹은 처음 원수 직위를 내릴때 자신의 친구와 충직한 부하들, 친하진 않지만 뛰어난 전공을 가진 장군들, 자신과 대척점에 있지만 군 내부에서 지지를 받는 인물들, 이렇다할 전공은 없지만 신임받는 원로들 여러세력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는 정치적 계산을 내린뒤 수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