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 그로스도이칠란트 기갑척탄병사단 Panzergrenadier-Division Großdeutschla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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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 | 엠블럼 | |
창설일 | 1939년 6월 14일 | |
해체일 | 1945년 4월 25일 | |
소속 | 독일 육군 | |
상급부대 | 제162보병사단 | |
사단 모토 | 신, 명예, 조국(Gott, Ehre, Vaterland) | |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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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 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독일 국방군 육군의 최정예 사단이다.2. 사단 역사
2.1. 창설과 개칭
1923년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바이마르 공화국 대통령을 사열하는 베를린 근위연대
일명 대독일 사단으로 알려진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은 그 역사가 1921년 창설된 육군 베를린 근위연대 'Wachregiment Berlin'로 부터 시작되었다. 초기 베를린 근위연대는 바이마르 공화국 육군의 7개 사단에서 각각 1개씩 보병 중대를 파견하는 방식으로 7개의 중대가 모여서 이루어졌는데, 수도 베를린의 주요 군사 퍼레이드 행사나 정부 기관 경비 임무를 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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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힌덴부르크 사망 직후 히틀러에게 전군을 대표하여 충성을 맹세하는 베를린 근위연대 |
2.2. 대독일연대 시절
그로스도이칠란트 보병연대는 1939년 9월 진행된 폴란드 침공 당시 침공군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1940년 5월 10일 프랑스 침공 당시 주공에 속하는 A집단군 제14군단에 배속되어 아르덴 산맥을 통과하였다. 그로스도이칠란트 연대는 A집단군 공격로를 열기위한 목적으로 룩셈부르크와 벨기에 침공의 주역으로 활약하였는데 공수부대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로스도이칠란트 연대는 3인용 경비행기를 활용해 벨기에에 공수작전을 펼치는 미친 짓을 벌여 성공하였으며, 5월 13일 스당 전투에서 A집단군의 선두였던 제1기갑사단의 뫼즈강 작전에 앞서 스당의 주요 요세를 무력화시키면서 A집단군의 성공적인 스당 돌파를 이끌어내는 큰 공을 세웠다.성공적인 뫼즈강 도하와 스당 함락 이후 프랑스군 종심으로 뚫고 들어가는 구데리안의 19 기갑군단의 측면과 스당 교두보를 엄호하는 임무를 맡아 10기갑사단과 함께 5월 15일 스당 남쪽에 위치한 스톤 고지(stonne)를 점령하고 17일까지 프랑스 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여 승리하였다. 스톤 고지 전투에서 그로스도이칠란트 연대의 공은 지대했는데 그로스도이칠란트 연대와 10기갑사단의 스톤 고지 점령으로 프랑스 군은 스당을 돌파한 독일군의 주공이 스당 남쪽에 위치한 파리와 마지노선 일대로 향하게 될 것이라고 착각하게 만들어주었고 그 덕에 19기갑군단은 성공적으로 프랑스 종심 깊숙히 돌파하여 낫질작전의 성공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로스도이칠란트 연대가 입은 피해는 상당했다. 당시 독일군의 주력 대전차포인 Pak 36은 프랑스의 주력 전차인 샤를 B1 Bis를 격파하기엔 역부족이었는데 스톤 고지에 배치된 그로스도이칠란트 보병연대의 대전차포 중대가 보유한 대전차포는 고작 12문이었고 그 중 스톤고지에 배치된 대전차포는 고작 9문이었다. 16일 야간 급파된 16보병사단과 24보병사단이 도착하여 임무를 교체하기 전까지 오기까지 그로스도이칠란트 보병연대는 총 9번에 달하는 혈투를 벌여 총 33대의 프랑스군 전차를 격파했다. 그 대가로 그로스도이칠란트 연대는 총 570명의 사상자를 내었는데 프랑스 기갑부대의 정면 공격을 받았던 대전차중대의 경우 중대가 보유한 12문의 대전차포 중 6문을 잃었고 12명 전사, 65명 부상으로 중대 전력의 50%가 넘는 피해를 입었다.
거의 궤멸에 달한 피해를 입었던 그로스도이칠란트 연대는 잠깐의 휴식을 취한 이후 센 강변으로 공격을 주도하였고 됭케르크 포위 작전에도 참여하였다. 이후 프랑스 중부를 향한 독일군의 적색 상황 작전에서 동쪽 축선을 배정받아 리옹을 함락시켰다. 6월 21일 콩피에뉴 숲에서 열린 프랑스의 항복 문서 조인식에 의장대로 참여하였다. 이후 바다사자 작전 참가부대로 셀자스에 주둔했지만 바다사자 작전 취소 이후 지브롤터 공략 작전이었던 펠릭스 작전 참가 부대로 선정되어 프랑스 남부 지방에 배치되었다. 하지만 펠릭스 작전은 스페인의 프랑코가 독일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며 무효화되었다.
1941년에는 유고슬라비아 침공 당시 후속 부대로 유고슬라비아 패잔병을 소탕하는 역할을 맡았던 그로스도이칠란트 연대는 차량화 보병연대로 승격되어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에 중앙집단군 제2기갑집단 제46기갑군단 배속으로 민스크, 키예프 전투 등에 참가하며 공을 세웠다.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툴라까지 진출하며 모스크바 포위망 남쪽을 구성했지만 12월 7일 소련군의 강력한 반격에 큰 손실을 보고 후퇴하였고, 12월 22일 오카 강 방어선을 구성하였지만 소련군의 강력한 공격에 그로스도이칠란트 한 개 중대의 전투력이 소대급으로 떨어질 정도로 엄청난 손실을 보았다. 이후 1942년 1월 20일 오카 강 교두보에서 볼로그다주로 이동하여 지역 공격작전에 참여하였다가 1942년 2월 21일 부대 재편성을 위해 예비대로 돌려졌다. 이때까지 그로스도이칠란트 연대가 입은 피해는 1000여명 전사 및 실종, 3000명 부상으로 사실상 궤멸 수준이었다.
2.3. 대독일사단으로의 개편과 소멸
1942년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 주요 이동 및 전투[1]
1942년 2월 28일 완전히 궤멸되어 엉망진창인 연대를 재편성하기 위해 기존의 대대들을 해체하고 브란덴부르크 노이루핀에서 징집된 2개의 대대를 추가 편성한 다음 오렐로 이동하였다. 이후 1개 전차대대를 배속받아 4월 1일 차량화보병사단으로 승격되면서 우리가 잘아는 '대독일사단' 즉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렇게 재편성된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은 B집단군 예하 48기갑군단 소속으로 청색 작전에 참여하여 돈 강을 도하, 보로네시를 점령한 이후 빠르게 남하하여 로스토프 방면 전투에 참여한 후 8월 중순 예비대로 전환, 우크라이나 서부로 이동해 보충을 받았다.
1942년 9월에는 르제프 전투 방어군으로 편성되어 화성 작전에서 소련군의 후퇴로를 공략하여 큰 공을 세웠으나, 가장 격렬했던 전투에서 소방수로 투입되었기에 손실이 적지 않았으므로 12월 말 잠시 후방으로 물러나 손실을 보충받았다.
손실을 보충받은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은 겨울폭풍 작전 실패 이후 강화되는 소련군의 공세를 방어하기 위해 남부전선의 하르코프 방면으로 이동하였고,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소련군을 맞아 용감히 싸워 하르코프 재점령에 공을 세웠지만 손실이 극심했던 사단은 후방으로 철수하여 손실을 보충받았다.
1943년 5월 19일에는 그로스도이칠란트 기갑척탄사단으로 이름과 편제가 바뀌었고, 제48기갑군단에 배속되어 쿠르스크 전투에서 남쪽 방면의 주공을 맡았다. 이때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은 티거 15대, 제10기갑여단으로 부터 지원받은 194대의 판터 등 어마어마한 기갑전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두 부대 장교단간 갈등이 터지는 것을 시작으로 공세는 소련 제67근위소총사단과 제3기계화군단의 저지선에 막혀버렸고, 이윽고 10기갑여단의 판터들과 티거들이 소련 공군의 공습과[2] 고질적인 신뢰성 문제로 퍼지면서 별달리 큰 공을 세우지 못했다.
쿠르스크에서의 충격적인 패배 이후 대독일사단은 잠시 중부집단군에 편성되었다가 다시 48기갑군단으로 배속되어 드네프르 강에서 소련군의 반격에 무너지는 독일군의 전선을 지탱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전선 전체에 걸쳐 붕괴되는 독일군을 사단 하나의 힘으로 막아내는 것은 역부족이었기에 소방수라는 별명을 얻게 된 그동안의 활약이 무색하게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후퇴 과정에서 소련군에게 후미를 공격당해 적지 않은 피해를 받았다.
1944년에는 자포로제 지역으로 이동하여 전투를 벌였고,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 당시 포위망에 갇힌 독일군을 구출하기 위해 사단의 일부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1944년 5월 17일 주간 뉴스 715호에 보도된 루마니아 전선에서의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
보도에 등장하는 많은 양의 5호 전차 판터와 6호 전차 티거로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에 나치 독일이 얼마나 신경을 많이 썼는지 느낄 수 있다 [3]
보도에 등장하는 많은 양의 5호 전차 판터와 6호 전차 티거로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에 나치 독일이 얼마나 신경을 많이 썼는지 느낄 수 있다 [3]
우크라이나 남부 방어선이 무너진 이후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은 핫소 폰 만토이펠 남작의 지휘 하에 플로이에슈티 유전지대를 품고 있는 루마니아를 향해 쏟아지는 소련의 공세를 방어하여 독일군의 남부전선을 보호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1944년 6월 22일 개시된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중부집단군이 완전히 와해되어 동프로이센 지역이 위협받게 되자 독일군 최고사령부 명령에 따라 1944년 8월 리투아니아 전선으로 이동하여 동프로이센의 동쪽 끝인 메멜을 방어하기 위한 교두보에 배치되었고, 수차례 소련군의 공격을 저지하는 큰 공을 세웠지만 소련군의 어마어마한 물량과 전술적 발전으로 인해 상당히 큰 피해를 입었다. 이에따라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은 1944년 말 해상을 통해 쾨니히스베르크로 퇴각하였다.
그동안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은 국방군을 통틀어 최고의 정예부대로 인정받아왔기 때문에 루마니아 전선을 방어하던 1944년 초까지는 손실을 보충받을 수 있었으나, 이 시점에 이르러서는 연합군의 전략폭격이 독일의 산업역량을 마비시켰고 그나마 남은 힘도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래 서부전선으로 분산되기 시작하면서 그로스도이칠란트같은 최정예 부대조차 손실을 완전히 보충받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결국 1945년 1월 28일 소련군의 비스와-오데르 공세에 동프로이센 방어선이 붕괴되며 메멜이 함락되었고,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은 지연전을 벌이며 선박을 긁어모아 덴마크로 필사적인 탈출을 감행하나 쾨니히스베르크를 향한 소련 육군의 공세와 발트해에서 협공을 가하는 소련 해군의 공격으로 인해 사단으로서의 기능을 잃고 와해되고 만다. 미처 탈출하지 못한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의 일부는 4월 25일 필라우(Pillau)[4]에서 동프로이센 지역의 독일군 패잔병들과 함께 최후의 저항을 했지만 완패하여 완전히 소멸된다. 이후 병사들은 각자 흩어져 소련군의 포로가 되거나 엘베 강을 넘어 연합군의 포로가 되었다.[5]
3. 특징
대독일사단은 연대 시절부터 수도 베를린을 방어하는 정예사단으로 많은 대우를 받았으며, 그 상징성으로 인해 최전방으로 간 이후에도 베를린에 1개 보병 대대를 수도경비대대로 남겨 두었다. 이 수도경비대대는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당시 쿠데타 측에 휘둘릴 뻔했으나, 대대장 오토 에른스트 레머 보병 소령이 위조된 명령에 따라 파울 요제프 괴벨스 장관을 체포하러 갔다가 되려 볼프샨체에서 총통이 직접 건 전화를 받은 뒤 진압군 주력이 되어 쿠데타를 진압, 충성심을 입증했다.우선 대부분의 독일 육군 부대들의 경우 모병을 자신의 연고지역에서만 할 수 있었지만 대독일사단은 독일 전체에서 모병을 할 수 있었다. 이는 독일 제국군 시절 베를린과 황제를 보위하던 '근위군단(Gardekorps)'의 전통을 이은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잊혀진 병사'로 유명한 기 사예르이다. 프랑스인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를 둔 알자스 로렌 지방 출신 기 사예르는 프랑스인 혼혈임에도 불구하고 대독일사단에 들어갈 수 있었다. 몇몇 밀덕들은 대독일사단의 모병 특권을 들어 부대원을 모집할때 독일 전국에서 나치당에 충심이 높은 사람만 뽑았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타 사상을 가진 자인지에 대해 사상검증은 있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국가사회주의를 제외한 사상을 가진 자들을 탄압하기 바빴던 나치 독일 특성상 전군에 동일한 사항이었고 별도의 시험을 받아야 했던 해군, 공군과 달리 대독일사단의 입대 절차는 독일 전 관구에서 병력을 모집했다는 것을 제외하면 타 육군 사단과 동일했다. 전술된 기 사예르가 대독일사단으로 재배치되는 과정을 보면 그냥 보병 전과 이후 재배치 된 것일 뿐이다. 즉 대독일사단은 우리나라로 따지면 수도기계화보병사단 포지션으로 보면 된다.
또한 최정예부대로서 육군 부대들 중 보급 최우선 순위를 차지했는데, 힘러의 입김 때문에 대부분의 중기갑전력이 SS 기갑부대로 돌아가 4호 전차나 판터, 돌격포로 버티던 일반적인 육군 사단들과는 달리 티거를 비롯한 중전차를 운영하는 501중전차대대 3중대, 504중전차대대 3중대가 대독일사단 전차연대로 편성되는 등 기갑척탄사단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을 만큼 강한 전력을 자랑했다. 이 때문에 대독일사단은 가장 치열한 격전지마다 소방수로 투입되었고, 매번 적지 않은 피해를 보았기 때문에 후방에서 재편성 받는 시간이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대독일사단은 독일 육군 최고의 영예 중 하나인 부대 수장을 부여받았다. 독일군 부대 중 부대 수장을 수여받은 부대는 손에 꼽혔고 무장 친위대 사단들에게 총통의 최정예라는 자긍심을 주기 위해 지급 받았는데 대독일사단은 그 영예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견장에 사단명의 약어인 GD 두 글자를 조합한 부대 배지[6]를 달 수 있는 특권을 받았고, 그 덕에 국방군 기록사진에서 대독일사단의 장병들은 수장과 견장으로 그 소속을 알 수 있다.
1944년 4월 루마니아 전선에서 지도를 보며 통화하는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 대위. 수장과 배지가 선명히 보인다. 또한, SS와 달리 수장을 오른팔에 부착했다.
4. 미디어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의 프레드리크 촐러 일병이 대독일사단 소속 병사로 등장한다. 무려 240여명의 미군을 3일 동안 사살한 영웅이라고.[7]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작전명 발키리의 후반부에서 쿠데타 세력의 명령에 따라 베를린 주요기관을 접수하고 나치정권의 주요간부들을 체포하는 부대가 그로스도이칠란트사단 수도경비대대이다. [8]
[1]
3월 오카 강변
오렐 점령 이후 6월 28일
청색 작전 개시와 동시에
돈강을 도하하고 그 이후
남부집단군 지원을 위해
드네프르강과 돈강 하류지역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르제프 전역이 급해지자 중부전선으로 재배치 되어 9월부터 12월까지 활동하는 것을 볼 수 있다.
[2]
독소 전쟁기간동안 소련공군은 독일공군의 밥 노릇을 면치못했지만 1943년 시점부턴 누적된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소련 공군의 질적향상이 이루어졌었다. 여기에 소련의 엄청난 공업력이 시너지를 이루며 어마어마한 양의 항공기를 생산해낸 소련공군은 수적으로 열세였던 독일 공군의 작전 공백을 틈타 독일 육군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3]
1분 15초 핫소 폰 만토이펠 당시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장을 볼 수 있다. 왼쪽 팔목에 그로스도이칠란트 소매 밴드를 착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4]
現 러시아
칼리닌그라드 주 발티스크
[5]
기 사예르의 회고에 따르면 운 좋게 해상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하여 덴마크에 도착하였고 이후 영국군에게 항복하여 귀향하였다. 프랑스에서는 독일군에 입대한 병사들은 반역죄로 총살해버렸지만 기 사예르는 어머니가 독일인이었기에 프랑스군에서 복무하는 조건으로 살아남았다고 한다.
[6]
장교는 금색, 부사관은 은색 철제, 병들은 견장에 직접 수놓거나 별도로 자수된 토시형 견장 형태를 썼다. 병의 포제 배지들의 글자색은 자기 병과색 실로 자수놨다.
[7]
사소한 오류로 위 문서를 읽다 보면 알겠지만 대독일사단은 동부전선에서 활동한 부대로 촐러 일병이 대독일사단으로 소속을 옮기지 않은 이상 대독일사단의 일원으로는 240명의 미군을 죽일 수는 없었다.
[8]
결국 쿠데타 세력이 아돌프 히틀러 암살에 실패하면서 히틀러의 명령으로 쿠데타 세력을 체포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