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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07-15 17:46:59

남겨진 메아리


1. 개요2. 본문

1. 개요

쓰레쉬 칼리스타에 관한 단편소설이다. 작가는 Anthony Reynolds.

원본은 이곳으로 가면 볼 수 있다.

2. 본문

새하얀 돌바닥 위에 쓰러진 남자의 몸 아래로 진홍색 피가 고였다. 옆에 날이 부러진 그의 검이 보였다. 주변에 남자를 죽인 자들이 그림자를 드리우며 서 있었다. 하지만 남자의 눈엔 오직 그녀밖에 보이지 않았다.

여자의 눈은 남자의 눈을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남자는 그 안에서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남자는 옆으로 누운 채 점점 얕아져 가는 숨을 토해냈다.

그녀의 손은 생기가 없이 차가웠다. 하지만 남자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남자는 평온함이 마치 수의처럼 자신의 몸을 감싸는 것을 느꼈다. 고통과 두려움, 의혹은 이제 없었다.

철갑을 두른 남자의 손가락이 여자의 손을 움켜쥐었다. 살아서는 함께할 수 없었지만, 죽어서는 그녀와 함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그는 평온을 느꼈다...

"안녕하신가, 레드로스." 그곳에 있어서는 안 될 존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드로스...' 남자의 이름이었다.

악의로 가득한 비웃음 소리와 함께 사슬이 철컹이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에게 대체 왜 그러는 건지 모르겠지만, 자네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니 즐겁긴 하더군."

그는 파도처럼 밀려와 자신을 집어삼키려는 현실을 마주했다.

바닥에 고인 피는 이미 수백 년이 지나 갈색빛을 내며 말라 있었다. 새하얗던 돌바닥은 갈라진 채 검은 빛을 띠었다. 하늘에서 요동치는 먹구름 안에서는 번갯불이 번뜩였다.

그리고 사방에 검은 안개가 가득했다.

'그녀'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레드로스는 그녀를 붙잡으려고 했다.

"내 사랑." 레드로스가 속삭이듯 불러 봤지만, 그녀의 모습은 점점 희미해졌다. 그리고 마치 잿더미가 바람에 날리듯 그의 손을 빠져나갔다.

그는 죽어 있었다.

이승도 저승도 아닌 그곳에 영원히 갇히고 말았다.

레드로스는 일어나 부러져버린 자신의 검을 쥐었다.

그리고 자신의 기억을 산산조각 낸 자에게 검을 겨누었다. 혐오스러운 그 존재는 어둠 속에 숨은 채 차가운 불꽃이 일렁이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석조 건물 잔해 위에 놓인 저주스러운 랜턴에선 빛이 뿜어져 나왔으며, 랜턴 안에 사로잡힌 영혼들은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 존재는 바로 지옥의 간수 '쓰레쉬'였다.

레드로스는 쓰레쉬를 증오했다.

쓰레쉬는 수백 년간 그를 쫓아다니며 비웃고 조롱했다. 그리고 이제 '이곳'까지 찾아왔다. 이곳은 레드로스의 안식처이자 현실의 공포가 되살아나기 전에 잠깐의 평온을 맛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왜 여기까지 온 거지?" 레드로스가 물었다. 마치 멀리 떨어진 공간이나 시간에서 들려오듯 희미하고 공허한 목소리였다.

"이번엔 꽤 오랫동안 방황했더군." 쓰레쉬가 말했다. "수개월, 어쩌면 수년일지도 모르지. 나도 잊어버렸거든."

레드로스는 칼을 내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그는 새하얀 돌과 황금이 햇빛을 받아 빛나던 이곳의 예전 모습을 떠올렸다. 하얀 안개가 군도를 둘러싸며 외부인으로부터 보호했다. 처음 상륙했을 때, 그곳은 마치 신의 축복을 받은 땅처럼 보였다. 부와 지식, 신비로움으로 가득 찬 그곳에선 기근이나 전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게다가 저항도 거의 없었다. 섬을 장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해가 없이 온통 어둠만이 가득했다. 부서진 도서관의 잔해는 마치 미라처럼 우뚝 서 있었다. 석조 건물의 잔해는 마치 외부로 터져나가듯이 공중에 뜬 채로 멈춰 있었다. 신의 축복을 받은 땅이라는 그의 생각은 그야말로 착각이었다. 이곳은 신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이 분명했다.

레드로스의 육체는 오래전 이곳에 잠들었다. 그래서 검은 안개의 광란으로부터 다시 빚어질 때마다, 그는 이곳에서 깨어났다. 몇 번이고 다시 깨어나도 바뀌는 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레드로스는 그 변화가 달갑지 않았다.

레드로스는 습관처럼 목에 찬 펜던트에 손을 가져갔지만, 목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안 돼..." 당황한 그의 몸에서 빛이 일렁였다.

"참으로 예쁜 목걸이군." 쓰레쉬가 말했다.

레드로스는 고개를 돌려 이글거리는 눈으로 쓰레쉬를 노려봤다. 높이 치켜든 쓰레쉬의 손에서 줄이 짧은 목걸이가 보였다. 끝에는 장미 두 송이가 섬세하게 새겨진 펜던트가 달려 있었다. 잎과 줄기가 서로 뒤엉킨 장미는 포옹하는 연인의 모습 같았다.

레드로스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쓰레쉬에게 다가서며 검을 뽑아 들었다. 왕의 총애를 받는 기사였던 그는 생전에도 몸집이 거대했고 난폭했으며, 항상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다. 레드로스는 쓰레쉬를 내려다보았다.

"그건... 내 물건이다..." 레드로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쓰레쉬는 다른 나약한 영혼들처럼 도망가지 않았다. 해골 형상의 얼굴에서는 표정을 읽기 힘들었지만, 쓰레쉬의 잔혹한 눈빛에서 즐거움이 느껴졌다.

"자네는 참 특이해, 레드로스." 쓰레쉬가 펜던트를 흔들며 말했다. "자네나 나나 다를 바 없다고 하는 이들도 있겠지. 하지만 넌 달라. 넌 특히 눈에 띄거든. 이곳에선 바로 '네가' 비정상이야."

"이리 내지 않으면 베어버리겠다." 레드로스가 검을 들이밀며 으르렁댔다.

"어디 해 보든가." 쓰레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눈은 폭력을 갈망하며 불타오르고 있었다. 쓰레쉬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 봤자 달라지는 건 없어. 자, 받아. 어차피 내겐 쓸모없는 물건이니."

쓰레쉬는 오만한 동작으로 펜던트를 던졌다. 레드로스는 검은색 건틀릿을 찬 손을 뻗어 펜던트를 잡았다. 거대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민첩한 동작이었다. 그리고 거대한 주먹을 펴서 펜던트를 살펴봤다. 손상된 곳은 없었다.

레드로스는 검을 집어넣고 쇠못이 박힌 투구를 벗었다. 그러자 실체가 없는 얼굴이 드러났다. 그 모습은 마치 유령 같았지만, 생전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순간 황량한 땅 위로 차가운 바람이 불어닥쳤다. 그러나 레드로스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소중한 펜던트를 목에 걸고 다시 투구를 썼다.

"지옥의 간수여, 이런 끔찍한 상태에서 벗어나 평온을 얻고 싶었던 적은 없나?" 레드로스가 말했다.

쓰레쉬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우린 필멸자들이 태초부터 간절히 바라던 '영생'을 얻었잖나."

"영생은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지."

쓰레쉬는 히죽거리며 몸을 돌렸다. 허리띠에 찬 사슬과 낫이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옆에 떠 있는 랜턴은 손을 대지 않아도 저절로 쓰레쉬와 함께 움직였다.

"자네는 과거에 너무 집착하고 있어. 마치 시계 속의 모래처럼 과거는 자네 손을 빠져나가는데도 말이야." 쓰레쉬가 말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경이로운 선물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지. 우리는 이제 '신'이야."

"그건 선물이 아니라 저주다."

"그럼 떠나시게, 용맹한 전사여." 쓰레쉬가 레드로스에게 손짓을 하며 말했다. "가서 네 연인을 찾아. 어쩌면 이번에는 널 기억할지도 모르지..."

레드로스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움직이지 않았다.

"대답해 봐." 쓰레쉬가 말했다. "네 사랑을 구하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무엇으로부터 구한다는 거지? '그녀'는 별로 괴로운 것 같지 않던데. 하지만 '너'는..."

"선을 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레드로스가 으르렁거렸다.

"그녀를 위해서 이러는 건가? 아니면 네 자신을 위해서?"

쓰레쉬는 전에도 이런 식으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마치 레드로스의 노력을 비웃으려는 것 같았다.

"나는 네 노리개가 아니다, 지옥의 간수여. 날 가지고 놀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야."

쓰레쉬는 상어와 같은 이빨을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물론 그럴 생각은 없다."

쓰레쉬가 손짓하자 랜턴이 가까이 다가와 길쭉하게 뻗은 손 아래로 들어왔다. 레드로스는 랜턴의 빛 안에서 괴로워하는 얼굴들을 보았다. 갇혀 있는 얼굴들은 서로를 밀쳐내며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다. 그것은 고통받는 영혼들의 끔찍한 행진이었다. 쓰레쉬는 영혼들의 고통을 음미하며 미소 지었다.

"너는 내가 '굳이' 고문하지 않아도 되겠군. 이미 스스로 고문하고 있으니 말이야."

지옥의 간수는 그렇게 레드로스만 남겨둔 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공허한 바람이 폐허가 된 도시를 휩쓸고 지나갔지만, 레드로스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레드로스가 느낄 수 있는 건 오직 '그녀'뿐이었다.

그녀는 무언가를 쫓고 있었다.

레드로스는 안개 속으로 들어가 안개가 자신의 몸을 감싸도록 두었다. 그리고 안개를 헤치며 나아갔다.


검은 안개는 레드로스의 주위에서 몸부림쳤다. 안개는 증오와 분노, 공포로 가득했지만, 레드로스는 그에 물들지 않았다. 그는 촛불을 향해 달려드는 나방처럼, 위험한 줄 알면서도 그녀에게 이끌렸다. 그리고 황폐해진 땅과 부글거리는 물이 흐르는 해협을 빠르게 건넜다. 한때 축복의 빛 군도라고 불렸던 곳이었다. 그는 검은 안개가 닿는 곳이면 어디든 갈 수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발걸음을 옮겼다. 검은 안개는 해가 들지 않는 그들의 감옥이었다.

어둠 속에서 이글거리는 그녀의 존재감이 레드로스를 끌어들였다. 그녀가 가까이 있음을 느낀 레드로스는 안개 속에서 다시 한번 발을 내디뎠다.

그는 새까맣게 타버린 숲속에 서 있었다.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가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오래전 미풍에 떨어지는 나뭇잎 소리가 부드럽게 울려 퍼졌을 그곳은 이제 얼음장 같은 강풍이 몰아치는 죽음의 숲으로 변해 있었다.

레드로스는 나무 사이에서 움직임을 포착했다. 그리고 시커메진 땅에 육중한 군화로 발자국을 남기며 그 존재를 따라갔다.

레드로스의 왼팔에는 강철 방패가 묶여 있었다. 언제 방패를 거기에 묶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레드로스는 검을 뽑았다. 칼자루를 감고 있던 가죽은 썩어버린 지 오래였고 검날은 부서져 얼마 남아있지도 않았지만, 검의 원래 윤곽은 마치 환영처럼 은은하게 빛나며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것은 세월의 풍상에 깨지고 부식되어버린 옛 영광의 흔적과도 같았다. 과거 레드로스가 사모해 마지않던 왕이 직접 그에게 하사한 검이었다.

아래로 가파른 비탈이 펼쳐졌지만, 레드로스는 튀어나온 돌부리와 뒤틀린 뿌리를 밟으며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아래에서 유령마를 타고 협곡을 질주하는 검은 혼령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빠르게 나무 사이를 움직이며 더 이상 해가 뜨지 않는 동쪽 해변을 향해 달려갔다.

혼령들은 마치 무리 지어 사냥하듯 일치된 동작으로 움직였지만... 사냥을 당하는 쪽은 오히려 '그들'이었다.

레드로스는 그들과 속도를 맞춰 뛰기 시작했다.

그때 나무들 사이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리는 너희를 사냥하러 왔다, 배신자들이여..."

목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족히 수십이 넘는 영혼의 무리가 겹쳐진 목소리로 한 사람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큰 목소리는 레드로스도 잘 아는 이의 것이었다.

레드로스는 속도를 높였다. 유령 기수들은 거대한 돌무더기와 오래전 말라 죽은 나무들을 피해 움직이느라 속도가 느려졌지만, 곧게 뻗은 능선을 달린 레드로스는 빠르게 그들을 앞질렀다.

레드로스는 급히 몸을 틀어 능선 가장자리에 서서 뛰어내렸다. 몸을 웅크린 채 10미터 높이 아래로 착지하자 땅이 크게 울렸다.

레드로스는 좁은 숲길을 가로막고 섰다. 길이 깔때기처럼 좁아지는 곳이라 유령 기수들은 그곳을 통과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칼을 뽑아 쥔 채 기다렸다.

선두에서 전속력으로 달리던 기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때는 강철 기사단의 자랑스러운 일원이었지만, 지금은 뒤틀린 철갑을 두른 유령의 모습이었다. 이제 그들은 그저 옛 기억의 혐오스러운 파편일 뿐, 레드로스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존재들이었다.

유령 기수는 철갑을 두른 손으로 울퉁불퉁하고 끝이 구부러진 창을 쥐고 있었고, 투구에는 커다란 뿔이 솟아나 있었다. 유령 기수는 레드로스를 보고 고삐를 힘껏 당겨 말을 옆으로 세웠다. 놀란 말은 괴성을 질렀다. 땅에 닿지 않은 채 공중에 떠 있는 말발굽에서는 어두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레드로스가 전에 이자를 죽였던가? 아니면 그 난동에서 살아남고 레드로스를 죽였던 자일까?

곧 다른 유령 기수들도 나타나 급하게 말을 세웠다.

"물러서라, 검사여." 유령 기수 중 한 명이 말했다.

"우리는 너와 싸우고 싶지 않다." 다른 기수가 덧붙였다.

"아니, 우리 싸움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레드로스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다른 유령 기수가 소리쳤다. "저자를 짓밟아라!"

"멈추지 말았어야지." 레드로스가 히죽거리며 말했다. "너희는 실수한 거야."

순간 빛나는 창이 유령 기수 중 한 명의 몸을 꿰뚫었다. 창을 맞은 유령 기수가 바닥에 떨어지자, 말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고 유령 기수 역시 괴성을 지르며 공허 속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유령 기수는 또다시 검은 안개로 돌아갔다. 어떤 혼령도 검은 안개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길 원치 않았다.

"그 여자가 근처에 있다!" 유령 기수들을 이끌던 자가 소리치며, 새로 나타난 적을 향해 말 머리를 돌렸다.

혼란에 빠진 유령 기수들은 맞서 싸워야 할지, 아니면 도망가야 할지 모른 채 갈팡질팡했다.

레드로스 쪽을 돌파하는 편이 가장 나을 듯 보였다. 그렇게 한다면 일부는 도망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녀를 상대했다간 모두가 안개 속으로 돌아갈 것이 뻔했다.

그때 다른 기수 한 명이 안개 속에서 날아온 창을 가슴에 맞고 말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그녀가 나타났다. 이글거리는 포식자의 눈을 하고 성큼성큼 달려오는 그 모습은 마치 사냥에 나선 암사자와 같았다.

'칼리스타.'

레드로스의 시선은 즉시 그녀의 등 뒤로 삐져나온 희미한 창으로 향했다. 그리고 몸속 깊은 곳에서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 그 고통은 과거 자신의 목숨을 앗아갔던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칼리스타는 희미하게 빛나는 창을 한 손에 쥔 채 터벅터벅 걸어왔다. 유령 기수 한 명이 구부러진 창을 겨누며 돌진했지만, 칼리스타는 가볍게 공격을 피하며 옆으로 지나가는 유령 기수를 향해 창을 던졌다. 그리고 동시에 다음 적을 향해서 움직였다.

칼리스타가 손을 오므리자 손아귀 안에서 새로운 창이 형태를 갖추어 갔다.

기수 한 명이 검을 휘둘렀지만, 칼리스타는 능숙한 동작으로 회피하며 창 자루로 검을 쳐낸 후 뒤로 물러서며 유령마의 발길질을 피했다. 그리고 새카맣게 그을린 바위에서 뛰어오르더니 몸을 비틀며 다른 유령 기수의 가슴팍에 창을 꽂아 넣었다. 창을 맞은 유령 기수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착지한 칼리스타는 다음 희생양을 향해 눈을 돌렸다.

생전에 레드로스는 칼리스타보다 강한 여성을 만난 적이 없었다. 죽어서 더욱 강해진 그녀는 이제 적수가 없는 듯 보였다.

나머지가 칼리스타를 상대하는 사이, 유령 기수 두 명이 레드로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뒤늦게라도 칼리스타의 살육에서 벗어나려는 속셈이었다. 레드로스는 아슬아슬하게 돌진 공격을 피하며 앞서 달려오는 말을 방패로 강타해 쓰러트리고 유령 기수를 멀리 날려버렸다.

뒤이어 달려오던 유령 기수가 레드로스의 옆구리로 창을 찔러넣었다. 창은 레드로스의 갑옷을 꿰뚫으며 반으로 부러졌다. 하지만 레드로스는 쓰러지지 않고 몸을 돌려 유령마의 목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뼈와 살이 있는 말이었다면 목이 두 동강 났을 정도로 강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실체가 없는 유령마는 괴성을 내며 폭발하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유령 기수는 큰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졌다.

레드로스는 몸을 일으키려는 유령 기수를 방패로 강타해 칼리스타의 창끝으로 날려버렸다. 그녀의 사냥감이니 그녀가 죽이는 것이 마땅했다.

레드로스는 검을 집어넣고 칼리스타가 적들을 마무리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길고 가녀린 칼리스타의 몸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상대는 뛰어난 무예를 갖춘 정예 기사들이었지만, 칼리스타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날아드는 창과 검 공격을 피하며 하나둘씩 적을 무찔렀다.

곧 전투는 끝이 났다. 남은 건 오직 칼리스타와 레드로스 둘뿐이었다.

"칼리스타?" 레드로스가 말했다.

칼리스타는 고개를 돌려 레드로스를 바라봤지만, 그가 누군지 모르는 듯했다. 그녀의 표정은 생전과 같이 근엄했으며, 깜빡이지 않는 눈은 차갑게 느껴졌다.

"우리는 복수의 창이다." 칼리스타는 예의 그 겹쳐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은 아르젠트 왕가의 창, 칼리스타다." 레드로스가 말했다.

레드로스는 칼리스타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가 어떻게 대답할지 알고 있었다. 대답은 언제나 같았다.

"우리는 징벌, 그 자체다. 내게 맹세를 할 게 아니라면 사라져라."

"당신은 내가 섬겼던 의 조카였어. 우리는... 서로 잘 아는 사이였지."

칼리스타는 잠시 레드로스를 바라보더니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우리의 임무는 끝나지 않았다." 칼리스타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배신자들은 우리의 분노를 맛볼 것이다."

"당신의 임무는 '영원히' 끝나지 않아." 레드로스는 멀어지는 칼리스타를 쫓아가며 말했다. "그 굴레는 당신을 영원히 속박할 거야! 내가 도와줄게."

"죄지은 자, 벌 받을지어다." 칼리스타가 나무들 사이로 걸어가며 말했다.

"당신 '이게' 뭔지 기억나지?" 레드로스가 목에 걸고 있던 펜던트를 벗으며 말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칼리스타는 펜던트를 보고 멈칫했다. 오직 펜던트만이 칼리스타의 정신을 짧게나마 되돌릴 수 있었다. 이제 레드로스는 그 상태를 지속시킬 방법을 찾아야 했다.

칼리스타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정교하게 만들어진 펜던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이 닿기 직전, 그녀는 움직임을 멈췄다.

"전에도 당신에게 이걸 주려고 했지만, 당신이 거절했지." 레드로스가 말했다.

칼리스타의 눈빛이 흔들렸다.

"우리는... 나는... 기억한다." 칼리스타가 말했다.

칼리스타는 레드로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제야 그를 '알아보는' 듯했다.

"레드로스." 생전의 목소리를 되찾은 칼리스타가 대답했다. 비록 잠깐이었지만 그녀는 레드로스의 기억 속에 있던, 레드로스가 사랑했던 바로 그 여자로 돌아왔다. 칼리스타는 다소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한 번도 당신이 바라는 대로 해주지 못했어."

"이제 괜찮아." 레드로스가 대답했다. "비록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칼리스타는 주위를 둘러봤다. 이제야 주변 환경이 눈에 들어오는 듯했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손은 빛을 내고 있었지만, 연기처럼 실체가 없었다. 레드로스는 칼리스타의 얼굴을 스치는 당혹감과 괴로움을 보았다. 그녀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삼촌을 이곳에 데려오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당신 잘못이 아니야. 폐하께선 이미 제정신이 아니셨어. 이렇게 되기 전에 내가 끝장을 내야 했어. 아무도 폐하의 죽음을 의심하거나 슬퍼하지 않았을 거야."

"원래는 그런 분이 아니었어."

"그래, 하지만 우리가 알던 폐하는 이 사태가 벌어지기 오래전에 죽었지." 레드로스가 주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의 임무는 끝나지 않았어."

레드로스는 희망을 느꼈다. 익숙하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 임무가 뭐가 됐든, 예전처럼 우리가 함께..." 순간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레드로스의 목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칼리스타는 마치 가면을 쓴 것처럼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레드로스로부터 멀어졌다. 레드로스는 절망에 빠졌다.

지금껏 수도 없이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레드로스는 실패했다.

레드로스는 대몰락이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자기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그때 칼리스타를 죽였던 자들의 혼령을 쫓아다녔다. 그들의 영혼을 파괴하면 칼리스타가 자유로워질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오랜 시간 동안 그녀를 해방하기 위해 애썼지만,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오만한 기사단장, 헤카림을 쓰러트렸던 때를 떠올렸다. 레드로스에 의해 목이 달아나자 헤카림은 검은 안개 속으로 돌아갔다. 생전 칼리스타에게 최후의 일격을 날렸던 헤카림 역시 끝을 보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다. 레드로스와 헤카림은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수 세기가 흐르고 처음 보는 별들이 하늘에서 반짝였다. 하지만 강력한 의지를 지닌 헤카림은 몇 번이고 검은 안개 속에서 부활했고, 그럴 때마다 더욱 강해졌다.

그럼에도 변하는 건 없었다. 배신당한 필멸자들은 복수를 위해 칼리스타와 계약을 맺었고, 복수심에 불타는 영혼을 흡수할수록 칼리스타의 자아는 점점 희미해졌다.

칼리스타를 헤카림과 대면하게 한 적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그렇게 하면 칼리스타가 해방될 수 있으리라 레드로스는 생각했다. 거대한 몸집의 헤카림은 수십 개의 창을 맞고 쓰러지더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레드로스는 크게 기뻐했지만, 그 순간도 잠시뿐이었다.

바뀌는 건 없었다.

그저 또 다른 실패에 불과했다.

실패가 계속되자, 절망에 빠진 레드로스는 자멸의 길을 택했다. 그리고 떠오르는 태양 앞에 섰다. 혈관에 피가 말라버린 이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일출이었다. 레드로스의 실체가 없는 육체는 햇빛을 받고 수증기처럼 소멸되기 시작했다. 칼리스타를 남겨두고 떠난다는 죄책감에 괴로웠지만, 마침내 맞이할 평온을 기다리며 레드로스는 기뻐했다.

하지만 레드로스는 그마저도 실패했다. 검은 안개의 광기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지금껏 겪었던 공포와 패배의 순간이 주마등처럼 그의 눈앞을 지나갔다.

보랏빛 피부의 마법사가 레드로스를 어둠 속으로 다시 불러들였다. 마법사는 고대의 마법으로 그의 몸을 갈기갈기 찢었고, 레드로스는 비명을 질렀다. 더러운 항구 도시가 검은 안개에 휩싸일 때면, 그는 거리에 나타나 학살을 자행했다. 광기 어린 기쁨을 맛보는 것도 잠시, 고대의 주문으로 속박된 레드로스는 갑작스러운 고통을 느끼며 공허로 되돌아갔다.

검이 자신의 몸을 꿰뚫어도 레드로스는 소리 내어 웃었다. 하지만 검이 빛을 내며 태양과 같이 뜨거워지자, 그 즐거움은 극심한 고통으로 변했다.

레드로스는 수도 없이 검은 안개 속으로 끌려갔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시간이 정체되어버린 그곳으로 되돌아갔다. 언제나 같은 장소에서 같은 방식으로 깨어났다.

대부분의 나약한 영혼들은 미쳐버린 지 오래였다. 하지만 레드로스는 달랐다. 그는 거듭되는 실패에도 강철 같은 의지로 칼리스타를 해방하기 위해 애썼고, 덕분에 몇 번이고 되돌아올 수 있었다.

회상에 잠겼던 레드로스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끝나지 않을 임무를 수행하러 떠나는 칼리스타를 지켜봤다.

레드로스는 마음을 잠식해오는 서글픔을 느꼈다. 그동안의 노력은 전부 헛된 것이었을까?

쓰레쉬의 말이 옳았을까? 응징의 굴레로부터 칼리스타를 구하려던 자신의 노력은 사실 그녀가 아닌 자신을 위한 것이었을까?

칼리스타는 아무것도 모른 채 잠에 빠져 악몽 속을 거닐고 있었다. 만약 레드로스가 칼리스타를 악몽으로부터 구해준다면 과연 칼리스타가 고마워할까? 아니면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은 그를 증오할까?

레드로스는 끔찍한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고개를 저었다. 심지어 사악하게 웃고 있는 쓰레쉬의 얼굴마저 떠오르는 듯했다.

"내 머릿속에서 나가라." 레드로스는 쓰레쉬를 저주하며 으르렁거렸다.

그때 의심과 공포가 자리했던 그의 머릿속에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다. 아직 시도해보지 '않은' 방법이 있었다.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방법이었다.

"칼리스타." 레드로스가 그녀를 불렀다.

칼리스타는 돌아보지 않고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레드로스는 허리에 찬 검집을 풀어 바닥에 집어 던졌다. 이제 그에게 검은 필요 없었다.

"내가 당신을 배신했어." 레드로스가 소리쳤다.

칼리스타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눈을 치켜뜬 채 레드로스를 바라봤다.

"왕께서 명령을 내리셨을 때 내가 나서야 했어. 당신은 왕의 총애를 받았잖아. 그래서 헤카림은 당신을 없앨 구실을 찾고 있었지. 모든 일이 너무 순식간에 일어났어. 내가 제때 대처하고 당신과 함께 놈들과 맞서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지. 우리가 힘을 합쳐 싸웠다면 도망갈 수도 있었어! 하지만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 그러니 당신을 배신한 건 나야, 칼리스타."

칼리스타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배신자로군."

칼리스타의 손에서 영혼의 창이 만들어졌다. 창을 손에 쥔 그녀는 레드로스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레드로스는 방패를 풀어 바닥에 집어 던졌고, 칼리스타는 속도를 올렸다. 그는 양팔을 벌린 채 칼리스타의 공격을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첫 번째 창이 레드로스의 몸을 꿰뚫자 그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레드로스야말로 진정한 배신자였다. 그는 칼리스타를 사랑했다. 비록 어두운 밤, 홀로 그 사랑을 외치긴 했지만...

두 번째 창이 레드로스의 몸을 꿰뚫었다.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고 비틀거렸지만, 결국 쓰러지지 않고 버텼다.

레드로스는 칼리스타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지독한 배신이었다.

세 번째 창이 날아들자 레드로스는 무릎을 꿇었다.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지만, 그는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해야만 칼리스타를 끝없는 굴레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끝장내." 레드로스가 칼리스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를 죽이고 자유를 찾아."

두 사람은 잠깐 서로를 마주 보았다. 한 쌍의 죽지 않는 혼령이자 불사의 기운을 내뿜는 공허한 존재들이었다. 그때 레드로스는 오직 사랑만을 느꼈다. 그의 마음속 칼리스타는 생전 모습 그대로 근엄하고 아름다웠으며 강인했다.

"배신자들에게 죽음을." 말을 마친 칼리스타는 레드로스를 향해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칼리스타의 일격을 맞은 레드로스의 몸은 산산이 부서졌다. 그는 시야가 흐릿해지는 와중에도 칼리스타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무런 표정이 없던 얼굴에 공포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레드로스?" 생전의 목소리를 되찾은 칼리스타가 말했다.

깜짝 놀라 커진 두 눈에 눈물이 맺히는 것 같았다. 칼리스타는 쓰러지는 레드로스 옆으로 달려갔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칼리스타가 울먹이며 말했다.

레드로스는 그녀를 위로하고 싶었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당신을 위한 일이야.'

그 순간 주변이 어두워지더니 검은 안개가 레드로스를 향해 뻗쳐 오기 시작했다.

칼리스타는 레드로스를 쓰다듬으려 손을 뻗었지만, 희미해져 가는 그의 몸은 아무런 실체가 없었다. 칼리스타의 입술이 움직였지만, 검은 안개가 내는 광기 어린 굉음 때문에 레드로스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레드로스의 갑옷과 검이 바닥에 떨어져 먼지로 변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검은 공포가 손짓하자 그는 기쁜 마음으로 걸어 들어갔다.

창백한 유령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쓰레쉬가 어둠 속에서 예의 굶주린 얼굴로 웃으며 레드로스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지옥의 간수조차도 승리의 기쁨을 꺾을 수 없었다.

마침내 레드로스는 칼리스타를 해방했다.

드디어 해냈다.


통제할 수 없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공포.

걷잡을 수 없이 불타는 분노.

도망칠 곳 없이 목을 죄어오는 불안.

그리고 이 모든 것의 뒤에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 있었다. 생명의 온기를 먹어치우고, 암흑 속으로 영혼을 끌어들이려는 갈망.

수많은 영혼이 고통받으며 몸부림쳤다. 그들이 내는 비명의 불협화음은 귀청이 터질 듯이 요란했다.

이것이 바로 검은 안개였다.

오직 막강한 힘을 지닌 영혼만이 검은 안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여한이 남은 자들만이 그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

새하얀 돌바닥 위에 쓰러진 남자의 몸 아래로 진홍색 피가 고였다. 옆에 날이 부러진 그의 검이 보였다. 주변에 남자를 죽인 자들이 그림자를 드리우며 서 있었다. 하지만 남자의 눈엔 오직 그녀밖에 보이지 않았다.

여자의 눈은 남자의 눈을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남자는 그 안에서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남자는 옆으로 누운 채 점점 얕아져 가는 숨을 토해냈다.

그녀의 손은 생기가 없이 차가웠다. 하지만 남자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남자는 평온함이 마치 수의처럼 자신의 몸을 감싸는 것을 느꼈다. 고통과 두려움, 의혹은 이제 없었다.

철갑을 두른 남자의 손가락이 여자의 손을 움켜쥐었다. 살아서는 함께할 수 없었지만, 죽어서는 그녀와 함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그는 평온을 느꼈다...

아니, 뭔가 이상했다.

그는 현실로 돌아왔다.

아무것도 진실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수백 번 고쳐 죽으며 남긴 메아리이자 고통이었다.

그나마 지옥의 간수가 여기에 없어서 다행이었다. 있었다면 분명 자신을 보고 비웃었을 터였다.

이번엔 얼마나 시간이 지난 것일까? 알 길이 없었다. 수십 년, 아니 고작 몇 분이 지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정체되어버린 이 지독한 세계에서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순간 그의 기억이 되살아났고 기대감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마치 비 온 뒤 죽은 나무에서 피어나는 싹과 같았다. 그야말로 낯선 감각이었다.

레드로스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칼리스타가 있었다. 그는 잠깐이지만 벅찬 기쁨을 느꼈다. 자아를 찾은 그녀가 자신을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칼리스타의 표정은 차갑고 어두웠으며, 두 눈은 레드로스를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다. 물밀 듯 마음속을 채웠던 기대감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칼리스타의 눈은 레드로스를 향하고 있었지만 그 눈빛은 공허했다. 칼리스타는 자신만 들을 수 있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네 맹세를 받아주마." 말을 마친 칼리스타는 돌아서더니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렇게 그녀는 가버렸다.

레드로스는 칼리스타에게 닿으려 해봤지만, 이미 멀리 떨어진 상태였다. 북서쪽의 다른 대륙에서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배신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누군가 자신의 영혼을 바쳤다. 그들은 어떤 공포를 마주하게 될지 알지 못했다.

레드로스는 비통함과 증오심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자신을 저주하고 증오했다.

그는 희망 따윈 없다는 사실을 이제 깨달았다. 그리고 기대를 품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했다.

다른 이들도 그러하듯이, 칼리스타도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레드로스의 오만함과 고집 때문에 오래도록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오만함과 고집. 이 둘은 생전에도 그랬듯이, 죽어서도 레드로스를 괴롭혔다.

지옥의 간수 말이 맞았다. 칼리스타의 해방은 레드로스 '자신'을 위한 일이었다. 칼리스타는 자아를 잃었지만, 적어도 그처럼 고통받지는 않았다. 그녀에겐 목적이 있었다.

레드로스가 목에 걸린 펜던트를 잡아당기자 사슬로 된 줄이 끊어졌다. 그는 안개 속으로 펜던트를 던졌다.

더 이상 희망을 품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이 군도를 집어삼킨 사악한 저주가 풀릴 때까지 누구도 평온을 얻을 수 없었다.

"그럼 내가 끝내야겠군." 레드로스가 말했다.

그리고 그는 망각 속으로 사라졌다.


어둠 속에서 쓰레쉬가 걸어 나왔다. 그는 아무도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무릎을 꿇어 버려진 은색 펜던트를 집어 들었다.

어리석은 레드로스는 거의 성공할 뻔했다. 조금만 더 애썼으면 칼리스타를 해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수 세기에 걸친 시도 끝에 성공을 목전에 둔 시점에서 그는 결국 포기했다.

쓰레쉬는 잔인하게 미소 지었다. 그는 희망이 꺼져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을 좋아했다. 줄기에 난 열매가 썩어가고, 달콤한 과즙이 독약이 되는 광경은 그를 즐겁게 했다.

쓰레쉬는 랜턴을 열어 펜던트를 던져 넣고는 다시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그의 모습이 서서히 희미해졌다.

사슬이 철컹거리는 소리마저 잦아들 때쯤, 쓰레쉬는 완전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