徳川義直
1601년 1월 2일 ~ 1650년 6월 5일
고산케의 필두인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尾張徳川家)의 초대 당주이자 오와리번(尾張藩)의 초대 번주
1601년 1월 2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9남으로 오사카성의 니시노마루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오카메노카타(お亀の方). 아명은 고로타마루(五郎太丸). 이름은 義知(요시토모), 義利(요시토시), 義俊(요시토시), 義直(요시나오)를 사용했다.
1603년 아버지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가이국(甲斐国) 25만 석의 영지를 받았다. 그러나 요시나오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영지로 부임하지 않고, 아버지 이에야스가 히라이와 치카요시등 가신단을 보내 대리로 다스리게 했다. 요시나오는 모친과 함께 슨푸성에 기거 했다.
1606년 겐푸쿠[1]를 치렀다. 이듬해 1607년 죽은 형 마츠다이라 타다요시를 이어 형의 영지인 오와리국(尾張国) 53만석의 영지를 받아 키요스번주(清洲藩主)가 되었고, 본래 영지인 가이국(甲斐国) 25만석은 다시 반납했다. 이때도 아버지 이에야스가 가신 히라이와 치카요시를 요시나오의 가로(家老)로 삼아 대신 다스리게 했다. 요시나오 본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사후 1616년에 영지로 부임 했다.
1610년 키요스성(清洲城)을 폐성 처리하고, 나고야성(名古屋城)을 축조해 거성으로 삼았다.
1614년 오사카 전투 - 겨울의 전투에 첫 출진해서 텐노지(天王寺) 부근에 포진했다. 이듬해 오사카 전투 - 여름의 전투에도 참전했다.
1615년 아사노 요시나가의 딸 하루히메(春姫)를 정실로 맞는다. 부부간의 금슬은 좋았지만 자식은 없었다. 동년 영지를 가증(加増) 받아 62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1621년 이름을 요시나오(義直)로 고쳤다.
1650년 중풍에 걸리고 동년(同年) 에도의 저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51세. 가문은 측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도쿠가와 미츠토모가 이었다.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
노부나가의 야망 창조 PK에 첫등장.
[1]
元服 - 일종의 성인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