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 Ballond'or | ||
수상 | 2위 | 3위 |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 빌리 라이트 |
던컨 에드워즈 레몽 코파 |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던컨 에드워즈 Duncan Edward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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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36년 10월 1일 |
잉글랜드 웨스트 미들랜즈주 더들리 우드사이드 | |
사망 | 1958년 2월 21일 (향년 21세) |
서독 바이에른주 뮌헨 | |
국적 | 영국 ( 잉글랜드) |
포지션 | 수비형 미드필더, 수비수 |
신체 | 180cm, 82kg |
유소년 팀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952~1953) |
프로 팀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953~1958) |
국가 대표 | 18경기 5골 |
출장/골 | 177경기 21골[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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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던컨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기량이 있습니다. 최전방에 있으면 그는 헤딩을 할 것이고, 하프백(미드필더) 자리에선 패스를 하겠죠, 상대 팀에 누군가가 달려오고 있으면, 그는 바로 수비수로 변해서 마크를 할 겁니다. 우리 팀원들은 그의 플레이를 보고 스스로를 애송이라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
톰 피니
코치님, 다음 경기는 3시에 시작하나요? - 던컨 에드워즈, 뮌헨 참사 당시 잠깐 의식이 돌아오고
지미 머피 코치를 보고 했던 말
1936년 10월 1일 생으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에서 활약한 영국의 축구선수. 버스비의 아이들이라고 불리는 맨유유스 선수 중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재능이였으며 만 21세의 나이에 발롱도르 포디움에 들어간 재능 있는 선수였지만[4][5] 불과 몇 달 뒤 뮌헨 참사로 심각한 부상을 당하고 보름 뒤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제대로 된 경기 영상도 없고 활약상은 물론이거니와 플레이 스타일이 어떤지도 알 수 없지만, 당대의 수많은 영국의 레전드들이 남긴 평가만 보더라도 어마어마한 재능이었음을 짐작 가능하다.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뜨지 않았다면 펠레, 마라도나와 어깨를 나란히 했을 거라는 평가까지 받는 선수이다.
이 시대에는 장신으로 취급받는 180의 신장에 준수한 스피드, 단단한 피지컬과 강한 체력[6], 양발 개인기, 뛰어난 수비력과 창의적인 패스 능력, 넓은 시야와 뛰어난 득점 감각까지 두루두루 갖춘 멀티플레이어였다.
2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나 공식 경기가 200여 경기에 달하는 것만 봐도 얼마나 신임을 받았고 또 뛰어났는지 알 수 있다. 특히나 주목할 부분은 수비형 미드필더이자 수비수였음에도 당시에 200경기 동안 20골 이상을 넣은 것인데, 수비 전술이 지금처럼 조직화 되어있지 않았던 시대이긴 해도 수비수형 미드필더 겸 수비수가 이 정도 스텟을 쌓는 것은 상당히 뛰어났던 것이다.[7]
공격형 미드필더, 공격수로 뛰었던 바비 찰튼이 재능 면에서 부러워했다는 것을 보면 동 포지션이 아님에도 그러한 열등감을 느낄만큼 축구에 대한 능력 자체가 뛰어났을 것으로 추측된다. 게다가 쟁쟁한 공격수, 미드필더들을 제치고 발롱도르 3위에 선 것 또한 놀라운 성과다. 안타까운 것은 이 모든 평가들을 뒷받침해줄 그의 플레이가 남지 않은 것이다.
2. 이야깃거리
- 월드컵을 들어올린 잉글랜드의 캡틴이자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의 레전드 보비 무어가 유스팀 시절에 가장 존경하던 선수가 바로 던컨 에드워즈였다. 둘은 포지션, 등번호가 똑같다. 무어는 포백 포지션이 보편화된 이후에는 좀 더 수비적인 역할을 맡아 센터백 포지션에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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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 찰튼이 현재 맨유에서 뛰는 수비수
필 존스랑 던컨 에드워즈와의 생김새가 닮았다고 인터뷰에서 얘기한적이 있다.
사진으로만 보면 그다지 안 닮았다
- 금욕주의자로 술담배를 전혀 하지 않아 당시 맨유의 수석코치 지미 머피 코치는 때묻지 않은 순둥이 소년처럼 여겼다. 실제 성격도 꽤 천진난만한 구석이 있었다는 듯. 여가로 낚시와 카드 게임, 영화 감상을 좋아했다.
- 버스비의 아이들로 대표되는 당시 영국 축구 아이돌 스타 플레이어였지만, 본인은 거기에 신경쓰지 않고 꺼리김없이 살았다. 어릴때 쓰던 사투리도 고치지 않았고, 밤중에 자전거를 타고 시내를 활보하기도 했다[8]. 맨유에서 데뷔하고 훗날 리즈 유나이티드의 레전드가 된 조니 자일스는 던컨과 첫 만남에서 그를 찾아내지 못했다고 한다. 인기 스타 선수라서 금세 눈에 띌 줄 알았는데, 그냥 수수한 차림으로 구석에서 사과나 씹어먹고 있더라고. 조니 자일스가 보기엔 던컨은 세상의 평에 아무런 관심도 없어 보였다고 한다. #
- 위에 언급되어 있듯 당시 기준으로 체격이 걸출해서 Big Dunc 혹은 Tank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 즉흥적인 전술로 던컨을 잘 활용한 맷 버스비와 달리, 지미 머피 코치는 그를 전술에 맞춰 활용하려 했다. 던컨이 유소년 팀에 있을때 선수들이 너무 던컨에게 의존하는 경기를 하자 "쟤(던컨)한테 너무 패스하지 마라"고 이르기도 했다. 하지만 한 번은 첼시와 중요한 경기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바로 태세전환하며 "무조건 던컨에게 공을 줘!"라고 외쳤다고. 이후 던컨은 무려 10명을 제치고 골을 넣었다고 한다[9]. 그리고 그 경기에서 승리했다. #
- 1998년에 마이클 오언이 데뷔하기 전까지 가장 어린 잉글랜드 국가대표 데뷔 기록을 갖고 있었다.
- 일부 정신 나간 웨스트 브로미치 훌리건에 의해 던컨 에드워즈가 퇴비가 되었다는 고인드립의 희생양이 되기도 한다. 이 퇴비를 뜻하는 영단어 'Manure'의 발음이 생전 던컨이 속해있던 클럽의 약칭인 '맨 유'와 비슷한 탓에 아주 이전부터 이와 관련한 고인드립을 당해왔으며, 이 때문에 나이 지긋한 현지 팬들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맨 유라고 부르는 걸 치를 떨 정도로 싫어한다.[10]
3. 관련 문서
[1]
당시 수비형 미드필더로 출전하고 때때로 중앙수비수로 출전하던 선수가 이 정도 공격 포인트를 기록한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2]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역대 최고의 레전드이자
발롱도르 위너. 잉글랜드 역대 최고의 선수.
[3]
초대 발롱도르 위너.
[4]
발롱도르 역사상 20대 초반의 나이에 발롱도르 순위권에 랭크된 선수는 기껏해야
호나우두,
메시,
호날두 등 당대 축구계에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축구의 신 취급받는 선수들임을 감안한다면 수비수 내지 수비형 미드필더인 던컨이 발롱도르 순위권에 들었다는 것은 실로 경악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5]
비슷하게 21살 무렵에 미드필더 포지션으로 발롱도르 포디움에 선정된적 있는 선수가 있는데 그가 바로 축구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라고 불리는
프란츠 베켄바워.
[6]
이 시절 선수들은 흡연과 음주를 아무렇지 않게 했는데, 던컨은 금욕주의자라서 담배와 술을 절대 하지 않았다고 한다.
[7]
오버래핑의 개념이 없던 시대에 스스로 그런 플레이를 했을 정도로 창조적인 플레이를 했던 천재였다. 맷 버스비 감독도 대단한 게, 경기 중에 항상 즉흥적으로 공수 라인을 조정하여 던컨이 프리롤로 활개 칠 수 있게 해주었다.
[8]
다만 당시 규정상 자전거 라이트를 안 켜서 벌금을 냈다고 한다.
[9]
손흥민이 2019-2020시즌 번리전에서 골을 넣을때 70미터가 넘는 드리블을 하면서 제친 선수가 8명이다. 이보다 더 많았다면 단순히 역습으로 재낀게 아니라, 지공 상황에서 상대편 수비수를 갖고 놀았다고 봐야 한다. 다만 던컨의 이 기록은 프로에서 한 게 아니라 유소년 팀에 있을때 했던 거라 격은 떨어지는 편.
[10]
따라서 현지에서 맨유를 부를 때는 '맨 유나이티드'나 '유나이티드'로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