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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1-25 06:46:04

나시르 웃 딘 마흐무드 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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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즉위3. 티무르의 침공4. 최후의 노력5. 죽음과 사후

1. 개요

우르두어: ناصر الدین محمود شاه
힌디어: महमूद तुग़लक़
영어 Nasir-ud-Din Mahmud Shah

재위 1394년 3월 ~ 1413년 2월
생몰 ? ~ 1413년 2월

델리 술탄국의 24대 술탄. 알라 웃 딘 시칸다르 샤의 사후 어린 나이로 귀족들에게 옹립된 두 술탄 중 하나로써, 결국 단독 술탄이 되었으나 실권을 장악한 재상 말루 이크발 칸의 허수아비에 불과하였다. 여기에 내전 기간 도중 펀자브 / 힌두스탄 / 구자라트 / 말와 등지가 사실상 자립하였고, 1398년 대군과 함께 남하한 티무르에 패배하여 델리가 함락당한 후 제후들이 각각 술탄을 칭하며 확정되었다.

1405년에야 델리를 수복한 나시룻딘은 막 독립한 술탄국들이 그의 명목상의 정통성을 인정한 채로 자기들끼리 싸우는 데에 치중하는 틈에 힌두스탄 서부와 하리야나 등 제국의 핵심부를 수복하였다. 하지만 1409년 펀잡의 군벌 키즈르 칸의 침공을 받아 다시 여러 영토를 빼앗겼고, 1413년 나시룻딘이 사망하자 투글루크 조는 완전 멸망하였다. 사후 1년의 무정부 상태를 거쳐 키즈르 칸이 델리를 점령하며 사이드 왕조를 세우게 된다.

2. 즉위

나시르 웃 딘 무함마드 샤의 차남으로, 형 알라웃딘 시칸다르 샤가 요절한 후 불과 10세의 나이로 술탄에 추대되었다. 하지만 반대파 귀족들이 그의 사촌이자 (피로즈 샤의 장남) 파테흐 칸의 막내 아들 나시룻딘 누스라트 샤를 메와트의 유배지에서 구출하여 왕성인 피로자바드[1]를 장악, 대립 술탄으로 추대하였고 펀자브 하리아나 대부분이 충성을 서약하였다. 나시룻딘은 고작 (할지 왕조 시절의 왕성) 시리와 투글루카바드 성채만을 지녔다. 오늘날의 델리 광역권 내에서 두 술탄이 남북으로 대립하는 동안 델리 술탄국의 해체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1389년 힌두스탄의 자운푸르 총독으로 봉해졌던 말리크 살와르와 1391년 구자라트 총독에 봉해진 무자파르 샤가 각각 자운푸르 술탄국 구자라트 술탄국을 세워 자립하였고, 투글루크 조의 개국 세력인 코카르 부족 출신의 라호르 총독 샤이카 코카르 역시 펀자브 북부에서 자립하였다. 옛 무함마드 샤의 동맹이던 말와 총독 딜라와르 칸 역시 자립하여 말와 술탄국을 세웠고, 아부 바크르 샤의 동맹이던 메와트 총독 라자 나하르 칸도 자립하여 메와트 (메오)국을 세웠다. 이로써 델리 술탄국의 영토는 펀자브 남부와 하리아나 지역에 국한되어 창건 후 가장 축소되었다.

3. 티무르의 침공

파일:티무르 델리.png 파일:델리 티무르.jpg
티무르의 북인도 진격로 델리 전투를 묘사한 16세기 무굴 제국 삽화

1397년 후원자인 말루 이크발 칸이 델리를 장악하며 나시룻딘은 단독 술탄이 되었다. 하지만 같은해 말엽 티무르 제국의 태자 피르 무함마드가 말루 이크발의 동생 사랑 칸을 격파한 후 물탄을 포위하였다. 다만 포위가 길어지자 그는 조부인 티무르에 도움을 청하였고, 토크타미쉬 칸과의 전쟁 후 군대를 재정비한 티무르는 1398년 9월 인더스 강을 건너 북인도를 침공하였다. 티무르는 9만 2천의 병력을 양분하여 아미르 술레이만에게 물탄 포위를 돕게 하고, 자신은 잔여 병력과 투글루크 조의 본산이자 펀자브의 주요 도시인 데팔푸르로 향하였다. 여타 펀잡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데팔푸르 역시 항복하였고, 티무르는 물탄을 점령하고 북상한 피르 무함마드 및 아미르 술레이만과 합류하였다.

다만 얼마후 데팔푸르 주민들은 티무르가 임명한 태수를 죽이며 반기를 들었고, 보복을 두려워하며 도시를 버리고 인근의 험준한 바트네르 성채로 피신하였다. 분노한 티무르는 아미르 샤 말리크에게 주력 부대를 주어 델리로 보낸 후 자신은 1만의 별동대와 바트네르 성채를 포위하였다. 바트네르 성주인 라지푸트 장군 라오 달지트는 중과부적이라 여겨 티무르와 직접 만나 항복 협상에 나섰으나, 티무르가 5백의 피난민을 죽이자 성안에 남아있던 라오 달지트의 사촌이 성문을 걸어 잠갔다. 이에 티무르는 라오 달지트마저 죽이고 공성에 나섰다. 수비대는 처자식을 죽이고 결사 항전하였으나 계백 결국 성채는 함락되었고 힌두교도와 무슬림을 막론하고 성안에 남아있던 이들은 전부 학살당하였다.

그후 티무르는 무차별적인 학살과 약탈을 자행하며 델리로 진군하였고, 카가르 강에서 주력 부대와 합류하였다. 티무르는 직접 델리를 공격하는 대신 야무나 강을 건너 메루트 등 델리의 후방을 초토화시켰다. 이는 델리에 대한 외부 지원을 차단하고 더 많은 피난민들이 델리로 향하게 하여 성내에 공포심을 유발하려는 의도였다. 그리고 12월 11일 티무르는 7백의 정찰대 만을 대동하고 델리 주변에서 회전을 치를 곳을 모색하고 있었는데, 말루 이크발이 수천의 기병과 성을 나와 그를 기습하였다. 놀란 티무르는 3백의 결사대를 보내어 적군을 지연시키게 한 후, 그들의 희생을 틈타 진영으로 돌아갔다. 다만 델리 측의 '승전' 소식이 퍼지자 티무르 군영의 5만에 달하는 인도인 포로들이 구출 가능성에 들썩였고, 전투 도중 이들이 후방을 교란할 것을 우려한 티무르는 포로들을 다음날 전원 학살하였다. 인도판 신안대학살

14일 티무르는 결전지로 정한 푸슈트-이-비할리 (하우즈 카스 인근)에 병력을 배치하였고, 말루 이크발과 나시룻딘 역시 성을 나와 적과 대치하였다. 하지만 9만에 달하는 티무르 군대에 비해 델리 군대는 기병 4만과 보병 1만, 그리고 코끼리 125마리에 불과하였다. 말루 이크발과 나시룻딘은 주력 병력과 6백의 선발대 사이에 독을 묻힌 가시를 두른 상아를 지닌 코끼리 부대를 배치하였다. 16일 아침에 시작된 전투에서 티무르는 우선 좌익과 우익의 기병에게 치고 빠지기를 통해 적군을 교란시키게 하였고, 흙먼지가 자욱한 틈을 타 우측으로 우회하여 델리측 선발대를 기습해 격파하였다. 이후 좌우익이 총공격을 가하여 델리측 양익을 성문까지 몰아세웠고, 티무르는 델리측 본대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하지만 델리측 본대 앞에는 술탄의 비장의 무기인 코끼리 부대가 나열해 있었고, 처음으로 코끼리를 목격한 티무르 군대의 병사들은 크게 두려워하였다.

이에 티무르는 우선 참호를 파게 하여 진군을 멈추었는데, 이내 코끼리의 약점[2]을 파악하고는 거대한 마름쇠를 뿌려 꼼짝달싹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보급용으로 가져온 낙타들에 건초와 목재를 실은 후, 불을 붙이고 채찍질을 가하여 불타는 낙타 떼가 비명을 지르며 코끼리들에 돌격하게 하였다. 동물학대 놀란 코끼리들은 요동치다 마름쇠를 밟고 쓰러지거나 그대로 아군 쪽으로 도주하였고, 이로써 델리 진영이 혼란에 빠지자 티무르는 총공격에 나섰다. 이때 델리측 양익을 섬멸한 피르 무함마드의 양익이 돌아와 델리 군대를 양옆에서 포위하였고, 델리 군대는 악조건 속에서도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저녁 무렵이 되자 성문 앞까지 밀려나 결국 큰 사상자를 내고는 성내로 패주하였다. 티무르는 시가전으로 인한 병력 손실을 우려하여 적을 추격하지 않았고, 밤 사이 말루 이크발과 나시룻딘이 서문을 통해 도주하자 성안의 원로들은 티무르에게 항복 서신을 보내었다.

티무르는 항복을 승인, 안전을 보장하고 자신의 이름으로 쿠트바가 울려퍼지게 하였다. 그리고 사로잡은 코끼리들을 각지로 보내어 자신의 승전 소식을 알렸다. 이후 티무르와 주요 인사들은 시내 관광 및 배상금 징수를 위해 입성하였다. 동시에 호위를 위해 소수의 병력이 뒤따랐는데, 그들은 주민들과의 갈등을 겪은 후 살인과 약탈을 자행하였다. 그러자 다음날부터 나머지 병력도 입성하여 대대적으로 약탈을 벌였고, 원로들의 항의에 티무르는 자신이 명령한 것이 아니라 해명하였다. 하지만 겁에 질린 주민들이 자미 마스지드 (대사원)에 모여 저항하자 21일 티무르는 그들을 학살하라 명하였고, 이후 델리 전역은 5일간 유례 없는 약탈과 파괴를 겪었다. 그 과정에서 10만에서 20만에 달하는 주민들이 살해되어 거대한 해골탑이 세워지고, 시신은 새들의 먹이가 되었다. 생존자들은 노예가 되어 구르 왕조 때부터 2세기간 축적된 보물과 함께 사마르칸트로 압송되었다.

4. 최후의 노력

1398년 12월 31일 티무르 군대는 폐허가 된 델리를 떠나 중앙아시아로 돌아갔고, 겨우 목숨을 부지한 이들은 뒤따른 기근과 역병으로 고통받았다. 델리 전투 후 구자라트로 도주했던 나시룻딘은 구자라트 총독 무자파르 샤에게 원군을 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고, 말와 및 자운푸르 등지를 전전하게 되었다. 한편 티무르가 떠난 후 델리를 회복한 말루 이크발은 1405년 물탄의 키즈르 칸과 싸우다 낙마하여 사망하였고, 그제야 나시룻딘은 귀족들의 요청에 7년만에 델리로 귀환할 수 있었다. 다만 이미 투글루크 왕조는 영가의 난 이후의 서진 만큼이나 허울 뿐인 상태였다.

그럼에도 나시룻딘 샤는 델리의 병력을 총동원하여 제국의 재건을 시도하였다. 우선 나시룻딘은 그나마 조정의 지배력이 남아있던 서부 힌두스탄으로 나아가 카나우지를 점령하였고, 이에 반발한 자운푸르 술탄 샴스 웃딘 이브라힘 샤가 1407년 수복을 시도했으나 격퇴되었다. 1408년 나시룻딘은 로타크, 히사르 등 하리야나 지방 대부분을 수복하는 쾌거를 올렸다. 그러나 이내 펀잡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던 키지르 칸이 침공하여 6개월 간의 포위 끝에 1409년 로타크를 점령하였고, 이듬해에는 델리를 일부 포위하였다. 다만 키지르 칸은 얼마 후 보급품 부족으로 포위를 풀고 후퇴하였다.

5. 죽음과 사후

제국 중흥을 위해 노력하던 나시룻딘은 1413년 2월 후계자를 남기지 않은 채로 사망하였다. 나시룻딘의 아들 카디르 칸은 귀족들의 반란으로 술탄에 오르지 못하였고, 혼란이 지속되었다. 마지막 투글루크 술탄의 죽음과 함께 명목상으로나마 델리에 충성하던 지방 세력들은 완전히 독립하였고, 델리에서는 (할지 부족과 같은) 길자이 계열의 로디 부족 출신인 다울라트 칸이 집권하였다. 그리고 1413년 말엽 키즈르 칸이 델리를 재차 포위하였고, 이듬해 봄 다울라트 칸은 그에게 항복하였다. 이로써 투글루크 왕조는 완전히 막을 내리고 사이드 왕조가 들어서게 된다.

[1] 혹자는 아그라 근처의 피로자바드라고도 한다. 다만 그 피로자바드는 무굴 제국 대에 그리 명명된 도시이다 [2] 코끼리는 의외로 쉽게 놀라는 성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