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문 배경
닐라의 힘과 기원은 수수께끼 속에 숨겨져 있다. 하지만 오직 닐라만이 알고 있는 진실은 한때 그녀가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며 지금과는 사뭇 다른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장차 닐라가 될 카트칸 대가문의 조숙한 아이는 본디 전사가 아니었으며 신화와 전설에 관심을 가진 가녀린 책벌레에 가까웠다. 카트칸은 거의 천 년 전에 이웃인 카마보르가 몰락한 이후로 비교적 평화로운 시절을 보냈고 위대한 전사나 이야기 속의 영웅이 필요하지 않았다. 적어도 닐라는 그렇게 믿었다. 영웅의 시대가 끝나지 않기를 바랐던 소녀는 아직 세상이 여물지 않고 인류의 적들이 지금보다 천 배는 많았을 시절, 신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위대한 야수들과 빛나는 전사들이 격돌하는 화려한 과거의 서사시를 수집하고 집착했다. 그녀는 카트칸의 역사에서 광기에 미친 왕 비에고와 그의 비극적인 몰락, 최초의 드래곤의 기원, 우주의 토대에 관한 이야기를 읽었다. 닐라는 이런 다채롭고 마법 같은 이야기가 그저 허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야기를 하나하나 기억했다. 특히나 그녀가 가장 좋아한 이야기는 바로 아쉴레쉬의 순환이었다. 이야기에서는 환상적인 기쁨의 신, 아쉴레쉬를 흉포한 아홉 형제와 함께 세상을 위협하는 사지가 많이 달린 야수로 그렸다. 원초적인 기쁨에 굶주린 아쉴레쉬는 신들의 영역을 삼키려고 시도했지만, 신들은 괴물을 쓰러뜨리고 지하 세계 제7층에 있는 끝없이 희미하게 일렁이는 호수 깊은 곳에 괴물을 가두었다. 또한, 신화적인 영웅들의 조직이 호수를 지켰다고 했다. 이야기에 얽힌 많은 수수께끼를 풀어낸 닐라는 바로 그 영웅들의 조직이 자신의 발아래, 카트칸 수도 중심부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흥분에 휩싸인 그녀는 이 비밀 조직을 찾아내고 비밀을 밝히기 위해, 혹은 영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 급히 떠났다... 그렇게 그녀는 사라졌다. 그녀의 얼굴, 목소리, 실제 이름에 관한 모든 기록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졌다. 벽이나 문서에 쓰인 글은 물론, 그녀에 관한 기록은 사라지거나 증발했고 그녀의 친구들이나 가족의 입에서 이름이 오르내리지 않았다. 마치 닐라가 처음부터 존재한 적이 없던 것처럼. 십 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다시 모습을 드러낸 여성은 고향의 이방인이 되었고 자신이 알고 있던 세상으로부터 해방되었지만, 특이한 미소와 끝없는 기쁨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자리를 비운 오랜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하지 않았다. 어쩌면 신화 속의 조직을 만났고 그들이 닐라에게 마법과 전쟁의 기술을 가르쳤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태초의 악마 아쉴레쉬를 만나 십 년이라는 세월 동안 어둠 속에서 전투를 벌이고 마침내 승리를 거머쥐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과거의 소녀가 아니라 그녀의 육신을 차지한 무언가일 수도... 혹은 어딘가에 진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어떤 존재이든 그녀는 전설적인 운명의 강 이름을 따서 자신을 '닐라'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업적이 시작되었다. 강인하고, 곡예를 부리며, 막대한 힘이 담긴 물로 만들어진 칼날을 휘두르는 닐라는 고대 신화에서 가장 큰 적들을 정복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모든 카마보르 용의 시조인 불사의 대모 독사, 카넬리아 계곡의 재앙이자 변화의 악마 이마고, 셀 수도 없이 많은 잔혹 행위를 저지른 미친 반신 나바벨리쿠스. 새로운 적들은 닐라에게 도전했고 모두가 바라보는 가운데 현란하고 격렬한 전투에서 쓰러졌다. 승리할 때마다 닐라의 전설은 점점 커져갔다. 그리고 가깝고도 먼 이국의 땅을 여행하는 닐라의 여정과 함께 서사시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닐라의 곁에는 언젠가 카트칸의 안전을 위협할 새로운 악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아쉴레쉬의 힘이 있었다. 자신이 잃어버린 것에 대한 기억과 앞으로 다가올 것들에 대한 지식을 가진 닐라는 어디에서나 거대한 상대와 맞선다. 책에 파묻혀 있던 가녀린 소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닐라는 이제 억제할 수 없는 행복을 품고 미래를 마주한다. 닐라는 그 존재만으로 함께 싸울 영감을 주며, 그녀의 행동은 사람들이 과거 자신이 어떤 존재였는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자신이 어떤 영웅이 되었는지 기억하게 만든다. 한결같은 기쁨으로 룬테라의 신화적인 적을 상대하는 닐라는 스스로를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을 지킬 수 있다면 끝까지 맞서 싸울 것이다. |
2. 굴잡이 빌의 가게에서 보낸 은밀한 밤
너는 기쁨을 느끼고 영웅이 되어 모든 위대한 영웅이 그렇듯 전설로 전해지리라 그러한 선물의 대가는 하나 바로 너다 —아쉴레쉬의 순환: 제10장 7절 빌지워터에는 특유의 별미가 거의 없지만, 굴잡이 빌이 운영하는 굴 요리점은 예외다. 빈민가에 자리 잡은 이 가게는 지난 몇 년간 크게 유명해졌다. '빌지워터의 유명 인사'와 가게 주인 굴잡이 빌의 역할이 컸다. 해산물을 좋아하고 허풍을 잘 떠는 굴잡이 빌은 가게 위층의 남는 방을 유랑객과 방랑자들에게 빌려주기도 한다. 가장 최근에 묵은 손님은 물욕이 없는 듯 짐이 무척 단출했고, 입이 양쪽 귀에 걸릴 정도로 늘 활짝 웃고 다녔다. 지금 막 말콤 그레이브즈를 걷어차 식당 구석으로 날려 버린 것도 바로 그 손님이다.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그레이브즈가 입으로 이쑤시개를 굴리며 고통스러운 듯 낮게 말했다. "다른 녀석들한테 가 봐. 세나, 아니면 렝고 말이야." "코앞밖에 볼 줄 모르는 네 녀석 때문에 수많은 무고한 생명이 죽게 생겼어, 말콤 그레이브즈." 목소리는 유쾌했지만, 독특한 억양이었다. "네가 우리에게 남긴 선물에 관해서 물어보려고 왔다. 바로 카마보르의 비에고 말이야." 목소리의 주인은 바닥에 널브러진 집기들을 헤치며 성큼성큼 다가갔다. 물로 만든 듯한 칼날 채찍이 호를 그리며 여자의 머리 위에 떠 있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우중충한 식당에 쪽빛과 황금빛이 번쩍이며 사방에 춤추는 그림자를 드리웠다. 헝클어진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야윈 얼굴과 보랏빛 눈이 보였다. 기이할 정도로 쾌활한 표정 때문에 이목구비가 더 뚜렷해 보이는 듯했다. 허리에 달린 고리 위에는 반짝이는 구체가 놓여 있었다. 처음 보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고리는 마치 두 개의 손이 구체를 받치는 듯한 형태였다. 그 여자는 닐라였다. 그레이브즈가 몇 주 동안 피해 다녔지만, 결국 붙잡히고 말았다. 닐라의 등장은 요란스러웠다. 밤사이 빌지워터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여러 사람을 놀라게 했다. 일단 닐라는 온종일 양손을 요란스럽게 움직이며 책의 글귀를 암송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리고 일곱 개의 손이 얽힌 모양의 갑옷을 입었는데, 누구도 그 갑옷의 재료인 무지갯빛 금속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또한 자신을 카트칸 출신이라고 소개했다. 순혈 카트칸인이 발로란에 나타난 것은 무려 700년 만의 일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닐라는 몸길이가 100m가 넘는 바다뱀들을 마구잡이로 죽이기 시작했다. 바다뱀이 배를 공격하려 할 때면, 부두로 달려가 차분한 미소를 띠며 수면 위로 날아갔다. 그리고 마치 쏜살처럼 가늘고 탄탄한 몸으로 바다뱀에게 돌진했다. 닐라는 고마워하는 선원들에게 '빛의 감시단'이라는 자들을 아는지 물었고, 그 소문을 들은 그레이브즈는 곧바로 몸을 숨겼다. 하지만 결국 그레이브즈는 붙잡히고 말았다. 그리고 닐라는 화가 난 듯 보였다. 아니, 화가 난 듯이 행동했다. 닐라의 얼굴은 이상할 정도로 항상 미소를 띠었고, 몸짓이나 목소리는 언제나 밝고 쾌활했다. 사람들이 닐라의 속내를 알아채지 못하거나 대화를 꺼리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물론 거대한 괴물을 보면 무조건 달려드는 버릇도 한몫했다. "비에고 일은 난 하나도 몰라." 그레이브즈는 총을 찾아 바닥을 더듬으며 말했다. 거짓말이었다. "네가 알로베드라에 그놈을 봉인했을 텐데, 아닌가?" 닐라가 두 발짝 더 가까이 오며 말했다. 얼굴에는 발랄한 미소가 가득했다. 다만 다리의 움직임이 이상했다. 마치 공격 직전에 똬리를 튼 뱀처럼, 교묘하게 움직였다. "거짓말하지 마. 넌 기껏해야 인간이잖아. 너 정도는 간단하게 죽일 수 있어."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을걸?" 새로운 운명을 손에 쥔 그레이브즈가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본때를 보여 줄 생각으로 곧바로 닐라의 몸통을 향해 총알을 세 발 발사했다. 총은 분명히 발사됐다. 다만 발사된 총알은 닐라의 몸 주위를 돌 뿐이었다. 아니, 닐라가 총알 주위를 돈다고 해야 할까? 마치 물속에서 총을 발사한 느낌이었다. 그레이브즈라면 꿈에서도 하지 않을 짓이었다. 그때 미소를 띤 닐라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그레이브즈는 알지 못했으나, 닐라는 분노를 느끼지 못했다. 오직 맹렬한 즐거움만이 마음속에 존재했다. 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그녀는 지금 화를 내고 싶었다. 닐라는 채찍을 휘둘러 그레이브즈의 총을 쳐낸 다음, 옆에 있는 금속 탁자를 때려 반으로 갈라 버렸다. 그 순간, 잠깐이지만 닐라 주위로 푸른색의 투명한 손이 보였다. 하지만 그레이브즈는 헛것을 봤다고만 생각했다. 최근에 머리에 충격을 많이 받은 탓일까? "재미있는 무기네." 닐라가 중얼거렸다. "약한 적들 상대로는 잘 먹혀들었겠지." "그러는 너는 뭔데?" 약이 오른 그레이브즈가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닐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칼날 채찍을 구체 안에 집어넣고, 낮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그레이브즈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사과할게. 싸우는 모습을 보니, 넌 내가 찾던 빛의 감시자가 아닌 듯하네." " 탐 켄치도 놀랄 노릇이군. 너도 악에 맞서 싸우는 영웅이잖아, 안 그래?" 그레이브즈가 널브러진 집기들 속에서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나도 영웅이라고. 빛의 편에서 보면 말이지! 그러니 날 좀 내버려 둬." 그레이브즈는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젠장... 그래도 멋진 마법을 쓰는군. 인정할 수밖에 없겠어." 닐라는 다시 암송을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불길한 미소를 띤 채, 양손을 움직이며 낮게 중얼거렸다. "고마워, 말콤 그레이브즈. 이 힘을 얻으려고 큰 대가를 치렀지." "그냥 '그레이브즈'라고 불러 주면 좋겠는데." "그럴 수 없어." 닐라가 대답했다. "이름에는 위대한 힘이 담겨 있거든, 말콤 그레이브즈. 명심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레이브즈는 닐라 뒤쪽을 보며 말했다. "가까이 와서 듣지? 아니면 우리가 더 크게 말할까?"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거리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다뱀 사냥꾼을 찾으러 왔다!" 닐라가 고개를 돌리자, 자신이 만든 벽의 구멍 사이로 대엿 명의 용병이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뒤로 거대하고 창백한 존재가 보였다. 닐라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불만을 품은 불량배들이 쫓아온 적은 종종 있었지만, 저런 건 처음 봤기 때문이다. "내가 그 사냥꾼이야." 닐라는 괴물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원하는 게 뭐지?" "너 때문에 우리 두목의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멋대로 와서 바다뱀을 닥치는 대로 잡아 죽여? 여기 부두와 배들은 전부 우리 소유다. 그리고 지금부터 네년도 우리가 접수하겠다!" "저건 뭐지?" 닐라는 용병들의 말을 무시하며 그레이브즈에게 물었다. "심해의 포식자야. 해저로 떨어진 닻 무덤을 먹고 살지. 사람 맛을 알아. 사납긴 해도 멍청해서, 이놈들이 이용하는 거야.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이 있으면 저 괴물을 풀어서 죽이지." 닐라의 눈이 반짝였다. "얼마나 크게 자라지?" "글쎄. 노 10개, 15개 길이 정도? 저 녀석은 제법 크군." "재미있네." 닐라가 중얼거렸다. "드디어 적수를 만났어." "이봐!" 그때 용병 하나가 소리쳤다. "사람이 얘기하면 들어야지. 그러다 죽는 수가 있어. 무슨 말인지 알겠나?" "그래, 알 것 같네." 닐라는 구체에 손을 집어넣었다. "나는 제7층의 닐라다. 우리의 전투는 역사에 남아 전해지리라." 채찍을 앞으로 휘두르자 물이 두 갈래로 뻗어 나와 신묘한 빛을 내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용병들은 예상치도 못한 광경에 넋을 잃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채찍은 계속해서 움직이며 뻗어 나갔다.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그들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제7층'은 단순한 칭호가 아니었다. 거대하고 막강한 괴물들을 처치하는 신화 속의 집단이었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지 않은 불한당들은 몸풀기 수준도 되지 않았다. 오직 '심해의 포식자'만이 오늘 밤 닐라의 적수가 될 만했다. 등각류를 닮은 이 거대한 괴물의 등딱지는 살구색과 비슷했고, 사나운 주둥이 속 이빨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닐라는 가슴 깊은 곳에서 환희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제 무아지경에 빠져 싸우는 일만 남았다. 닐라는 예의 밝은 미소를 띤 채, 놀라운 속도로 식당 건너편으로 돌진해 용병들을 쓰러트렸다. 칼날 채찍을 휘두를 때마다 거대한 파도가 치는 듯했다. 이리저리 춤추는 채찍의 물줄기는 칼처럼 날카로웠다. 아름다우면서 치명적인 닐라의 몸놀림이 이어지면서 적들은 하나둘씩 쓰러졌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심해의 포식자만 남게 되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노 10개 길이'까지는 안 되고 지붕 달린 마차와 비슷한 크기였다. 전에 상대했던 적들과 비교하면 실망스럽지만, 빌지워터에서는 괴물로 불리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번 승리를 기억하리라. 그것으로 충분했다. 닐라는 괴물의 등에 뛰어올랐다. 채찍 칼날이 밤하늘 아래에서 빛났다. "심해의 괴물아! 너도 기쁨을 느끼길 바란다!" 그리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닐라는 괴물을 반으로 갈라 버렸다. 그나저나 빛의 감시자는 왜 찾는 거야?" 괴물의 꼴이 되기 싫었던 그레이브즈는 닐라에게 물었다. "감시단은 해체된 거나 다름없어. 나도 장비를 전부 전당포에 맡겼지. 마법의 돌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다고." "카마보르의 비에고가 곧 속박에서 빠져나올 거야." 닐라가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레이브즈를 향한 경계심이 풀린 듯했다. "비에고를 봉인한 헬리아의 마법이 점점 약해지고 있어. 그래서 내 동족들이 상상할 수 없는 위험에 처했지." "우리는 놈을 이긴 적 있어. 분명 비에고는 강하지만, 풀려나면 또 물리치면 돼." "진짜 문제는 비에고가 아니야, 말콤 그레이브즈. 그자의 대몰락이 이 세계에 새로운 마법을 만들어 냈어. 악마들을 미쳐 날뛰게 하는 마법이지. 태고의 악마들까지 깨어날지도 몰라." 닐라는 허리에 찬 구체를 만지며 말을 이었다. " 오래전 잊힌 열 명의 악마 군주. 절대 깨어나서는 안 될 자들이지." "악마라고 했나? 넌 악마가 아닌가?" "아니야." 닐라는 웃었다. "적어도 완전히 악마는 아니지." 그러더니 닐라는 손을 움직이며 낮게 구절을 암송했다. 그레이브즈는 빛나는 액체로 뭉쳐진 그 구체를 바라봤다. 볼수록 점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마치 금속으로 된 두 손이 그 구체를 그레이브즈에게 바치는 듯한 모양새였다. "너무 자세히 들여다보진 마." 닐라가 경고하자 그레이브즈가 정신을 차렸다. "야수는 언제나 굶주려 있거든." 닐라는 양손을 자신의 입에 갖다 댔다. "시간이 늦었네. 게다가 넌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아. 이만 방으로 돌아가야겠어." 별일 아니라는 듯 말을 마친 그녀는 당황한 그레이브즈와 엉망이 된 식당을 지나 위층으로 올라갔다. "혹시 거대한 괴물이 나타나면 찾아와. 내가 처치할 테니까. 그리고 굴잡이 빌한테는 가게를 박살 내서 미안하다고 전해 줘. 같은 영웅을 만나서 반가웠어, 말콤 그레이브즈." 닐라는 그렇게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레이브즈는 이쑤시개를 바닥에 뱉었다. 난리 통에 너무 꽉 물었던 탓인지 이쑤시개는 부러져 있었다. 새 이쑤시개를 찾아봤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레이브즈는 밖을 내다봤다. 거리에는 여섯 구의 시체와 반으로 갈라진 바다 괴물이 널브러져 있었다. "빛의 감시단이 내 인생을 망쳤어." 딱히 누가 들으라고 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래도 멋진 여자였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