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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디에 드록바/클럽 경력/첼시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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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디에 드록바
2004-2012, 2014-15
파일:드록바 첼시 계약.jpg
▲ 2004년 계약 당시
소속팀 <colbgcolor=#ffffff,#191919> 첼시 FC ( 프리미어 리그)
등번호 11
15(2004-2006)
기록
파일:프리미어 리그 로고(화이트).svg
254경기
104득점 64도움
74경기
36득점 12도움
파일:FA컵(잉글랜드)로고(화이트).svg
29경기
12득점 8도움
파일:카라바오 컵 로고 가로형.svg
20경기
10득점 3도움
파일:crR1Bvv.png
4경기
2득점 1도움
합산 성적
381경기
164득점 88도움

1. 개요2. 첼시 1기
2.1. 2004-05 시즌2.2. 2005-06 시즌2.3. 2006-07 시즌2.4. 2007-08 시즌2.5. 2008-09 시즌2.6. 2009-10 시즌2.7. 2010-11 시즌2.8. 2011-12 시즌
3. 첼시 2기

[clearfix]

1. 개요

디디에 드록바 첼시 FC 경력을 소개하는 문서

2. 첼시 1기

2.1. 2004-05 시즌

2004년 7월, £24m의 이적료로 첼시에 입단했다.

작은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데, 당시 의욕적으로 돈을 풀어서 유명 스트라이커를 데려오고 싶어했던 구단주 로만 아브라모비치에게 무리뉴가 드록바를 제안하자, 로만은 "그게 대체 누구야? 어디 선수인데?"[1]라는 반응을 보였다. 여기에 한고집하기로 유명한 무리뉴는 "아브라모비치씨, 아무 말 하시지말고 그냥 사세요."라고 밀어붙이며 결국 이적이 성사된다. ###

우선 2004-05시즌에는 10골로 데뷔 시즌 치고는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다. 주전급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하지만 EPL 진출 초기의 드록바는 다이빙의 대명사(…)였다. 드록바의 다이빙을 비꼬는 맥주 CF[2]까지 등장할 정도로 드록바의 헐리우드 액션은 수많은 이들의 비난을 받았다. 첼시의 감독이었던 무리뉴 감독조차 인테르로 이적한 뒤, '나는 이제 첼시의 감독이 아니다. 때문에 첼시 선수들을 지켜야할 의무도 없다. 그러니까 드록바는 시도때도 없이 다이빙을 하는 녀석이라는 이야기를 해도 문제 없는거지?'라고 발언.

이러한 지저분한 플레이 스타일과 더불어 득점 갯수도 그다지 높지 않았던 데다 득점 장면도 왠지 억지로 밀어넣는 듯한 장면이 많이 연출되면서 뽀록바라 불리며 엄청나게 까였다.[3] 그래서 후일 무결점 스트라이커 안드리 셰브첸코의 영입을 반겼지만 ...
04-05시즌 기록
리그 FA컵 리그컵 챔피언스리그 슈퍼컵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26 10 2 0 4 1 9 5 0 0 41 16

2.2. 2005-06 시즌

드록바는 2005년에 에르난 크레스포 AC 밀란에서 임대 종료 뒤 첼시로 복귀하며 돌아오자, 크레스포와 포지션이 같은 탓에 매우 치열한 주전 경쟁을 해야 했다.

하지만 드록바는 EPL에 점점 적응해가며 주전을 더욱 굳혀간 반면 크레스포는 리그 30경기 10골을 기록하며 준수한 편이긴 했으나 여전히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 등 영국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며 잉글랜드에서의 생활에 전혀 적응을 못하고[4] 결국 다음 시즌인 06/07시즌 여름이적시장에서 인테르로 2년 임대[5]를 가며 첼시를 떠났고 이후 드록바는 첼시 부동의 주전이 되었다.

드록바는 발전된 골결정력으로 짧은 시간 내 첼시의 없어서는 안될 공격 자원으로 등극하였으며, 2005-06 시즌에는 11개의 어시스트를 하면서 10-10 클럽에 가입했고 최다 도움자가 되었다.
05-06시즌 기록
리그 FA컵 리그컵 챔피언스리그 슈퍼컵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29 12 3 1 1 0 7 1 1 2 41 16

2.3. 2006-07 시즌

이 시즌부터 드록바는 등번호를 15번에서 11번으로 바꿨고 이는 첼시에서 뛰는 동안 계속 유지되었다. 첼시에 잠시 돌아온 14-15 시즌에도 기존의 11번이던 오스카를 밀어내고 11번을 차지할[6] 정도로 첼시의 11번은 드록바를 상징하는 번호였다.

2006-07 시즌 시작 전, 안드리 셰브첸코의 영입으로 다이버 드록바의 자리는 사라진다는 조롱섞인 기사들이 타블로이드지를 장식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드록바는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는다. "그 동안 성적에 대한 부담감으로 어떻게든 골을 만들어야겠다는 압박감에 헐리우드 액션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제, 이런 플레이와는 결별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한동안 다이빙이 이어졌으나, 본인의 득점력이 살아나면서 그제서야 다이빙이 사라졌다. 맨체스터 시티와의 개막전에서 마수걸이 골을 성공시킨 이후, 리버풀, 바르셀로나와 같은 강팀들을 상대로도 어렵지 않게 골을 뽑아내며, 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기어코 역전승을 만들어내는 커리어 사상 최고의 시즌을 보내게 된 것이다. 그에 비해 드록바의 경쟁자였던 셰브첸코는 부상과 부진을 오가며 드록바를 밀기는 커녕 주전자리를 완전히 내주고 말았다.

이 시즌의 활약으로 FIFA FIFPro 월드 XI, UEFA 올해의 팀에 포함되었으며, 드록신이라는 별명도 이때 만들어졌다.

리그 우승에는 비록 실패했지만 2007년 프리미어 리그에서 20골을 넣으며 아프리카인 최초로 득점왕에 올랐으며, 칼링컵과 FA컵 우승은 모두 드록바의 골로 이루어진 것이다.
06-07시즌 기록
리그 FA컵 리그컵 챔피언스리그 슈퍼컵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36 20 6 3 5 4 12 6 1 0 60 33

2.4. 2007-08 시즌

2007-08시즌[7]과 08/09 시즌은 부상과 부진 등으로 각각 리그 19경기 8골, 24경기 5골에 그쳤다. 그러나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최고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모스크바에서 펼쳐진 맨유와의 결승전에서 결승전에선 골대를 맞추는등 분전했다만 연장 후반 막판 비디치의 뺨을 때리고 퇴장당하여 첼시의 첫 번째 챔스 우승 도전이 실패하는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8]
07-08시즌 기록
리그 FA컵 리그컵 챔피언스리그 슈퍼컵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19 8 1 0 1 1 11 6 0 0 32 15

2.5. 2008-09 시즌

팀의 주포로서 제대로 된 활약을 하지 못하고 부상과 징계[9]와 함께 니콜라 아넬카에게 원톱 자리를 내주고 방황하고만다. 무리뉴의 공백을 메우지 못하고 아브람 그랜트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를 겪으며 이리저리 무너진 첼시도 거스 히딩크를 소방수로 불렀다. 팀은 히딩크 부임 후로 점차 나아졌으며, 드록바도 히딩크 부임 후 첫 5경기에서 4골을 넣는 등 히딩크의 조련을 받아 스콜라리 시절 공존이 안된다던 아넬카와의 공존이 이루어지고 차츰 안정을 되찾고 나아지기 시작하더니, 시즌 후반기로 갈수록 쓸만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16강 유벤투스 전부터 8강 리버풀 전까지 4경기에서 모두 득점을 기록하면서 준결승 진출에 기여했다.[10]
파일:20210117_211145.jpg
하지만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한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 오브레보의 미친듯한 오심퍼레이드후에 카메라에 대고 It's disgrace. F**king disgrace![11]라고 일갈하여 3경기 출장정지 징계를 당하고 말았다.[12] 물론 사건을 저지르고 난 후 예전과는 다르게 팬들과 시청자들, 특히 어린이들에게 사죄의 마음을 전달하였다.

2019년 12월 발롱도르 시상식에서 사회자로 나선 드록바는 다시금 이 때의 일을 끄집어냈다. 그 때 하도 격앙되어있다보니 같이 사진을 찍어달라고 요청했던 한 어린이 팬의 요청을 거부했는데, 그 어린이가 바로 킬리안 음바페였다는 사실. 드록바는 이후 음바페를 무대 위로 불러 같이 사진을 찍었다. #

그래도 FA컵 결승에서 동점골을 넣는 등 2-1 승리 및 우승에 기여하며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잉글랜드 메이저 대회에서의 총 6번째 결승전 득점. 이후 드록바는 팀을 떠날 생각도 있었지만, 카를로 안첼로티가 부임하고 잔류를 선언했고, 재계약을 체결했다.
08-09시즌 기록
리그 FA컵 리그컵 챔피언스리그 슈퍼컵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24 5 6 3 2 1 10 5 0 0 42 14

2.6. 2009-10 시즌

개막전에서 헐시티를 상대로 프리킥으로 동점골을 만든 뒤 후반 추가시간에 데쿠의 패스를 받아 왼쪽 측면에서 절묘한 칩슛으로 역전골을 만들어 극적인 2-1 승리를 이끌었다. 2라운드 선덜랜드 원정에서는 페널티킥 유도로 어시스트 1개를 기록했다. 3R 풀럼 원정에서는 시즌 3호 득점, 4R 번리와의 홈경기는 선제골을 어시스트, 5R 스토크 원정에서는 동점골로 시즌 4호 득점을 만들어냈다. 6R 토트넘과의 홈경기에서는 애슐리 콜의 선제골을 어시스트하고, 시즌 5호 득점을 성공시켰다. 7R 위건 원정에서는 동점골로 시즌 6호 득점을 성공시켰으나 넣었으나 3-1 패배를 막지 못했다. 이 골은 자신의 첼시 100호 득점이었다. 8R 리버풀과의 홈경기는 홀로 아넬카와 말루다의 득점을 모두 어시스트하며 절정의 폼을 과시했다.

09-10 시즌은 그야말로 드록바의 최전성기였다. 본인도 인터뷰에서 지금이 자신의 전성기라는 언급을 하였을 정도.

안첼로티 감독 부임 이후 리그에서 웨인 루니(26골)의 부상을 틈타 29골 10어시스트의 눈부신 활약으로 인해 다시금 드록신이 되었으며, 득점왕까지 차지하게 된다. 어시스트도 리그 3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29골 중 페널티로 얻은 득점은 마지막 위건전에서 1골 뿐이며[13] 나머지가 전부 필드골인 점도 대단. 특유의 돌파력으로 골을 넣거나 하면 경기 중계 중 해설자들조차 드록신을 언급할 정도였다.

챔스는 비록 인테르에 밀려 16강에서 탈락하나[14] 리그에서는 최강의 모습이었다.

팀은 결국 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며 FA컵까지 제패하며 창단 첫 더블을 달성하였다.
파일:20201229_013021.jpg
하지만 이런 활약에도 불구하고 PFA 올해의 선수, FWA 올해의 선수, 프리미어 리그 올해의 선수 등 시즌 MVP 상들은 전부 루니가 가져갔는데 이에 대한 논란이 상당했다.[15]

이러한 신에 빗댄 그의 별명으로 장난 반 진담 반을 섞은 검은 예수가 쓰이기도 할 정도로, 지금은 과거에 비하면 그 위상이 동일인물인가 싶을 정도로 바뀌었다. 시즌 기록은 44경기 37골 12어시스트.
09-10시즌 기록
리그 FA컵 리그컵 챔피언스리그 슈퍼컵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32 29 4 3 2 2 5 3 1 0 44 37

2.7. 2010-11 시즌

리그 개막전부터 해트트릭을 달성하면서 6-0 완승을 이끌었다.

프리미어 리그 7라운드(10월 21일 기준 6골 7어시스트로) 득점, 어시스트 공동 1위를 달리는 중. 10-11 시즌에도 초반부터 드록신 모드 발동 중. 10월 3일 아스날 전에서는 멋진 어시를 받아 골포스트를 맞고 들어가는 골을 넣는 활약으로 아스날 킬러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그 이후 폼이 급격히 떨어지며 꽤 긴 부진에 빠졌다. 첼시 자체가 안첼로티 아래에서 휘청이기도 했지만 드록바 역시 10월 말까지, 즉 시즌 개막 후 3개월 남짓 6골 7도움을 올려놓고 말라리아에 감염된 이후로 폼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남은 7-8개월간 리그에서 쌓은 기록이 고작 5골 8도움 뿐이었다. 도움은 스트라이커로서는 많이 쌓았다지만 골 기록에서는 그의 명성에 어울리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중반기 이후에는 드록신에서 드록인으로 격하되기도.

하지만 그를 드록인이라고 부르면 선수비방으로 1994329413 강퇴사유가 된다고 한다.

그러다 1월 2일 아스톤빌라 전에서 귀중한 동점골을 터뜨리며 팀의 분위기를 전환, 곧이어 터진 테리의 역전골에도 기여하며 드록신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경기 결과가 이렇게 팀의 승리를 견인하며 더불어 4위도 탈환할 뻔 했는데 추가시간에 터진 아스톤빌라의 동점골로 아 망했어요.

1월 25일 볼턴 원더러스 전에서 패스미스로 흘러나온 공을 받자마자 거의 하프라인 가까운 지점에서 중거리 슈팅, 그대로 선제골.[16] 이 슛이 ㅎㄷㄷ 한것이 공이 무회전이 걸려 뚝 떨어지면서도 좌우 지그재그로 흔들리는 궤도를 탔다. 워낙 먼거리에서 쏜 슛이라 키퍼가 막지 못한게 의아했던 해설위원은 "이건 공의 궤적을 봐야겠는데요?" 리플레이 감상 이후 "아 공이 춤을 추네요" 인터넷에서는 도깨비슈팅, UFO 슈팅이라며 찬양했다.

그 후로도 토레스 영입 이후 상당히 흔들리던 팀에서 최전방의 무게감을 잡아주기는 했지만 괜히 되도 않는 토레스와 드록바의 공존을 시도한다던지 하는 뻘짓들의 향연으로 부진을 면치 못했다. 덕분에 초기의 기세를 잃고 첼시는 1위를 놓친채 계속 방황했다. 어찌저찌 챔피언스 리그 8강까지 진출하고 1차전 0대0으로 비긴뒤 2차전을 준비하는데..

이후 4월 13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와의 10/11 UEFA 챔피언스 리그 8강 2차전에서 하프타임에서 페르난도 토레스와 교체출장. 0:1로 뒤진 후반 하미레스가 경고누적으로 퇴장당한 상황에서 추격에 불을 지피는 동점골을 집어넣으며 오랜만에 드록신으로 재림하나 싶었으나, 곧바로 박지성에게 1분만에 골을 먹으면서[17] 결국 이 날의 활약은 없던 것이 되어버렸다.

탈락의 아픔을 딛고 4월 16일에 펼쳐진 리그 32라운드 웨스트 브롬비치와의 원정 경기에서는 먼저 선제골을 내주긴 했지만 칼루와 함께 각각 1골 1어시를 기록하는 대활약을 펼치며 팀을 3-1 승리로 이끌었다.

그리고 5월 9일 사실상 리그 우승의 향방이 갈리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 결국 챔피언스 리그에 이어 또다시 패배하며 리그 우승마저 넘겨준다. 그 후 조용히 시즌 종료.

어쨋든 시즌 총합 11골 13어시로 시즌을 마쳤다. 아무리 드록인 소리 들어도 제 역할은 다 해준 셈. 특히 당시 첼시가 우승 경쟁의 끝자락까지 갔다고는 하나 토레스 영입후 팀이 크게 흔들렸던 것을 감안하면, 또한 당시 나이가 32~33살인걸 생각하면 충분히 훌륭한 활약이었다.
10-11시즌 기록
리그 FA컵 리그컵 챔피언스리그 슈퍼컵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36 11 2 0 0 0 7 2 1 0 46 13

2.8. 2011-12 시즌

11/12 시즌 3라운드 노리치 전에서 후반 골키퍼와 경합 도중 골키퍼의 펀칭을 그대로 얻어맞아 공중에서 기절하고 떨어졌다. 떨어진 뒤 움직이지 않아 첼시 팬들은 단숨에 경악과 공포에 휩싸였으며, 분위기 역시 최악으로 돌변했다. 심지어는 최악의 부상이라는 경추골절이라는 말까지 나왔으나... 다행히도 첼시 공홈에서 경미한 뇌진탕이라고 발표가 나왔다.

9월 24일 6라운드 스완지 시티와의 홈경기에서 교체투입되어 팀의 4번째 골을 넣어 시즌 첫 득점을 신고했다.

9라운드 QPR 원정에서 양발 태클로 크리스 포이 주심으로부터 다이렉트 퇴장을 당해 3경기 출장정지를 당했다. 이 경기는 첼시 팬들에게 악몽같은 포이스토리 경기로 2명이 퇴장당한 첼시는 QPR에 1:0으로 졌다.

10경기에 나와 2골을 기록중이며 이전보다 많이 떨어지네 소리가 나와 방출되는가 했더니만 2012년 1월부로 첼시에서 이적시킬 예정이다.

그렇긴 해도 12월 7일에 벌어진 챔피언스리그 조예선 6차전 발렌시아전에서 2골 1도움을 기록하며 첼시의 3:0. 마타와 함께 승리의 일등공신이 됐다.

프리미어리그 14라운드 리그 경기에서도 상승세인 뉴캐슬에게 선제골을 집어넣으며 3:0 승리를 만드는 물꼬를 틀었다. 노쇠화니 어쩌니 해도 토레스와는 달리 스트라이커 역할은 해주고 있다. 발렌시아전까지 합하면 종합 3골. 확실히 분위기를 탔다.

2012년 1월 20일, 계약기간 3년에 주급 27만 파운드란 조건으로 중국 프로축구 슈퍼리그 팀 상하이 선화로 이적했다는 뉴스가 전해졌으나, 드록바 본인은 여름까지 첼시를 떠날 일은 없다고 못을 박았다. 일단 여름 이후의 행보는 미정인 상태.

2012년 1월 23일, 2012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 참가하여 조예선 1차전 수단 공화국 전에서 골을 기록하여 1:0 승리에 기여했다. 이후로 결승까지 무실점으로 무난히 참가하여 메이저대회 첫 우승을 차지하는가 했더니만 잠비아에게 결승에서 승부차기 끝에 패해 준우승, 그것도 전승준으로 차지하고 만다. 더더욱 비극은 바로 그가 후반 24분 패널티킥을 얻고도 실축하면서 이길 수 있던 절호의 기회를 날린 것이다. 2006년 대회 결승에서 이집트에게 패하여 준우승할 당시 기자들의 인터뷰에 수건으로 얼굴을 덮고 망연자실하게 아쉬워하던 패배를 또 겪고 만 셈이다.

그러던 와중에 안드레 빌라스보아스 감독의 경질에 기여한 노장무리의 한명으로 판명나서 첼시 팬들의 신임을 잃고 있다. 물론 보아스 감독이 기존 선수들의 재활용하고 재정비하며 팀을 추스리는 역량이 모자라다는 것이 입증된 지금에 와서는 이야기가 많이 달라졌다.[18] 다만 감독이 지정한 키커인 마타의 킥을 베테랑의 권력을 이용해 뺏어 차는 등 도를 넘은 행동을 저지른 책임은 있다.

2012년 3월 15일, 나폴리와의 홈경기에서는 선제골을 넣었다. 뛰어난 연기력도 선보였다 이것이 진정한 연기력
파일:Drogba Barcelona Goal(11-12).gif
2012년 4월 19일, 스탬포드 브릿지에서 펼쳐진복수혈전첼시와 바르샤의 챔피언스리그 4강 1차전에서 전반 추가시간에 하미레스의 패스를 받아 그대로 골로 연결시켰다. 참고로 이 경기 때 첼시의 유효슈팅 개수는 1개였다. 그야말로 원샷원킬.

2012년 5월 5일 리버풀과의 FA컵 결승에서 1:0으로 앞서고 있던 후반 6분에 추가골을 넣었고, 최종 스코어 2:1로 드록바의 골이 결승골이 되었다. 시즌 막판 들어서 전성기급의 활약을 보여주는 중.

2012년 5월 19일 열린 챔피언스리그 바이에른 뮌헨전이 뮌헨 홈구장 알리안츠 아레나에서 열렸다. 팀이 후반전 토마스 뮐러에게 골을 먹혀 지고있던 상황에 그는 극적인 동점골을 넣어 승부차기까지 경기를 끌고 갔다. 그리고 승부차기에서도 마지막 키커로 골을 넣어 4:3으로 첼시의 사상 첫 챔피언스리그 우승이자 자신의 클럽 축구인생 최대우승의 영광을 맛보았다. 사실 이 경기 첼시 하이라이트는 곧 드록바의 하이라이트가 전부라고 해도 좋을만큼 눈부신 활약을 보였다.[19]

패배 직전 동점골을 터뜨려 드록신이 되었다가 연장전 PK 헌납으로 망할뻔한걸 체흐가 막아내 승부차기에서 우승을 확정짓는 슛을 성공시키며 다시 드록신이 되었다. 참고로 이 페널티킥은 드록바의 평소 PK에 비해서 도움닫기가 짧았는데, 이것은 상대 키퍼인 마누엘 노이어가 킥의 방향을 잘 읽는다는 점을 감안한 임기응변이었다고 한다.

결국 드록바는 과거 0708 시즌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막바지에 퇴장당해 승부차기를 차지 못하고 팀의 패배를 바라봐야만 했던 순간을 완벽히 반대로 재현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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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 till I die[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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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22일, 새로운 도전을 위해 첼시 FC를 떠나는게 확정됐다.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의 골과 첼시 우승 확정 승부차기 골이 마지막 골이 된 셈. 이로써 푸른색 유니폼을 입고 런던을 호령하던 검은 예수 드록바를 이제는 첼시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

다만 향후 거취에 관해서는 명확하게 밝히지 않은 만큼 다양한 설레발 추측이 나오고 있다.
11-12시즌 기록
리그 FA컵 리그컵 챔피언스리그 슈퍼컵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24 5 3 2 0 0 8 6 0 0 35 13

3. 첼시 2기

3.1. 2014-15 시즌

2년 만에 다시 1년 계약으로 첼시에 복귀했다. 2014년 기준으로 만 36세라 이번 계약이 마지막이 될 가능성이 높다. 2년 전의 영광을 다시 재현하기위해 알차게 보강한 첼시의 올시즌이 기대되는 부분이다. 등번호는 첼시 생활 초기에 달았던 15번을 달기로 했다가, 11번을 달고 있던 오스카 프랭크 램파드가 달았던 8번을 달기로 하면서 다시 11번을 달 수 있게 되었다.

레알 소시에다드와의 프리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부상을 당했으나, 6개월 부상설은 마르카 등 스페인 언론이 주장하는 일방적인 추측이다. 무리뉴 감독이 번리와의 1라운드 경기 전 기자회견에서 밝힌 데 따르면 경기에 뛸 수도 있는 상태라고 한다.

실제로 1라운드 원정 경기와 2라운드 홈 경기에 모두 출전하며 팀의 승리를 지켰다.

그러나 샬케와의 챔피언스리그 경기에서는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하며 드록바도 인간이었다는 소리가 나왔다. 그러다 마리보르전에서 PK골을 넣어 오랜만에 스탬포드 브릿지의 홈팬들을 열광시켰다.

그리고 10월 27일 프리미어리그 9라운드 지난시즌 제대로 말아먹은 옆동네 빨강팀과의 경기에서 부상입은 코스타를 대신하여 출전하였으나, 상대 수비와의 제공권 싸움에서 밀리고, 역습 때 스피드가 딸려 제대로 침투도 하지 못하는 등 영 좋지 못한 경기력을 선보이던 중에 후반 초반 고별전이었던 챔스 결승인 바이에른 뮌헨 전의 골을 생각나게 하는 헤딩골을 집어넣었다. 참고로 이 골은 주제 무리뉴가 감독으로 데뷔한 이후 자신이 지휘한 리그 경기에서 터진 1000호 골이라고 한다.

이어 이틀 뒤 슈루즈버리 타운과의 캐피탈 원 컵에서도 모하메드 살라의 띄우기 패스를 받아 필드골을 집어넣었다. 이 전에 살라에게 가던 패스가 상대 선수를 맞고 굴절되어 살라가 급히 역동작으로 차내느라 정확한 패스라고는 보기 힘들었는데 이걸 전성기적 포스로 달려들어 골을 뽑아냈다.

11월 26일 챔피언스리그 샬케04와의 경기에서 후반65분 교체 투입 1골1어시를 기록하였다.

12월 4일 프리미어리그 14라운드 토트넘 홋스퍼 전에서 아자르의 골을 원터치 패스로 어시스트하시고 오스카의 패스를 받아 골을 넣으며 1골 1어시를 기록하였다.

다음 경기인 프리미어리그 15라운드 뉴캐슬 원정 경기에서도 교체 출장이었지만 헤딩골을 성공시켰다. 첼시는 이 경기에서 졌지만 드록바의 나이를 잊은 맹활약에 위안을 삼을 수 있었다.

이후 한참 동안, 자선 경기에서나 모습을 드러내던 드록바는 코스타와 레미의 부상으로 강제로 선발 출장을 하게 되었고, 레스터와의 프리미어리그 34R 원정경기에서 터닝 동점골을 성공시키며, 전반전 부진으로 인한 뉴비들의 징징거림을 한 방에 침묵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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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시의 레전드 존 테리, 디디에 드록바, 페트르 체흐
381경기 164골 87도움
그리고 마지막 38라운드 선덜랜드 전에서 시즌을 마무리하고 모든 이의 축복과 환호와 기립 박수 속에서 8시즌 동안 뛴 프리미어리그 고별 경기를 마무리했다. 은퇴는 좀 더 나중이라고 했지만 이젠 프리미어리그는 마지막이라고 했던 그에게 뜻깊은 경기였다. 한편, 같은 날, 리버풀 FC의 전설 스티븐 제라드도 프리미어리그 고별 경기인 스토크 시티전에서 1골을 기록했지만 팀이 1-6으로 시즌 최다 실점 패배를 당하는 통에 은퇴 경기를 말아먹은 것과 너무나도 대조적인 분위기를 보여줬기에 외신들도 두 레전드의 극과 극의 마지막 프리미어리그 경기라고 보도했다.
14-15시즌 기록
리그 FA 컵 리그컵 챔피언스리그 기타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출장 득점
28 4 2 0 5 1 5 2 0 0 40 7

[1] 마르세유에서 한 시즌 활약하긴 했지만, 첼시 입단 이전의 드록바는 유럽에서는 아직 무명에 가까웠다. [2] 48초 쯤에 밀대에 걸려 넘어지는 척 하는 선수가 척 봐도 누군가와 닮았다. [3] 첼시팬들조차 준수했던 크레스포를 왜 임대보내버리고 이딴놈을 쓰냐고 욕을 했었을 정도. [4] 게다가 아내의 유산 등 악재까지 겹치며 우울증 증세까지 찾아왔다. 저런 불행이 겹치다보니 크레스포는 이 당시 진지하게 현역 은퇴를 고려했었을 정도였다. 결국 축구적인 측면보다도 개인적인 측면에서 더욱 문제를 겪게 되면서 첼시 시절을 실패로 거두고 말았다. [5] 말이 좋아 임대이지 2년후에는 첼시와 계약 만료였기에 사실상 완전히 떠난거나 다름 없다. [6] 오스카는 이 시즌에 프랭크 램파드의 번호였던 8번을 이어받았다. [7] 시즌 중반에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으로 1달 간 자리를 비우기도 했다. [8] 어차피 경기 막판의 퇴장이었지만 당시 승부차기까지 고려해보면 당시 첼시의 PK 전담 키커는 프랭크 램파드였지만 드록바 역시 PK를 굉장히 잘차는 선수로 실제로 램파드 부재시 본인이 승부차기를 차는 세컨드 키커였으며 첼시 시절 승부차기를 포함한 PK에서 드록바가 실축한 경우는 딱 한 번이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초고승률의 키커 1명을 그대로 잃은 셈이다. 결과 자체도 첼시는 앞선 1~5번의 키커중 단 한 명만이 실축을 했던걸 감안하면.. [9] 번리와의 칼링컵에서 자신을 상대로 동전을 던진 번리팬에게 관중석으로 동전을 던져 징계받았다. [10] 조별리그 포함 5경기 연속 득점. [11] 굳이 해석하자면 '이건 수치야. 존나 X같은 수치라고!'란 뜻. [12] 참고로 1차전 바르셀로나 캄프 누 원정 경기에서 0대0 무승부를 거두었으나 2차전 스탬포드 브릿지 홈 경기에서 1대1로 비겨 원정 다득점 때문에 탈락하였는데, 이 경기는 최악의 오심 경기로 꼽힌다. 첼시가 PK를 받을 상황이 4번이나 있었는데 모두 무시했으며 억울한 퇴장까지 나오는 막장이었다. 다만 바르셀로나 역시 1차전 캄프 누 홈 경기에서 받아야 하는 pk나 핸드볼 선언을 받지 못하거나 억울한 퇴장을 당하는 등 전반적으로 심판의 역량 부족으로 양측 다 피해를 보았다. [13] 이 경기에서 PK가 두 개 나왔다. 첫 PK는 램파드가 차 넣었고, 칼루가 얻어낸 두 번째 PK를 드록바가 차 넣었다. 램파드가 이 날의 첫 PK를 득점왕을 노리는 드록바에게 양보해 줄 법도 했지만 그러지 않아서 당시 경기를 보던 네티즌들이 램파드를 비난하기도 했다. 물론 해당 경기는 시즌 최종전이었는데 마지막 라운드까지 2위 맨유와 끝까지 우승경쟁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 전담키커인 램파드가 차는게 더 안정적인 선택이긴 하다.(후반전에 스코어가 벌어지고 난 뒤 얻어낸 두번째 PK는 결국 드록바가 처리하기도 했고..) 경기 결과는 8-0으로 첼시가 위건을 개박살내 버린데다 드록바는 이 날 해트트릭을 했으며 득점왕을 결정지은 리그 27호 골도 램파드가 어시스트해 준 골이었으니 뭐.. 좋게좋게 마무리 됐다. [14] 경기전 두 아프리칸 공격수 드록바와 에투의 맞대결로도 관심을 모은 경기였다. 결과는 1차전 선제골 어시스트, 2차전 결승골을 득점한 에투의 판정승. 드록바는 루시우에게 지워져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15] 당장 스탯만 보더라도 29골 10어시 : 26골 3어시로 공격포인트가 10개나 차이난데다 리그 우승팀도 첼시였으며 드록바가 시즌 중반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출전으로 인해 자리를 비운 시기도 있어 순도도 드록바가 더욱 높았다. 평점도 대부분의 매체에서 드록바가 더 높은 평점을 받았다. [16] 영상을 보면 드록바가 슛을 하는 지점은 하프라인보단 골대에 더 가깝지만 상당한 중거리 슈팅. 보기 [17] 5분 28초부터 6분 10초 [18] 현재 첼시 팬들은 보아스 감독을 더 빨리 경질했어야 했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이고 있다. [19] 뮌헨의 하이라이트에도 등장한다. 뮌헨에게 PK까지 주었다. [20] 2012년 UCL 우승 후 첼시를 떠나며 라커룸 화이트보드에 드록바가 남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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