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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1 22:31:37

나카노 신지


일본의 前 F1 드라이버
파일:나카노 신지.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나카노 신지
中野信治 | Nakano Shinji
출생 1971년 4월 1일 ([age(1971-04-01)]세)
일본 오사카부 타카츠키시
국적
[[일본|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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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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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출전 횟수 33경기
월드 챔피언 0회
그랑프리 우승 0회
포디움 0회
폴 포지션 0회
패스티스트 랩 0회
첫 경기 1997년 호주 그랑프리
마지막 경기 1998년 일본 그랑프리
소속 프로스트 갈루아 블롱데 (1997)
폰드멘탈 미나르디 팀 SpA (1998)

1. 개요2. 커리어
2.1. 카트2.2. 오픈휠 클래스 데뷔2.3. F3/30002.4. F1
2.4.1. 1997 시즌2.4.2. 1998 시즌2.4.3. 1999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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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前 일본의 F1 드라이버이다.

2. 커리어

2.1. 카트

아버지 츠네하루가 가업을 병행하며 FF 슈퍼 시빅 레이스와 전일본 F2 챔피언십에 출전한 레이싱 드라이버로, 나카노는 아버지가 스즈카 서킷에서 레이스에 참가하는 모습을 보며 자랐다. 1982년 여름, 아버지는 11살 나카노를 카트 트랙으로 데려가 카트 레이싱을 시작했다. 그 후 아버지는 자신의 레이싱 활동에서 은퇴하고 나카노에서 카트 팀의 매니저가 되어 지역 챔피언십을 시작으로 레이스 준비와 머신 유지보수를 담당했다. 또한 카네이시 카츠토모와 미츠사다 히데토시와 같은 카트 대회에 참가했고, 미츠사다는 지역 챔피언십에서 같은 클래스에 참가했다.

15살 때 카트 워크스 드라이버로 발탁되어 자신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고, 앞으로 프로 레이서와 포뮬러 1 드라이버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 결심은 평범한 것이 아니었지만 "반드시 실현하겠다"는 의식을 높이기 위해 스스로 행동과 지향점을 만들었고, 이후 15살의 나이에도 강한 결심이었다고 말했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즐거워하던 10대 중반, 그는 F1의 미래를 실현하기 위한 지속적인 결단으로 매일 집에서 금욕적인 체력 훈련을 하기 시작했지만 "내가 했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인지도를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 개인 생활에서 결단을 내렸다"고 말했다. 1987년에는 일본 최초로 홍콩에서 열린 국제 카트링 GP에서 우승[1]하였다.

2.2. 오픈휠 클래스 데뷔

1989년, 그는 토다 레이싱 소속으로 전일본 F3 챔피언십에 데뷔했다. 카트 출신인 나카노는 사륜차를 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으로 사륜차에 데뷔한 것이 바로 이 F3 머신이었다. 코스 폭이 좁아 예선 라이더 수가 적었던 쓰쿠바 레이스에서는 예선에 실패했지만 다른 레이스는 모두 완주했다. 서일본 서킷 9라운드에서 그는 7위를 기록했다.

이듬해인 1990년 혼다 히로토시의 권유로 19세의 나이에 나카지마 키카쿠의 경영 아래 홀로 영국으로 이주한 그는 노다 히데키와 함께 런던 교외에 있는 나카지마 사토루의 집에 머물면서 무술 훈련에 영어를 구사하며 포뮬러 복스홀 로터스에 출전했다. 실전 참가 측면에서 그는 파트너십을 맺은 영국의 크리스탈 레이싱 소속으로 출전해 포뮬러 복스홀 로터스에 출전했다. 실버스톤에서 빈센조 소스피리와 루벤스 바리첼로를 꺾고 한 번의 레이스에서 우승했고, 소스피리, 질 드 페란, 데이비드 쿨싸드에 이어 챔피언십 순위 5위를 차지했다.

같은 해 포뮬러 오펠 로터스 유로 챔피언십에도 출전하여 많은 유럽 서킷을 경험했다. FVL 라이벌인 소스피리, 드 페란, 바리첼로 외에도 마르셀 앨버스, 케니 블랙, 페드로 라미, 안드레 리베이로, 마이클 크룸헤가 함께 출전하여 기량을 연마했다. 이 시리즈는 종종 F1의 유럽 라운드 지원 이벤트로 같은 주말에 동시에 열리며, F1 패독이 어떤 모습인지 엿볼 수도 있었다.

1991년은 오펠 로터스 유로 시리즈에서 폴 스튜어트 레이싱과 경쟁하며 폴 포지션 1개와 가장 빠른 랩 1개를 기록한 두 번째 시즌이었다. 같은 해 PSR은 쿨싸드와 함께 브리티시 F3 챔피언십에 출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카노는 쿨싸드와 같은 방에서 1년 동안 살았던 룸메이트이기도 했다. 영국에서 2년 동안 생활한 후 영어 실력은 나카노의 무기 중 하나가 되었다.

2.3. F3/3000

1992년부터 나카지마 키카쿠가 전일본 F3와 F3000에 출전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특히 F3에서는 팀이 채택한 신차인 Ralt RT36이 전면 투사 면적이 넓어 직선이 치명적으로 느리고 랩 타임이 구형 RT35를 사용하는 다른 팀보다 1초 더 길고 후지에서 직선이 길어 2초 이상 간격이 계속 벌어졌다. 많은 팀이 RT36을 개막전에 포기하고 차량를 바꾼 반면 나카지마는 계속 사용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고, 후지에서 열린 3라운드에서는 예선을 통과하지 못했고 다른 차의 슬립스트림에 들어가지 못하는 직선이 치명적으로 느리는 문제로 계속 어려움을 겪었다. 악순환은 F3000과 함께 계속되었고 같은 해 나카지마 키카쿠가 팀을 떠났다.

1993년에는 슈퍼노바 레이싱으로 팀을 옮겼다. 참가 부문은 모든 일본 F3에만 집중되었습니다. 팀메이트는 이노우에 타카치호이다. 같은 해에 2위로 포디움 3개를 차지하는 등 안정적인 성적을 거두며 순위 5위를 차지했다. 1994년부터 이노우에와 빈센조 소스피리가 일본에서 섀시 유지보수를 담당했던 F1 팀 정비사 후지이케 쇼키치가 "지온 포뮬러 Ltd"의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초신성은 국제 F3000 챔피언십에 출전했고, 나카노는 일본 F3에 모두 출전했다. 후지에서 열린 2라운드에서 그는 오랫동안 기다려온 F3 우승을 폴에서 마무리하며 순위 3위를 차지했다. 같은 해 여름, 전일본 F3 챔피언십 출전이 유력했던 카게야마 마사미, 타카기 토라노스케, 나카노는 전일본 F3000 챔피언십 스즈카 라운드 7라운드에 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2.4. F1

2.4.1. 1997 시즌

나카노는 1996년 가을 일본 그랑프리 직후 스즈카에서 열린 리지에 테스트에 참가했고, 영어 실력에 대한 테스트를 받은 결과 세사레 피오리오헤 감독에게 인정받아 1997년 드라이버 계약을 체결했다. 특히 "19살에 영국으로 이주한 경험 덕분에 7년여가 지난 지금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며 영어로 소통하는 문제를 어렵지 않게 해결했다. 나카노는 카트 선수 시절부터 무겐의 지원을 받았으며, 리지에는 무겐 혼다 엔진을 보유한 팀이었다. 일본 드라이버로서 나카지마 사토루 이후 좋은 조건에서 F1에 데뷔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하지만 1997년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 팀이 매각되고 프랑스 F1 챔피언 알랭 프로스트가 이끄는 '프로스트 그랑프리'로 구조가 변경되었다. 또한 1998년부터 푸조 엔진을 장착하기로 결정하면서 나카노의 입지는 더욱 줄어들었다.

팀의 자원은 에이스 드라이버 올리비에 파니스에게 집중되었고 나카노는 시승이나 연습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팀 미팅은 프랑스어로 진행되었고 파니스는 신지가 쉽게 달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공감하기도 했다. 부상당한 파니스의 교체 선수로 출전한 야르노 트룰리의 활약에 가려졌지만 레이스 후반부에 테스트를 할 수 있었고 헝가리 그랑프리에서는 페라리의 에디 어바인과 치열한 접전 끝에 우승을 차지하며 6위를 차지했다. 나카노는 프로스트 팀에서의 대우에 대해 "알랭 프로스트가 와서 저를 꽤 힘들게 만든 것은 사실입니다. 리지에와 함께 있었다면 달랐을 것 같아요. 프로스트는 드라이버가 성장하기를 기다리는 타입이 아니라 기다릴 수 없는 타입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빨랐던 트룰리를 자연스럽게 타고 싶어하죠. 포뮬러 1 팀 구단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은 옳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육성하거나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그가 원하는 대로 달릴 수 없었기 때문이죠. 인종차별적인 문제는 전혀 아니었어요. 첫 레이스부터 선두를 놓고 싸웠던 프로스트의 트룰리처럼이었다면 달라졌을 거예요. 슈마허 같은 천재가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 않았어요."라고 2000년 인터뷰에서 말했다. 프로스트에서 이 경험을 쌓은 후 그는 "일본의 레이싱계는 시간이 많아요. 모두가 어느 정도 적응할 수 있는 환경이고 그것도 좋지만 언젠가는 누구나 어느 정도의 스피드를 달릴 수 있을 거예요. 일본에서 잘 되기 위해서는 연습과 경험을 바탕으로 무언가를 잘하는 것이 중요하고, 제한된 기간에도 곧바로 스피드를 보여주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스피드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죠. 일본에서 돌아온 후에는 영국에 머물렀어요." 라고 말했다. (처음부터 결과를 얻어야 하는) 포뮬러 1에서는 부정적인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2.4.2. 1998 시즌

이듬해인 1998년 프로스트를 떠나 시즌이 시작될 때까지 팀을 결정하지 못했지만 은퇴한 카타야마 우쿄의 후임으로 미나르디에 합류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의 계약 협상은 실패로 끝났고,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날 밀라노에서 쇼핑을 하던 중 당시 미나르디의 구단주였던 가브리엘레 루미를 우연히 몬테네그로네를 통해 만나 계약을 하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그 자리에서 다시 논의를 하다가 계약을 하게 된 에피소드라고 한다,

팀의 재정적 어려움과 경쟁력 없는 자동차로 인해 힘든 시즌이었지만, 그는 4번의 싱글 피니시를 성공했다. 또한 일본인 최초로 6연속 레이스를 완주한 선수이기도 하다. 그는 팀 주주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팀에 머물지 못하고 F1 시트를 잃게 되었다.

2.4.3. 1999 시즌

1999년 조던 무겐 혼다의 테스트 드라이버가 되었다. 시즌 중반 데이먼 힐이 은퇴를 암시했을 때만 해도 정규 승격 가능성이 있었지만 결국 힐은 마지막 레이스까지 현역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나카노는 기회를 얻지 못했다.
[1] 대회 역사상 최연소 우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