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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21:12:33

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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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기타

1. 개요



조선 시대에 광산의 소유자로부터 채굴권과 운영권을 얻어 광산을 경영하던 청부업자.

2. 상세

덕대는 광산주에게 채굴/운영권을 얻는 대가로 임대료나 채굴한 광물의 일부를 지급했다.

덕대제는 우리나라 고유의 광산운영 방식으로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상품경제가 발달하고 조선정부의 광산정책이 설점수제로 바뀐 조선 후기에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덕대제는 처음에는 물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광산을 경영하는 형태를 띠었으나, 개항기에 접어들면서 사금광업을 중심으로 덕대가 자신의 채산으로 광산을 경영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 경우 덕대는 광산주에게 임대료를 지급하고, 국가에 세금을 바친 후 남는 수익으로 부를 축적해 광업자본가로 성장할 수도 있었다. 이러한 형태의 덕대제는 평안도 등 광맥이 풍부한 곳이나 농업 이외의 노동력이 많은 곳에서 특히 활발했다.

광업자본가로 성장한 물주나 덕대가 경영하는 광산에서는 점차 하청제도 발달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광산경영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생산과정을 분리해 광물을 캐는 일은 하청을 주고 그것을 정선하는 작업과정은 직접 운영하는 형태를 흔히 볼 수 있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일본인들이 대규모로 광산소유자로 등장함에 따라 대부분의 덕대는 독립경영자로서의 지위를 상실한 채 이들의 고용인 또는 하청업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특히 1930년대 일제의 독점자본이 대부분의 광산을 소유하면서부터는 임금노동자를 고용해 광산을 직접 경영하는 방식이 보편화되어 덕대제는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국가에 귀속된 광산의 개발에도 덕대제가 부분적으로 활용되었다.

덕대제는 조선 후기 이래 광업에 나타나는 자본주의적 발전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덕대가 운영하는 많은 광산이 공장제 수공업의 단계에 이르렀으나 일본자본의 침투로 그 이상 성장하지는 못했다.

3. 기타

덕대라는 말에는「광산에서, 한 구덩이의 작업을 감독하는 책임자」라는 뜻도 있다.

덕대(德大)는 아무래도 여러 사람을 통솔하는 위치이며 활동했던 시기가 지금으로부터 한참 과거이다보니(남성 인권이 지금 시대보다 훨씬 강했던 조선시대였으니까), 체격이 비교적 건장한 남성들로 채용 되었을 것이다(땀냄새 나는 남자들이 땀 뻘뻘 흘리며 일하는 곳이다 보니, 관리자는 좀 과장해서 마동석 급 체격은 되어야 광산이 원활하게 운영되었을 것이다). 결국 거기에서 착안하여 지금의 '떡대'(덩치 큰 남자)라는 단어가 유래되었다는 설(說)이 있다. 즉, 덕대(德大)들은 대부분 덩치가 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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