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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10 13:11:41

달보석

1. 개요2. 상세3. 해설

1. 개요

The Moonstone. 윌리엄 윌키 콜린스가 1868년 발표한 추리소설.

2. 상세

도입부는 1799년 문제의 보석이 영국인의 손에 들어가는 과정을 그리며 본격적인 사건은 1848~49년을 배경으로 진행된다.

국내 번역명을 살펴보면 푸른숲주니어에서 나온 청소년용 축약판은 영문 그대로 "문스톤", 현재로선 유일한 완역본인 동서 미스터리 북스의 일어중역판은 "월장석 "으로 번역했다. 보석류 중 하나인 Moonstone을 가리키는 한국어/일본어 단어가 월장석이기 때문인데 문제는 이 소설의 중심이 되는 보석 'Moonstone'은 이름만 그럴 뿐 문스톤이 아니라 아주 커다란 다이아몬드다. 즉 오역. 참고로 중국어 번역판 제목은 월광석 月光石이다.

레이첼 베린더 양의 생일 선물로 그녀의 어머니와 사이가 안좋았던 사촌(즉 레이첼의 삼촌)이 달보석을 보내온다. 노란 빛을 띈 커다란 다이아몬드인 달보석은 레이첼의 삼촌이 인도에서 약탈해 온 것인데, 그는 이 달보석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고 싶어 안달인 지경.

이 달보석을 전달하러 온 프랭클린 블레이크는 레이첼의 생일날밤 달보석이 사라지자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런던의 수사과장 커프를 불러온다.

T.S 엘리엇에게 "영국 최고, 최대의 추리소설"이란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커프는 영국 추리소설 최초의 수사과장으로 불린다. 이 소설이 후대의 추리소설에 끼친 영향이나 선보인 트릭을 보면...

...등이 꼽힌다. 일부는 에드거 앨런 포우가 이미 썼던 요소지만 달보석은 장편이니만큼 더 세세하게 표현된다.

당시 인도에서 영국에 저항하는 세포이 항쟁이 일어나 인도인들을 부정적으로 보는 움직임이 대세였는데( 찰스 디킨스도 인도인을 저열한 인종이라고 표현했다.), 본작에서는 인도인들의 종교를 왜곡하지 않고, 서로 증오하는 영국인들과 달리 달보석을 찾기 위해 힘쓰는 인물들로 그렸다(물론 달보석을 두고 경쟁하는 관계이긴 하지만). 또 도둑 출신이었던 하녀에도 동정적인 시선을 보이는등 사회/인종적인 면에선 상당히 진보적인 편.

스퀘어 에닉스에서 iOS용 게임으로 발매했다. 앱스토어에 흔한 숨은 그림 찾기식 어드벤쳐. 2012년도답지 않은 3D 그래픽 오프닝(...)에 외주를 줬는지 미려한 구석은 없는 캐릭터들이 일품(...)이다.

3. 해설

미스테리소설과 범죄 문헌의 수집에서는 세계에 으뜸간다고 자처하는 엘러리 퀸이 진귀한 고전으로 세 가지를 들고 있다. 그 첫째는 《 에드거 앨런 포 산문소설집》으로 '모르그 거리의 살인'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 단편이 단행본으로 되어 나온 최초의 책이다. 다음은 《포 이야기집》이며, 세 번째는 《월장석》의 초판본으로서 저자로부터 디킨즈에게 바쳐진 헌정본이다. 이 책 맨 앞 페이지에 '찰즈 디킨즈에게, 윌키 콜린즈로부터'라고 쓴 커다랗고 유려한 필적이 남아 있다. 포우로부터 비롯된 미스테리소설의 형식이 계승 발전된 데에는 이 두 사람의 역할이 실로 크다. 그것을 뚜렷하게 이야기해 주고 있는 이 헌정본이 시조(始祖) 포의 기념할 만한 저작과 나란히 언급된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일 것이다.

윌리엄 윌키 콜린즈(William Wllkie Collins)는 1828년 1월 8일에 런던 더비스트릭 스퀘어에서, 왕립학사원 회원이며 고명한 풍경화가인 윌리엄 콜린즈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계통적인 교육을 받지 않고 여러 해 동안 이탈리아에서 살며 아버지로부터 그림 공부를 배우고 또한 여러 곳을 여행하며 자랐다. 아버지는 그림에 대한 아들의 재능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힘써 가르쳤는데, 윌키는 여러 해 동안 열심히 화필과 친하게 지냈으면서도 화가가 되지 않고 오히려 둘째아들인 찰즈가 아버지의 염원을 계승했다.

그는 한때 상인이 되려고 차(茶)를 취급하는 상점에 점원으로 들어가기도 했고, 나중에는 법률가를 지원하여 링컨 인에 적(籍)을 두고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이때가 자신의 앞날을 다시 결정지어야 할 중대한 시기였는데, 이 즈음 예술가로서의 타고난 재질에 차츰 눈을 뜨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수기에 의하면 17살의 윌키가 어찌할 바를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 듯 했으므로 E.M. 워드를 초청하여 서로 이야기를 나누게 해주었다. 워드는 뒷날 로열 아카데미 회원이 된 역사화가로, 윌키보다 8살 위였으며 윌키의 참된 벗이 되어 주었다. 그즈음 워드가 14살 난 소녀에게 사랑을 느꼈으나 결혼을 허락받지 못하는 것을 보고 윌키는 자유결혼의 열렬한 주창자가 되었다.

아버지가 1847년에 세상을 떠나자 콜린즈 형제는 어머니를 모시고 워드네 집에 가까운 블랜드포드 거리로 이사했다. 동생 찰즈가 화단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한 무렵으로 밀레, 로제티 형제, 홀먼 핸드, 플리스 등 젊은 예술가가 매일같이 찾아와 유쾌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콜린즈는 워드와 함께 아마추어 연극에 야심을 품고 골드스미드며 젤리단의 작품을 공연한 일도 있었다.

1848년 11월에 《아버지의 추억》이라는 윌리엄 콜린즈 전을 출판했다. 24살의 청년으로서는 참으로 훌륭한 필치로 써 내려가 호평을 받았기 때문에 그는 이에 힘입어 작가가 되려고 결심했다. 그리하여 소년 시절 아버지와 함께 2년 동안 이탈리아에서 지내면서 쓰다가 만 채로 두었던 소설을 완성시켰다. 그것이 《안토니아(Antonina, or the Fall of Rome, 1850)》로, 첫작품의 세평은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디킨즈와 한평생을 두고 오간 우정을 맺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화가인 오거스터스 에그의 소개로 그는 1851년에 디킨즈가 주재하는 아마추어 극단에 가입하였다. 그는 극단의 일원으로 무대에 서면서 늘 디킨즈의 일을 도왔다. 콜린즈는 배우뿐만 아니라 디킨즈의 기획가 역할을 했으며, 또한 문학상으로도 서로 영향을 미친 듯이 보인다. 디킨즈의 《올리버 트위스트》와 《버너비 램지》는 물론, 그에 이은 《맹우(盟友)》 및 그밖의 두세 작품은 플롯이며 디테일에 있어 콜린즈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한편 콜린즈의 세 번째 저서 《래이 씨의 돈상자(Mr. Wrays, 1852)》는 분명 디킨즈의 작풍(作風)에 따른 것으로 여겨진다. 디킨즈를 알고 나서부터 그는 법률과 회화에 흥미를 잃고, 연극 공연과 여행을 하며 여가가 나는 틈틈이 창작의 붓을 들게 되었다. 1853년부터는 에그도 함께 동행하여 스위스로부터 이탈리아를 한 바퀴 돌고 돌아와, 1855년에 디킨즈의 집에서 '세계에서 가장 작은 극장'을 열어 콜린즈의 작품인 《등대지기》를 공연했다.

그 즈음 디킨즈는 '하우스홀드 워즈'라는 잡지를 경영하고 있었다. 1855년에서 1857년에 걸쳐 콜린즈의 작품은 거의 모두 이 잡지에 발표되었다. 그 중의 한 편인 《이상한 침대》는 그의 첫 범죄소설이면서 뛰어난 작품으로 평해졌다.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게 해준 《절대비밀(The Dead Secret)》은 그 잡지에 1857년 1월부터 6월까지 연재되었다. 동생도 신진화가로서 화단의 인정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저택은 늘 수많은 예술가들로 가득차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너그럽고 슬기로운 부인이었으므로 찾아오는 이들의 존경과 사모를 받았다.

콜린즈의 대표작 《흰 옷의 여인(The Woman in White, 1860)》은 디킨즈가 편집하는 주간문예지 'All the Year Round'에 《두 도시이야기》의 뒤를 이어 1858년 11월 26일부터 연재되었다. 그리고 그에 앞서 '우리 잡지에는 늘 독창적인 장편소설을 연재하려고 기획하고 있다. 그 두 번째 작품으로 《흰 옷의 여인》을 소개하는데, 반드시 《두 도시 이야기》를 능가하는 환영을 받아 영국 문학에 새로운 자리를 차지할 것을 확신한다'라는 예고가 실렸었다.

《흰 옷의 여인》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디킨즈는 더 이상 할 수 없을 만큼의 격찬을 퍼붓고, 서컬레는 밤새워 이 작품을 읽었다고 한다. 스윈버언과 피츠제럴드도 칭찬하고, 이 작품을 흉내낸 출판물이며 그 이름을 딴 외투와 보닛이 유행하기도 하고 화장품이 나오기도 했다. 게다가 '흰 옷의 여인' 왈츠며 댄스까지 널리 유행되었다. 이 작품은 1860년에 완결되어 세 권의 책으로 간행되었는데, 굉장히 많이 팔렸다고 한다. 연극으로 상연하자는 이야기도 나와 구체화되기까지 했으나, 어떤 사정으로 말이암아 1871년에 이르러서야 올림픽 극장에서 공연되었다.

이 작품에 대한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다. 화가인 밀레의 아들 G H 밀레가 집필한 《밀레의 생애와 전기》에 나와 있는 것인데, 1850년대 어느 날 밤의 일이었다고 한다. 밀레는 콜린즈 저택에서 있었던 모임에 참석했다가 돌아가는 길이었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그를 배웅하느라 윌키와 찰즈 두 사람이 그 즈음에는 아직 멀리 떨어진 변두리였던 북런던의 어둡고 쓸쓸한 길을 함께 걷고 있었다. 달빛이 밝은 여름날이었다. 별안간 가까이 있는 어느 집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세 사람은 저도 모르게 발길을 멈추었다. 그 집의 문이 열어젖혀지며 얇고 흰 옷을 입은 미인이 뛰쳐나왔다. 놀라움과 공포의 표정을 띠고 있었는데, 세 사람이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사라지듯이 그늘 속으로 숨었다.
"아름다운 여인이로군" 하고 밀레가 중얼거렸다.
"어떤 사람일까? 가만히 있을 수 없어"
하며 콜린즈는 여인이 사라진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아무리 기다려도 그가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날이 되어 물어 보았으나 그는 아무 이야기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끈질기게 물어 본 끝에야 가까스로 다음과 같은 사정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에 의하면, 그 여인은 사회적 지위가 있는 훌륭한 집안의 사람인데 어떤 사정으로 남자의 유혹에 넘어가 여러 달 동안 무서운 협박을 받으면서 감금되어 있었다. 그날 밤에도 그 남자가 부지깽이로 때리려고 했으므로 정신없이 도망쳐 나온 것이었다.

케네스 로빈슨의 《콜린즈 전(1952)》에 의하면, 이 이야기가 밀레의 집에서 베풀어진 만찬회에서 돌아가다 일어난 일로 되어 있다. 아무튼 한평생 정식으로 아내를 맞아들이지 않았던 콜린즈가 이때 이후로 어떤 여인과 동거하였는데, 바로 '흰 옷의 여인'이었다고 한다. 디킨즈의 누이가 동생 찰즈와 결혼하였는데, 그녀는, 윌키의 동거 여인과 '흰 옷의 여인'은 동일 인물이라고 말하였다.

그가 동거했던 여인 캐롤라인 글레이브스는 1868년에 조제프 클로와 결혼하였으며, 콜린즈도 그 결혼식에 참석하였다. 그 무렵 콜린즈는 마사 랜드와 함께 살며 네 아이를 두고 있었는데, 그 마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1870년에 캐롤라인이 다시 콜린즈의 집으로 되돌아와 한집에서 살았다. 빅토리아 왕조의 문학가들에게 흔히 있었던 일인 탓인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흰 옷의 여인》은 미스터리라기보다 스릴러 소설이었는데, 이 한 작품으로 윌키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다음 작품인 《No Name》은 1862년 3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 같은 잡지에 연재되었다가 세 권으로 출판되었을 때 3천 파운드의 인세를 받았다. 이 작품은 그다지 평판이 없었다.

콜린즈는 어머니며 동생과 헤어져 새집으로 옮겼는데, 전부터 앓던 심장병으로 회합에도 참석하지 않고 1862년에는 전지요양을 했다. 정양과 사색으로 2, 3년을 보낸 다음 1865년에 '콘힐'지(誌)에 《아마델르(Armadale)》를 연재하였다. 뉴 본드 거리에 미용원을 열고 젊음을 되찾아 준다는 간판으로 상류사회 부인들을 속이다가 마침내 법정에 서게 되어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던 레이첼 부인을 모델로 한 작품으로, 무서운 꿈을 꾸고 그 꿈이 차례로 실현되어 가는 운명의 공포를 그린 서스펜스 소설이었다.

《월장석(The Moonstone)》은 '올 더 이어 라운드'에 1868년 첫무렵부터 연재되어 그해 7월에 세 권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콜린즈는 그 즈음 몸과 마음이 다 함께 피로하여 잡지 연재 중 3분의 1에도 이르지 않았을 무렵부터 이제까지 체험한 적이 없는 무서운 고통에 괴로워하고 있었다고 이 작품의 머리글에서 말하고 있다. 어머니는 내일을 알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었고, 그 자신은 류머티즘으로 두 다리의 자유를 잃었다. 그리하여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 틈틈이 구술(口述)을 계속했다. 그 대부분이 독자들의 흥미를 크게 불러일으킨 '클라크 양의 이야기'였다고 한다.

T.S. 엘리엇이 이 작품을 평하여 '가장 빨리 씌어진 가장 짧고 가장 뛰어난 소설'이라고 칭찬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또한 도로시 세이어즈 여사도 이 작품의 웅대한 스케일과 치밀한 구성과 등장인물의 리얼한 묘사와 다양성을 들며 '이제까지 없었던 가장 훌륭한 추리소설'이라고 칭찬하고 있다.

이와 반대로 레지 메사크는 《월장석》을 미스테리소설로 인정하지 않으며, 더글러스 톰슨도 잊을 수 없는 감동의 책이라고 말하면서 미스테리소설로 여기는 데에는 조금 고개를 갸웃하고 있다. 추리소설이라면 수사활동이 제1의 표준으로서 묘사되어 있어야만 하는데, 커프 형사부장의 수사는 중대한 착오를 범하여 엉뚱한 사람을 의심하고 있다. 그러므로 클래식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는 주장인 것이다.

이에 대립하는 의견으로서 프랑소아 포스커는 추리소설이기는 하지만 '과도기적'인 추리소설이라는 중재설(仲裁設)을 내세우고 있다. 두 사람의 연인이 어떤 오해로 사이가 멀어지게 되어 버렸다는 감상적인 테마에 탐정 행위가 깃들여지는 것은 그 즈음으로서도 낡고 희극적인 감상소설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결점에도 불구하고 커프 형사부장의 심문이 꽤 교묘하며, 사건의 해결만을 그려 설명하지 않고 독자의 머리를 해결을 위하여 활동시키는 방법으로 보아 훌륭한 추리소설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헤이클래프트는 콜린즈가 가보리오와 마찬가지로 그 즈음 존재했던 소설 형식 속에 추리적 요소를 담은 작품을 써낸 것일 뿐 추리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창조했다고 할 만큼은 아닌 점에서 두 사람은 서로 비슷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체로 콜린즈의 작품은 세상의 주목을 받았던 사건이나 인물에서 그 주제를 얻고 있다고 말해지는데, 《월장석》도 그 예외가 아니었다. 1860년에 로드 힐 하우스에서 불가사의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의 수사를 맡은 위처 경감은 세탁물 장부와 페인트가 묻은 나이트가운에 추리의 바탕을 두어 콘스탄트 켄트라는 여자의 유죄를 결정했다. 경감의 이론은 그 무렵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어, 그는 실의에 잠겨 은둔했다. 5년 뒤 범인이 자백을 하여 사형집행을 받았는데, 콜린즈는 그로부터 8년이 지나 실제의 사건을 유용하게 사용한 것이다. 이 위처 경감이 《ㅎ》에서는 커프 형사부장의 모델이었다.

포스커는 캔디 의사의 조수 제닝즈와 클라크 양을 심심한 기계인형이라고 평하고 디킨즈라면 생생한 인물을 등장시켰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헤이클래프트는 베털레지의 재미는 디킨즈의 성격 묘사에 버금가는 것으로서 제닝즈를 비롯하여 추리소설 인물묘사의 모범이라고 할만큼 생생한 인간을 그려내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작품의 특징은 실로 독창적인 범인의 의외성과 서스펜스의 교묘함에 이야기적인 흥미와 이론적인 추리가 융합되어 추리소설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겼다.
홀리즈가 《월장석》을 집필하는 도중에 그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그는 류머티즘과 아편 중독으로 신체적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그 뒤로 20년이나 더 살았다. 인물 묘사에서는 디킨즈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구성력에서는 그를 앞지른다고 일컬어지는 콜린즈가, 문학사적으로는 디킨즈에게 못 미치고 있다. 그것은 디킨즈가 서민적인 필치를 지니고 있고, 콜린즈는 상류사회적인 필치를 지니고 있는 탓이다. 콜린즈는 그것을 극복하려고 애쓰며 디킨즈 풍의 사회 개량 의도가 담긴 작품을 쓰려고 했다. 그것이 그의 특징이었던 스릴과 서스펜스를 잃게 하는 결과가 되어 첫무렵에 높은 명성을 얻었던 그가 늘그막에는 그 존재마저 잊혀지는 불우함을 겪게 했던 것이다.

그 뒤의 작품으로는 《남자와 아내(Man and Wife, 1870)》가 영국의 모순된 혼인법을 다루어 1873년에 프린스 오브 웰즈 극장에서 상영된 이래 136회의 공연을 기록하는 평판을 얻었다.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모두 열 다섯 작품을 썼는데, 늘그막이 참으로 비참하였다. 육체적으로는 물론 사상적으로도 새로운 시대에 뒤처진 존재였다. 따라서 호평을 얻은 《남자와 아내》에도 그 즈음 발흥한 영국의 운동경기열에 대한 항의가 깃들어 있고, 그밖의 작품에서도 새로운 시대의 경향을 비판하고 있었다.

1870년에는 디킨즈가 숨을 거두고, 1873년에는 동생 찰즈를, 그리고 1879년에는 40년 동안이나 우정을 주고받았던 워드를 잃었다. 류머티즘 때문에 외출도 못하고 무절제에 가까운 불섭생(不攝生)에도 불구하고 그만이 이상하게 생명력이 길어 줄곧 창작의 붓을 계속 휘두를 수가 있었던 것이다. 늘그막의 작품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이라고 하는 《검은 옷'The Black Robe)》은 1881년에 씌어졌고, 1889년 9월 23일에 66살의 나이로 이 세상을 하직했을 때는 '런던 화보(報)'에 마지막 작품인 《맹목적인 사랑(Blind Love)》을 집필 중이었다. 그는 자신이 죽음에 가까운 것을 알고 월터 비잔트를 불러 초안을 건네 주며 완성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이 작품은 그가 죽은 지 석 달 뒤인 1890년에 완결 출판되었다.

그의 유해는 친지와 벗들에 의해 간소하게 장례 치러졌는데, 무덤에는 《흰 옷의 여인》 및 그 밖의 여러 작품의 지은이라고만 새겨져 있다. - 동서 미스터리 북스


[1] 이 사람이 범인인줄 알았는데 아니었더라-는 것. 자세한 것은 항목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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