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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1 16:48:42

도화랑

1. 개요2. 도화랑 비형랑 설화3. 해석4. 관련 문서

1. 개요

桃花娘

삼국유사의 도화녀 비형랑 설화(桃花女 鼻荊郎 說話)에 나오는 인물. 도화랑은 본명이 아니라 복사꽃처럼 화사하다는 뜻의 별칭으로, 랑(娘) 자는 '~님'처럼 당대 여성으로 부르던 존칭 표현이다. 도화부인(桃花夫人)이라고도 한다.

2. 도화랑 비형랑 설화

이 설화는 이물교구설화(異物交媾說話) 중 사자교혼(死者交婚)에 속하는 설화이다. 구전되어 오기보다는 문헌에 기록되어 전승된다. 『삼국유사』 권1 도화녀비형랑조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도화랑은 서라벌 사량부(沙梁部) 소속 서녀(庶女)로, 처녀 시절부터 자색이 곱고 얼굴이 아름다운 데다 인물이 출중하기로 소문이 나 자태가 복사꽃처럼 아름답다고 하여 도화랑(桃花娘)이라 불리었다. 소문을 들은 진지왕이 궁중으로 불러와 관계를 요구하였으나 도화랑은 자신은 이미 남편이 있기에 '여자는 두 남자를 섬기지 않는 법'이라 거부하였다. 이에 진지왕은 남편이 죽은 뒤면 상관없냐 물었고 도화랑은 상관없다고 대답하였다. 신라 중대에 나타난 여자 왕족의 재혼 사례들까지 고려했을 때 당대 신라에서는 정조 관념은 있었지만 재혼이 가능했다고 해석된다.

그 해 진지왕은 왕위에서 추방되고 죽었다. 단 삼국사기에서는 쫓겨났다는 기록이 없으며 병사했다고만 나온다. 2년 뒤 도화랑의 남편이 죽자 10여 일 뒤에 죽은 진지왕의 혼령 나타나 도화랑 방으로 들어가 전날 도화랑이 왕의 요구를 거절할 때의 꼬투리(남편이 없으면 왕의 요구를 허락하겠다.)를 내세웠고, 도화랑은 왕의 명을 거스를 수 없어 결국 받아들였다. 진지왕의 영혼은 7일 동안 도화랑에게 머물고 갔는데, 도화랑은 달이 차서 한 사내아이를 낳았다. 진지왕의 사생아이자 유복자는 비형랑이라 불렸는데 진평왕이 그 신기함을 듣고 궁중에 데려다 길렀다. 도화랑이 이때 동행했다는 기록이 없는 걸 보면 도화랑은 사가에 남았거나 이미 죽은 뒤인 듯.

진평왕은 비형랑의 나이 15세에 집사라는 벼슬을 주었는데, 저녁마다 궁궐 밖으로 나가 도깨비들을 모아 놓고 놀았다. 진평왕은 그러한 사실을 확인하고 도깨비를 부려 역사를 하게 하여 귀교(鬼橋)도 하룻밤 사이에 놓게 하였으며, 길달(吉達)이라는 도깨비를 끌어 국정을 돕게도 하였다. 길달문까지 세우고 여우로 둔갑하여 달아난 길달을 비형이 죽여 버렸다. 그 뒤 도깨비들은 비형의 이름만 들어도 무서워 달아나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이 비형을 두고 지은 글을 써 붙여 잡귀를 물리치게 되었다.

3. 해석

장덕순(張德順)에 의하여 시도된 시애설화(屍愛說話)의 범주 중에서 두 번째가 이 도화녀비형랑설화류를 지칭하고 있다. 즉, 이미 죽은 연인의 혼백이 나타나서 산 사람과 동거 또는 동침하는 설화라는 것이 바로 이 설화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설화의 응집체라고 생각되는 「금방울전」에 등장하는 삼낭이라는 남편도 죽어 그 혼령이 수십 년 만에 전처 막시를 찾아와 자주 내왕하여 딸 방울을 낳는다.

이 도화녀 비형랑의 경우 이미 죽은 왕이, 불가시적(不可視的)인 존재까지도 이물로서 교구(交媾 : 남녀가 육체적 관계를 가짐)의 대상이 되며, 이러한 이물교구의 설화일수록 거기서 태어나는 제2세는 으레 비상한 인간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특정한 걸물(傑物)의 전기를 서술할 때에는 거의 이러한 경로를 따라 태어나 파란곡절을 극복하고 대성하는 생애로 끝맺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가 있다. 이러한 일련의 이물교구설화를 배경으로 태어난 주인공들을 대상으로, 또는 작중 인물로 취재하여 이룩된 작품들이 많다. 또한, 이러한 시애설화는 중국의 『수신기(搜神記)』나 『법원주림(法苑珠林)』 등의 문헌에도 기재되었기 때문에 이 설화와의 관련성이 주목된다.

비형랑은 삼국유사 특유의 신화적 존재지만 진지하게 동일인물이 의심되는 인물이 삼국사기에 존재하는데, 이는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아버지인 김용수다. 김용수는 진지왕의 아들로 진골이었지만 진평왕의 딸 천명공주와의 사이에서 김춘추를 낳았는데, 황룡사 9층 목탑 건조라는 중요한 직책을 수행하였으며 손자 김인문의 묘지명에 "조부 문흥대왕께서는 기회를 포착함에 귀신같음이 많았다(知機其神)"라고 기록되는 등 '신기 있는 사람'이라 불리었다는 점이 비형랑을 연상시킨다.

김용수는 동륜계인 진평왕이 왕위를 차지하면서 왕위계승에서 밀려났지만 진평왕의 딸 천명공주와 결혼하고 내성사신에 임명되거나 황룡사 9층 목탑 건립을 건립하는 등 각종 중요한 임무를 맡았고 진덕여왕 사후 성골이 단절되자 왕위가 아들인 김춘추에게 넘어가 태종 무열왕계의 선조가 되었다. 김용수가 이렇게 우대받을 수 있었던 건 진평왕이 끝내 아들을 갖지 못했고 정황상 진평왕의 동생인 김백반 김국반도 아들이 없어[1] 동륜계 성골은 진평왕 생전에 이미 남자가 단절되었다는 현실에서 기인한다. 거기다 진평왕의 딸인 선덕여왕 음갈문왕과 결혼했지만 자식 자체가 없었고, 조카인 진덕여왕은 결혼할 성골 남성이 없어 결혼 자체를 못했다고 여겨진다. 이에 진평왕은 승만부인 손씨를 차비(제2왕후)로 들였지만 끝내 아들을 갖지 못했고, 결국 진평왕은 동륜계가 단절되면 왕위를 이을 사륜계와의 관계를 고려해 천명공주를 김용수와 결혼시켰다고 해석된다.

이 때문에 사실 김용수는 진지왕의 왕후 지도부인 박씨의 소생이 아니라 진지왕이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서자이며, 이 때문에 궁 밖에서 유년기를 보냈다가 아들이 없던 진평왕이 도깨비(사륜계 지지세력)를 거느리던 비형랑(김용수)을 받아들였다는 해석이다. 김용수의 유년기가 명확하지 않고 천명공주 또한 서녀라는 설이 있는 데다[2] 둘을 동일시할 시 의외로 맞아떨어지는 점이 많기 때문에 도화랑은 사실 진지왕이 말년에 들인 첩(내지는 정부)이고 김용수는 도화랑이 낳은 서자라는 설이다.[3] 진지왕이 삼국사기의 기록이나 여러 정황을 보면 암군이 아닌 정상적인 왕의 모습을 보이는데도 비형랑 설화가 전해질 정도로 백성들의 평판이 나빴던 것과 즉위 3년만에 동륜계에게 왕위를 넘겨야 했던 건 궁 밖의 여성과 관계를 가져 사생아를 가진 스캔이 원인이었을 수도 있다.

정사인 삼국사기에서 서자라고 명시된 신라의 왕은 후대의 효공왕이 있다. 효공왕은 헌강왕이 사냥 갔다가 한 미녀를 보고 혹해서 수레에 태워 자기 행궁(行宮)에 데려간 뒤 야합해서 생긴 사생아라 본래는 계승권이 없지만 헌강왕이 요절하고 남동생 정강왕과 여동생 진성여왕이 각각 즉위하였지만 진성여왕이 자식을 두지 못하자 결국 궁 밖에서 살던 헌강왕의 서자를 데려와 태자로 삼았고, 후삼국시대의 혼란 속에서 진성여왕이 책임을 지고 15세의 효공왕에게 양위하였다는 것이다. 진지왕의 사생아로 태어나 처음에는 무시당했지만 동륜계가 진평왕 생전부터 단절되자 진지왕의 어린 서자를 진평왕이 궁에 데려왔다는 비형랑 설화와 별 다를 것도 없는 수준이다.

진성여왕이 효공왕을 태자로 삼을 때 “나의 형제와 자매의 골격은 남들과 다른데, 이 아이의 등에 두 뼈가 솟아 있으니, 정말로 헌강왕의 아들이다.(孤之兄弟姊妹 骨法異於人 此兒 背上兩骨隆起 眞憲康王之子也)”라는 발언을 하는데, 이는 헌강왕, 정강왕, 진성여왕의 아버지인 경문왕 성골 개념을 부활시킨 것으로 해석된다. 경문왕의 신성성을 강조하는 각종 설화, 세 자식의 이름이 모두 외자이며 '태양(日)'이 부수로 들어간다는 점,[4] 성골 여왕이었던 선덕여왕 진덕여왕의 전례를 들어 숙부 김위홍을 제치고 정강왕의 여동생인 진성여왕이 여왕으로 즉위한 점, 그렇게 서자 차별이 심한 신라 골품제 사회에서 경문왕의 직계라는 이유로 서자 계승이 용인되었다는 점은 성골이 단절되자 진골이지만 진평왕의 외손자인 태종 무열왕이 즉위한 것과 당대 신라가 전쟁으로 위태로웠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많다. 기록이 없어서 그렇지 진성여왕의 즉위 근거가 중대의 성골 여왕들이었듯 효공왕의 즉위 근거가 태종 무열왕의 아버지 김용수의 전례였을 수도 있다.

효공왕이 즉위 기간 내내 허수아비였던 건 이미 진성여왕 말기에 헌강왕의 사위인 박경휘( 신덕왕)를 중심으로 한 박씨가 권력을 장악해 효공왕을 중간다리의 허수아비로 앉혔다는 정황이 있고, 15세라는 어린 나이에 즉위한 데다 고작 27세에 죽었기 때문에 김용수-김춘추 부자처럼 자기 기반을 쌓을 여유가 없던 걸 감안한다면 효공왕과 김용수의 처지가 다른 건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모른다.[5] 신덕왕의 후기 박씨 왕조도 헌강왕의 사위 자격으로 왕위를 물려받은 거라 경문왕계 성골과 관련이 있으며, 정작 후기 박씨 왕조도 16년 만에 견훤에 의해 망해서 헌강왕의 또 다른 외손자인 경순왕 김부가 마지막 왕이 되었지만.

다만 신라의 빡빡한 골품제, 아니 고구려와 백제라도 어머니가 정말 아무것도 아닌 평민의 소생을 후계자로 받아들이지는 않는 이상[6] 도화랑이 정말로 김용수의 어머니가 맞다면 도화랑은 설화와 달리 실제로는 귀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신라는 현대의 북한이 그렇듯 수도인 서라벌에 거주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특권으로 인정되던 나라다. 사량부는 양부와 함께 김씨 족단의 본거지 중 하나로 진흥왕의 아버지인 입종 갈문왕의 근거지이자 6성 중 최씨(삼국사기) 또는 정씨(삼국유사)의 근거지이기도 한데,[7] 6두품 이하 김씨나 6성 내지는 당시 사량부에 거주하던 어느 귀족의 소생이라 볼 수 있다. 4두품부터 귀족으로 간주되는데 승만부인 손씨가 진평왕의 차비가 되었던 동시대 사례나 도화랑의 존재감을 보면 실존했을 경우 4~6두품 사이었을 듯.[8]

4. 관련 문서



[1] 그나마 월명부인 박씨와의 사이에서 진덕여왕이라는 딸이라도 있었던 국반과 달리 백반은 자식에 대한 기록 자체가 없다. [2] 선덕여왕과 달리 마야부인 김씨의 소생이라는 서술이 없고 선덕여왕(덕만)이나 사촌인 국반의 딸 진덕여왕(승만)과 이름을 공유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서녀라는 설이 있다. [3] 도화랑이 지도부인 박씨를 신화화시킨 인물이라는 설도 있지만 서자설보다 가능성이 낮다고 여겨진다. [4] 단 헌강왕의 서자인 효공왕은 '산(山)' 부수다. [5] 경문왕 향년 29세, 헌강왕 향년 20대, 정강왕 향년 20대 초반, 진성여왕 향년 30대 초반인데 근친혼을 많이 반복한 탓에 생긴 유전병으로 추정된다. 효공왕은 서자였지만 유전병을 피하지 못한 모양. 헌강왕의 외손자인 경명왕도 향년 30대로 경문왕계 특유의 요절 징크스를 못 피했다. 헌강왕의 외손자인 경순왕은 장수했지만. [6] 고구려와 백제는 왕족과 귀족의 통혼이 일반적이고 그 과정에서 백제의 흑치씨와 귀실씨처럼 분가를 창시하기도 했지만, 대신 왕비족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귀족 가문들의 내란이 벌어지는 부작용이 있었다. 특히 백제의 대성팔족이 매우 심각했다. 끽해야 산상왕이 평민으로 추정되는 후녀와의 사이에서 동천왕을 낳은 정도이며, 후녀는 신탁이라는 종교적 근거가 있었다. [7] 어째서인지 다른 성씨와 달리 사량부와 본피부만 최씨와 정씨가 다르게 기재되어 있다. [8] 효공왕의 어머니도 "2년(898) 봄 정월에 어머니 김씨(金氏)를 높여 의명왕태후(義明王太后)로 삼았다(二年, 春正月, 尊母金氏爲義明王大后)."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이쪽도 일반인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신라에서 성씨는 귀족이라도 급이 낮으면 성씨를 대놓고 쓸 수 없어서 백제 대성팔족조차 남북국시대를 거치며 후손으로 추정되는 가문들이 자기 가문의 기원을 잊어버릴 정도였는데, 김씨라고 대놓고 기재된 것으로 보아 진골은 아니라도 6두품 이하 김씨였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