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한의 국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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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벌국 | 多伐國 | |||
<colbgcolor=#4A2D5B><colcolor=#fbe673> 소속 | 진한 | ||
위치 | 대구광역시 일대 | ||
현재 국가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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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多伐國원삼국시대 진한( 경상도) 지역의 소국들 중 하나. 대구 지역에 위치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2. 위치
지금의 대구광역시의 옛 이름이라고 알려져 있는 달구벌 등 여러 이름과 유사성이 있어 대구 인근 땅에 있던 소국으로 보기도 하나, 경상북도 포항시 흥해읍 쪽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비지국, 초팔국과 더불어서 망했다는 기록이 있어 대구 부근으로 비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한편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에는 대구 인근에 인접한 지금의 경상남도 의성군 에 위치한 다인면이 달이(達已) 혹은 다이(多已)라 불렸다고 전해지는데, 已의 상고음은 /*lɯʔ/(르)로 재구되기 때문에 두 표기 모두 '달이'를 표기한 것이라 여겨진다. 또한 지금의 의성군 단촌면은 구벌이라 불렸다고 전해지는데 차자표기로는 구화(仇火)이다. 여기서 火는 '블', '벌' 정도의 고유어를 훈차한 것이라 여겨진다.
신라 경덕왕 때 한화정책으로 옛 삼한 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던 순우리말 고유 지명들이 일괄 한자화 되어 통일될 때[1] '구벌'에서의 '구'를 언덕을 뜻하는 丘로 대체하여 '고구(高丘)'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그러나 원래 표기였던 구(仇)자는 본래 아홉을 뜻하는 글자로써, 실제 현재 의성군에는 구봉산이라는 산이 있다. 이 산의 원래 명칭은 구성산(九聖山)이라고 불렸으나 일제강점기 때 구봉산으로 명칭이 바뀌었다.[2]
통일신라 경덕왕 때는 한반도 지역의 화산들이 사화산이 된지 오래겠지만, 현재 경상도에 공룡 화석이 유독 많이 발견되는 것에서 ‘달구벌’ 이라는 순수 우리말로 이루어진 지명의 본래 의미를 유추해볼 수 있다.
3. 역사
이처럼 다벌국은 경주 사로국이 낙동강 유역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꼭 거쳐야 될 땅이었다.이미 음즙벌국, 실직국, 우시산국 등을 점령해 삼척부터 경주인근까지 지금의 경상도 동해안 지역을 장악한 지 6년만인 신라( 사로국) 파사 이사금 29년에 다시 영역 확장에 나선다.
29년(108년) 여름 5월에
홍수가 나서 백성이 굶주렸으므로, 10도(十道)에 사자를 보내 창고를 열어 진휼하였다. 군사를 파견하여
비지국(比只國), 다벌국(多伐國),
초팔국(草八國)을 쳐서 병합하였다. -
삼국사기, 신라 본기, 파사 이사금
같이 점령한 비지국과 초팔국의 위치를 봤을 때 다벌국은 사로국, 즉 경주에서 비지국과 초팔국 방면으로 쳐들어가려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덤으로(...) 털렸는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도 먼저 복속한 압독국과는 대구 분지 지형으로 구분선 없이 이어져 있어 국경 안정 차원에서라도 복속시킬 필요가 있었겠지만.
4. 고고학으로 본 다벌국
역사서로는 다벌국은 그저 대구 분지에 있던 나라로서, 신라의 거점이 된 것밖에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20세기 후반 고고학의 눈부신 발전에 힘입어 많은 부분이 밝혀졌다. 특히 기존에 발굴된 달성 고분군을 비롯하여 불로동 고분군, 구암동 고분군, 경산의 임당 고분군 등의 발굴과 더불어 형식학, 통계학적 방법을 통해 각 지역별 토기 생산과 유통권을 알아냈고, 고분군 부장품의 위계, 토성의 분포 등으로 경산 지역 압독국과의 경계는 물론 대구 정치체 내부 구조, 읍락간의 상하 관계, 그리고 중심지 이동까지 아주 심층적으로 밝혀내었다.4.1. 관련 문서
[1]
경덕왕 시대에 펼쳐진 한화 정책은 말 그대로 중국화 정책이다. 757년 전국 9주의 명칭과 군•현의 지명을 모두 당나라식으로 바꾸어 한자화했는데 한국사 최초의 지리덕후가 경덕왕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지금의 읍면 단위까지 전국에 경덕왕이 건드리지 않은 지명이 드물 정도로 대대적으로 바꾸었다. 고조선 이후 삼한을 거쳐 고구려, 백제, 신라 초기부터 사용한 지명을 경덕왕이 안 건드리고 그대로 놔둔 경우도 아주 드물지만 있기는 있다.
[2]
아마도 아주 먼 옛날 구성산이 화산 폭발했을 때 우리 선조들은 아홉개의 봉우리에서 뿜어 나오는 불기둥과 용암을 보며 경이로움과, 공포, 왠지 모를 신성함을 느끼지 않았을까 유추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