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 막부 말기의 주요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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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7년 ~ 1793년 | 간세이 개혁 | |
1830년 ~ 1843년 | 텐보 개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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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8월 21일 | 나마무기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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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9월 30일 | 8월 18일의 정변 (八月十八日の政變) | |
1863년 ~ 1864년 | 시모노세키 전쟁 | |
1864년 7월 8일 | 이케다야 사건 | |
1864년 8월 20일 | 금문의 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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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 1월 27일 ~ 1869년 6월 27일 | 보신전쟁 | }}}}}}}}} |
나마무기 사건 (1862) 生麦事件 | Namamugi Inciden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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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시대에 그린 상상도[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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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35°29'40.1"N 139°40'18.3"E 사건이 발생한 지역. |
1862년 8월 21일 일본 사쓰마 번의 무사들이 영국인 관광객들에게 흉기를 휘둘러 1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당한 사건이다. 당시 사회적 상황의 특수성 때문에 막부 말기와 근대 일본사를 배울 때 짚고 넘어가게 되는 사건이기도 하다.
2. 사건의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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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당시 나마무기 마을 |
1862년 8월 21일[2] 상하이의 영국 상인 찰스 레녹스 리처드슨(Charles Lennox Richardson), 요코하마의 영국 상인 우드소프 찰스 클라크(Woodthorpe Charles Clark)와 윌리엄 마셜(William Marshall), 마셜의 처제 마가렛 왓슨 보라데일(Margaret Watson Borradaile)은 홍콩으로 돌아가기 전에 가와사키 근처의 도카이도 사원을 방문하기 위해 일본의 도카이도를 여행하고 있었다.
리처드슨 일행은 오후 2시 30분 요코하마에서 배를 타고 출발해 요코하마 항을 건너 가나가와 마을로 향했다. 그들은 북쪽의 나마무기 마을(지금의 요코하마시 츠루미구의 일부)을 지나다가 사쓰마 번의 번주인 시마즈 다다요시(島津茂久)의 아버지인 시마즈 히사미츠(島津久光)의 무장한 400명의 병력을 만났다. 사실 이들은 출발하기 전에 가나가와 치안판사로부터 영사관에 "오늘은 시마즈 히사미츠의 행렬이 있다"는 통지의 메시지를 받았다. 병사가 많은 행렬을 건너는 것은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네 명의 관광객은 그 충고를 무시하고 나마무기 마을로 갔다. #
사쓰마 번주의 아버지 시마즈 히사미츠는 당시 사쓰마 번의 최고 실권자로 권세를 휘두르고 있었다.[3] 당시 사쓰마 번의 실권을 쥔 시마즈 히사미츠는 칙사인 오오하라 시게노리(大原重德)를 수행하여 에도로 가서 에도 막부에 정치개혁인 공무합체(公武合体) 운동을 요구했다. 그러나 번주의 아버지라 해도 관직이 없던 히사미츠에게는 막부와 대등하게 대화할 자격이 없어 조정의 칙사를 수행함으로써 그 자격을 얻었다. 그리고 안세이 대옥으로 실각하고 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쇼군 후견직으로, 똑같이 실각하고 있었던 에치젠 후쿠이 번의 전 번주 마츠다이라 슌가쿠를 정사 총재직에 취임시켜, 막정 개혁의 목적을 완수했다. 이러한 목적을 완수하고 막부로부터 히사미츠를 "칙사를 준봉한다(천황의 사자로서 존중한다)"는 회답을 받고 에도를 떠나 교토로 올라가던 와중에 나마무기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사쓰마 번의 행렬은 선두인 철포조부터 가마까지 길게 이어졌다. 그 중에는 막부에 비밀로 했던 2문의 소포(小砲)가 포장되어 짐수레에 실려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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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타가와 사다히데가 그린 나마무기를 지나는 행렬의 모습 |
마침 사건 직전 사쓰마 행렬을 만난 미국 상인 유진 반 리드(Eugene Van Reed)[4]는 말에서 내리고 모자를 벗어 예를 표시했다. 사람들은 행렬이 지나가는 동안 이마를 땅에 대고 무릎을 꿇고 도게자를 했다. 하지만 시마즈 히사미츠가 교토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마주친 영국인 4명은 아무런 예의도 갖추지 않았다.[5] 영국인 행렬은 거의 도로폭으로 펼쳐져 있었으므로 결국 4명은 점점 행렬 속을 역행해 나아갔다. 아랑곳없이 정면에서 행렬을 방해하듯 다가오면서 사달이 났다. 영국인들은 무사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앞을 내다보며 말없이 말고삐를 잡았다. 그리고 그럭저럭 무난히 넘어가고 안도한 것도 잠시, 그보다 훨씬 큰 본대의 행렬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도 아직 위기감을 느낄 때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그대로 말의 움직임에 몸을 맡기고 전진했다. 그러나 행렬은 폭 7m 정도의 길을 가득 메우고 있어 이대로 가면 시마즈 히사미츠와 접촉할 것이 분명했다.
사쓰마 번 무사들은 이들에게 눈짓 경고와 손짓과 발짓으로 비키라고 경고했다.
결국 4명은 본대도 뚫고, 마침내 히사미츠가 타는 가마 근처까지 말을 몰아갔다. 나라하라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무례한 놈!"이라고 외치며 칼을 뽑아 리처드슨의 왼쪽 옆구리를 깊이 베고[8], 그대로 칼을 돌려 왼쪽 어깨부터 내리쳤다. 이것을 시작으로 4명의 사무라이가 마셜 일행을 일제히 습격했다. 격한 고함과 비명이 사방에 울려 퍼졌고 선혈이 낭자했다. 칼에 맞은 남자 3명은 그래도 날뛰는 말의 목을 필사적으로 돌려 그 자리를 피해 원래 왔던 길로 쏜살같이 되돌아갔다. 앞서 지나간 선도조 행렬이 이 모습을 멀찌감치서 지켜보다 옷을 피로 물들인 클라크의 말이 돌진하자 그 엄청난 기세에 눌려 길을 비켜섰다. 그런데 그 뒤 말에서 떨어져[9] 오른손으로 옆구리를 누르며 쭈그리고 앉아 있던 리처드슨이 지나가려 할 때 가이에다 노부요시가 막아섰으며, 또 다른 무사 쿠키무라 지큐(久木村治休)가 길 한가운데로 쑥 내디뎌 칼을 뽑아 스쳐 지나가다 리처드슨에게 칼을 휘둘렀다. 쿠키무라의 칼날은 상처를 누르고 있던 리처드슨의 오른손을 떨어뜨리고 다시 베인 옆구리를 다시 도려내 죽여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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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한 찰스 레녹스 리처드슨 |
연달아 마셜의 말이 다가오자 쿠키무라는 검을 들고 마셜을 죽일듯이 다가왔지만, 이를 눈치챈 마셜은 말을 타고 빠져 나가는 바람에 허벅지를 스치는 정도에 그쳤다. 반면 보라데일은 여자라서 사쓰마 번 무사들이 주저했던 모양인데 모자가 칼에 맞아 날라가서 머리카락만 잘렸을 뿐 부상을 입지는 않았다. 시마즈 히사미츠는 이 시간 내내 가마를 타고 아무 방해도 받지 않았다. 이 사건이 그에게 보고되었을 때, 그는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그 결과 사쓰마의 행렬은 계속 나아갔다. 공포에 질린 보라데일은 일사불란하게 말을 몰아 가장 먼저 거류지인 자딘 매세슨 상회로 들어갔다. 보라데일에게서 심상치 않은 사건의 이야기를 들은 상관의 상인들은 곧장 영국공사관의 존 닐(John Neale) 대리공사[10] 앞으로 달려갔다. 리처드슨의 시신을 부검한 결과 10개의 치명상을 입었으며, 이후 마셜과 클라크의 무덤 사이에 있는 요코하마 외국인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사건에 충격을 받은 거류지 외국인들은 히사미츠 일행에 대해 보복하고 반격을 결의하기 위한 집회를 연다. 회의는 격렬해졌고 네덜란드와 프랑스도 군사행동을 벌이는 데 찬성했지만 영국 대리공사 존 닐은 바이스 영사와 대립각을 세우며 반대해 끝까지 신중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회의는 밤늦게까지 이르렀지만 결의가 되지 않아 다음날로 미뤄졌으나, 결국 닐의 뜻대로 사건 처리를 외교협상에 맡기는 형태로 마무리됐다. 한편, 히사미츠의 일행은 영국과 일전 교전할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카나가와 숙소에서 휴식할 예정을 변경해, 숙소로 직행했다. 또 사건을 막부에 보고하기 위해 에도 사쓰마 저택에 심부름을 시켜 자세한 내용을 전했다.
가나가와 봉행의 아베 마사토가 관리를 보내 사정청취를 하였지만, 사쓰마 번에서는 "나마무기를 통행하고 있었을 때, 몇 명의 낭인들이 영국인들을 습격한 뒤, 도망쳐 행방불명이 되어 버렸다"라고 보고를 했다. 당시 외국에 대해 저자세였던 막부의 대응으로 그 권위와 영향력이 저하되었고, 사쓰마번은 막부에 대해 지어낸 이야기를 보고 한 것이다. 이 보고를 받은 유수역 니시쓰쿠 우에몬(西筑右衛門)은 이 이아기를 그대로 보고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음날 막부에 서한을 전송하되 실제로 영국인을 죽인 사무라이의 이름은 밝히지 않고 오카노 신스케(岡野新助)라고 하는 가공의 번사의 짓이라고 하였다. 니시쓰쿠의 이 서한으로 번내에서도 장래가 유망해 인재로 꼽혔던 나라하라, 가이에다, 쿠키무라 3명은 할복을 면했다.
당시 외교관으로 활동했던 어니스트 사토는 이 사건과 이후의 상황들을 일기에 적었다.
리처드슨은 홍콩의 보라데일 부인 및 우드소프 C. 클라크와 윌리엄 마셜이라는 모두 요코하마에 살고 있는 두 남자와 함께 가나가와와 가와사키 사이의 가도를 승마로 오다가
다이묘의 하인 행렬을 만나 옆으로 비켜서라는 말을 들었다. 도로 옆으로 가다 보면 사쓰마 번주의 아버지 시마즈 사부로(히사미츠)가 타고 있는 가마가 보였다. 이번에는 되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말머리를 돌리려 할 때 갑자기 여러 명이 무기를 휘두르며 날카로운 칼날이 달린 무거운 칼로 내리쳤다. 리처드슨은
빈사의 중상을 입고 말에서 떨어졌다.
(중략)
지금 와서 회고해 보면, 나는 닐 대령이 최상의 방책을 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상인들 계획은 엉뚱하고, 위세 좋고, 낭만적이어서 좋았다. 그것은 아마도 사쓰마시의 용감함을 누르고 한때는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외국 수병에 의해 일본의 유력한 다이묘가 영내에서 생포되었다면 타이쿤(쇼군)이 외적에 대해 국가를 방어하지 않는다는 명백한 증거가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타이쿤의 몰락은 실제 몰락하기 훨씬 이전에, 그리고 신정부 수립을 목표로 하는 각 번의 연합이 채 이루어지기도 전에 도래했을 것이다. 그 결과, 일본은 아마도 괴멸적인 무정부 상태가 되어, 여러 나라와의 충돌이 빈발하게 일어나, 심상치 않은 사태를 초래했을 것이다. 호도야를 습격하면 그 보복으로 나가사키의 외국인이 즉각 학살되고, 그 결과는 영-불-란(네덜란드) 원정군 파견을 보게 될 것이고, 수많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벌어져 천황의 국토는 엉망진창이 되었을 것이다. 그 사이에, 우리의 일본에 온 목적인 통상은 말살되어 버려, 유럽과 일본의 무수한 생명이, 시마즈 사부로의 생명과 맞바꾸어, 희생에 제공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중략)
지금 와서 회고해 보면, 나는 닐 대령이 최상의 방책을 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상인들 계획은 엉뚱하고, 위세 좋고, 낭만적이어서 좋았다. 그것은 아마도 사쓰마시의 용감함을 누르고 한때는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외국 수병에 의해 일본의 유력한 다이묘가 영내에서 생포되었다면 타이쿤(쇼군)이 외적에 대해 국가를 방어하지 않는다는 명백한 증거가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타이쿤의 몰락은 실제 몰락하기 훨씬 이전에, 그리고 신정부 수립을 목표로 하는 각 번의 연합이 채 이루어지기도 전에 도래했을 것이다. 그 결과, 일본은 아마도 괴멸적인 무정부 상태가 되어, 여러 나라와의 충돌이 빈발하게 일어나, 심상치 않은 사태를 초래했을 것이다. 호도야를 습격하면 그 보복으로 나가사키의 외국인이 즉각 학살되고, 그 결과는 영-불-란(네덜란드) 원정군 파견을 보게 될 것이고, 수많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벌어져 천황의 국토는 엉망진창이 되었을 것이다. 그 사이에, 우리의 일본에 온 목적인 통상은 말살되어 버려, 유럽과 일본의 무수한 생명이, 시마즈 사부로의 생명과 맞바꾸어, 희생에 제공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사건 현장에 수행인으로 동행했던 오쿠보 도시미치는 일지에 담담히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인(유럽인)이 나마무기 마을에서 다이묘 행렬 앞을 가로질러, 두 명을
참하고 다른 자들은 도망쳤으며, 카나가와 일대에서는 소동이 벌어졌다.
메이지 시대의 외교관으로 활동했던 하야시 다다스(林董)는 사건이 터진 요코하마에 거주하는 미국인 선교사 헵번의 학원[11]에서 영어를 배우고 있었는데, 하야시는 이 사건을 자신의 책의 기록했다. 그 기록을 요약하자면 이러하다. "이전부터 외국인과 일본인과의 마찰을 피하도록 거류지의 외국인을 위해서 새로운 산책로를 개착하는 등의 배려를 해 다이묘 행렬이 통행할 때는 도카이도의 통행을 삼가도록 주의 환기도 되어 있었고, 시마즈 사부로(히사미츠)의 통행 통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인 일행은 '아시아인을 취급하는 방법이라면 알고 있다' 등이라고 해서 다이묘 행렬을 구경하러 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통인 미국인 유진 반 리드는 '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 #
이 사건은 당시 일어났던 과격 양이파의 개인적인 살인 행위인 외국인 살상 사건(도젠지 사건, 이도가야 사건 등)과는 달리 높으신 분의 행렬의 사무라이 다수가 일제히 외국인을 베어버린 것이어서 매우 큰 사건이었다. 시마즈 히사미츠가 명령을 내렸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암묵적인 동의하에 사건이 발생한 것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특히 존황양이 운동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이라 매우 큰 정치적, 외교적 사건이 됐다.
3. 사건의 반응
3.1.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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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화가 찰스 워그먼[12]이 그린 사건의 모습 |
두 차례 영국 공사관이 습격당하는 사건(도젠지 습격사건)이 발생하고 배상금 문제도 해결되지 않던 차에 나마무기 사건이 터지면서 영국 측의 반일 감정은 악화일로로 치달았으며 일촉즉발의 상태였다.
하지만 존 닐 대리공사는 무력보복을 주장하는 주둔 외국인들을 억제하고 막부와의 외교 교섭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자세를 견지했다. 닐 대리공사는 사건 직후부터 여러 차례 막부 인사를 만나 리처드슨을 살해한 범인의 인도를 요구했다. 이후 1863년 2월 19일 본국의 훈령을 받은 대리공사 닐은 막부에 대해 공식 사과와 배상금 10만 파운드, 사쓰마 번에 대해 범인 공개 처벌과 리처드슨 유족에 대한 배상금 2만 5,000 파운드를 요구하고 이를 거부할 경우 사쓰마 번에게 무력행사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10만 파운드는 현재 기준으로 18억엔 이상이라는 어마어마한 액수다. 영국측은 일본으로부터 교섭을 받았을 경우를 상정해, 흥정하고 있었다고도 하지만, 이러한 강경한 태도로 막부와 번을 재촉한 영국측에게는 매우 괴로운 상황이 있었다. 당시 영국은 청나라와의 아편 전쟁과 러시아와의 크림 전쟁으로 힘에 부친 상태였다. 극동에는 전함을 47척밖에 배치하지 않았고, 그 중 대포를 충분히 탑재한 것은 단 2척에 불과했다. 게다가 전쟁이라면 막대한 병력과 비용이 소요된다. 위압적인 태도는 보여 주기 식이었을 뿐, 영국도 이러한 상황속에서 주일공사 및 파견군에 전투를 개시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영국의 요구에 대해 막부나 번측이 대책을 강구하고 반년 동안이나 우물쭈물 회신 기일을 연기하는 대응을 마지못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사정이 배경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3.2.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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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일본인이 그린 나마무기 사건 삽화 오른쪽의 글귀는 "히사미츠, 영국인을 베다." |
막부는 영국에서 시키는 대로 거류민에 대한 안전대책을 실시할 것을 약속했지만 정작 범인 처벌에 대해서는 사쓰마 번으로부터 '막부와 외국 사이에 다이묘 행렬에 대한 규칙을 정해 두지 않은 것이 문제이다.'라고 반론되어 범인을 영국에 인도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막부는 영국에 대한 회답을 미루는 등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이러한 막부의 상황에서 사쓰마 번뿐만 아니라 영국으로부터도 버림받고, 그 후 막부의 권위는 더욱 떨어지게 됐다.
이후 영국의 요구와 상락 중이던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갑자기 내놓은 양이 결행 소식에 머리를 싸맨 에도의 노중[13]들은 전투가 시작되면 이길 가망이 거의 없다고 판단해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배상금 지불에 응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1863년 5월, 미해결 상태인 2차 도젠지 사건 배상금 1만 파운드까지 포함한 11만 파운드를 아무런 협상 없이 영국에 지불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막부는 사쓰마 번의 지도자 시마즈 히사미츠의 위치를 가늠할 수 없었다. 히사미츠는 막정 개혁을 요구했다고는 하나 온건한 태도였고, 이이 나오스케의 공무합체를 지지하고 있었다. 막부로 하여금 적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해놓고 갑자기 과격한 사건을 일으켜 어려운 외교문제를 밀어붙였던 것이다. 당시의 막부에서는 다수의 군세를 동반하여 막부의 최고인사에 개입한 히사미츠에 대해 적의를 갖는 견해가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막부에 의한 영국과의 교섭에서는 막부가 배상 요구에 응하는 것 외에 별도로 사쓰마번에 대해서도 영국으로부터 배상을 요구하는 것을 승낙했다. 막부 스스로 '전국 정권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국제사회에 인정했지만, 그 중요성은 인식하지 못했다.
원래 히사미츠와는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던 양이파는 외국인을 살상한 히사미츠에게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당시 여러 번에서는 "외국인들은 거만한 태도로 일본인을 접하여 신성한 국토를 더럽히고 제멋대로 상업을 하여 일본 경제에 타격을 주고 있다"고 생각했고, 각지에서 양이론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사쓰마는 우리의 동지가 아닐까"라는 생각에 사로잡힌 것이다. 당시 외국인 살상은 일반적으로 영웅 행위로 칭송되고 있었으며, 외국인들의 안하무인한 행동을 보고 듣고 외국인 살인 사건을 벌이는 번사들도 많았다.[14] 또한 당시 외국인들의 혐오 감정이 컸던 만큼 대중들은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고 한다. 도카이도 부근의 민중들은 '과연 사쓰마 사마'라고 환호하며 히사미츠의 행렬을 맞이했다고 한다. 고메이 덴노는 이 사건으로 시마즈 히사미츠의 노고를 치하했으며, 이는 관직과 위계가 없었던 시마즈 히사미츠에게는 이례적인 대우였다.
사건의 책임자인 사쓰마 번은 영국의 배상 요구를 완강히 거부했다. 행렬을 어지럽힌 자는 베어버리는 것이 공법이기 때문에 잘못한 것은 영국인이고, 이들을 살상한 것은 당연한 조치로 배상금을 지불할 의무가 없다고 밝혀 영국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할 뜻이었다. 또한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면, 영국으로부터 "사건의 책임자인 시마즈 히사미츠의 신병을 내놓아라"라고 요구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863년 6월 27일, 영국 해군의 함대가 사쓰마에 들어오는 것을 초래하게 되었다.
덧붙여서 당시, 영국 정부 통역관 어니스트 사토[15]와 같은 우수한 통역자가 존재하고 있었다고 해도, 의사소통에 시간이 걸리는 일도 적지 않았다. 예를 들어 강한 사쓰마 사투리를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중간에 네덜란드어 통역을 포함시키는 등의 대책을 세우는 등 여러 가지로 고생했다.
3.3. 기타
1862년 9월 16일 화요일 일본 헤럴드 엑스트라에 따르면 리처드슨이 중국에서 승마를 하는 동안 중국인들에게 인종 차별적인 행동을 했다는 주장이 나중에 제기되었다. 상하이에서 사업하면서 ‘동양인들을 대하는 법을 잘 안다’며 툭하면 채찍을 휘둘렀다. # 보도에 따르면 리처드슨의 삼촌은 조카의 죽음에 놀라지 않았다고 하며, 그가 무모하고 고집불통이라고 비난했다. # 다만, 리처드슨은 '일본은 내가 방문한 최고의 나라'라는 편지를 쓰기도 해 일본에 대한 악감정은 없었던듯 하다. #프레드릭 라이트-브루스 중국 주재 영국 특사 역시 이 사건의 피해자 리처드슨을 좋게 평가하지 않았으며 #, 사건이 일어나기 전 히사미츠의 행렬을 만난 미국인 상인 유진 반 리드는 "너희들이 자초한 재난이다"라고 말하며 영국인 네 명을 비판하는 의견을 냈다. #
또 사건 직후 현장에 달려간 윌리엄 윌리스(William Willis) 의사는 형에게 보낸 편지에 "자랑스러운 일본인에게 가장 범속한 외국인으로부터 자신의 면전에서 남을 매도하는 듯한 거만한 태도를 당하는 것은 필경 참을 수 없는 굴욕일 것입니다. 저는 지난번 참혹한 나마무기 사건으로 인해 그와 같은 외국인의 행동이 위험하다는 것이 판명되지 않았다면, 브라운, 제임스, 로버트슨 같은 남자가 타이쿤(쇼군)이, 그리고 천황의 행렬 속에서도 태연하게 말을 몰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듭니다."라고 적었다. #
매우 큰 사건이었기 때문에, 1863년 11월 15일 뉴욕 타임스에도 이 사건에 대한 기사가 실렸는데, 영국인 4인을 비판하는 기사였다. 그것도 모처럼 외국인들이 존황양이 감정을 누그러뜨려 입국을 허가받아 놓았는데 이 영국놈들이 망쳐놓아서 죽기 싫으면 출국하는 게 현명하겠다는 식으로, 당시 재일 외국인들이 놓여 있던 살얼음판 같던 정세를 볼 수 있어 흥미롭다.
그 분노가 잔인했다고는 하나, 우리는 사실은 그 불운한 영국인이 먼저 원인을 제공한 사람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일본 현지의 평민은 그 자리에 있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을 정도로 고귀한 행렬에서 말을 몰았으며, 분명히 그가 당한 일이 그가 저지른 일보다 심하기는 하다지만 그가 도로를 침범한 일은 제국의 최고위급 귀족을 모욕한 일로 간주되었고 그 때문에 공격을 당해 죽게 된 것이다. 리처드슨에게 일본에 거주하고 무역을 할 권리를 준 협정은 리처드슨에게 일본의 법률, 관습, 제도를 위반할 권리를 주지 않았다.
― 뉴욕 타임스, The Anglo-Japanese War. #
― 뉴욕 타임스, The Anglo-Japanese War. #
4. 전쟁의 발발
자세한 내용은 사쓰에이 전쟁 문서 참고하십시오.1863년 6월 22일, 자신들의 요구에 전혀 응하지 않은 사쓰마 번에 화가 난 닐 대리공사는 직접 협상을 위해 7척의 전함과 함께 가고시마로 향했다. 며칠 후에 현지에 도착하여, 다시 배상 청구서를 제시해, 24시간 이내에 회답하도록 재촉한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도 영국측에 전투 의지는 없었으며 전함으로 위압하면 사쓰마 번도 겁에 질려 요구에 응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사쓰마 번은 "나마무기 사건에 대해 책임은 없다"는 응답서를 영국 함대에 제출하고 영국 측의 요구를 거부했다. 협상은 성립되지 않았고, 7월 2일 영국함에 의한 사쓰마번선의 나포를 계기로 사쓰마번이 영국 함대를 포격하면서 사쓰에이 전쟁이 발발했다. 사쓰마는 가고시마성 아래의 약 10%를 소실하고 포대와 탄약고, 함선에 피해를 입었다. 영국군도 기함 유라이알라스의 함장과 부함장 등 13명이 전사하고 군함 3척이 파손되는 등 손해를 입었다. 이후 사쓰마가 막부에서 2만 5천 파운드를 빌려 배상금을 지불하며 전쟁은 일단락됐다. 책임자 처벌에 대해서는 ‘도망갔기에 찾을 수 없다’며 꽁꽁 숨겼고 영국 역시 그냥 넘어갔다.
이 전쟁으로 패배를 겪은 사쓰마 번은 함포 성능의 차이에 근대화의 필요성을 인식하며 양이에서 개국으로 입장을 전환했으며, 영국과 우호 관계가 된다. 1865년 해외 진출을 금지한 막부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청년 19명을 영국으로 유학 보내 어느 지역보다 빨리 신문물을 익힌것도 개국으로 입장으로 바꿨기 때문에 가능했다.[16] 이후 사쓰마는 조슈 번과 함께 메이지 유신의 실현에 지도적 역할을 했다. 이러한 영향으로 나마무기 사건은 일본의 역사적 전환의 계기를 만들었고, 메이지 유신의 흐름을 만든 사건 중 하나로 여기지기도 한다.
역사학자 마치다 아키히로(町田明広)[17]는 나마무기 사건을 일본 역사의 대전환이라고 할 수 있는 대사건이라고 평했다. 또한 마치다는 "교과서에 기술되고 있을 정도로 대형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외국인 살상사건으로 치부되고 있다. 필자는 이 실태에 큰 위화감이 있어 매우 유감이다."라고 적었다. #
5. 여담
말년의 쿠키무라 지큐 (중앙) |
-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서는 막부 말기를 배울때 당연히 등장하는 사건 중 하나이며, 사쓰에이 전쟁도 같이 배운다. 막부 말기 존황양이의 폭풍이 몰아치고 있을 무렵 탈번 낭인들에 의한 외국인 습격 살상 사건은 미수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20건 이상이나 되지만 교과서에 실려 있는 것은 사건의 중요성으로 인해 나마무기 사건만 실렸다고 한다. #
- 이듬해인 1863년에는 낭인에 의해 프랑스인이 살해당한 '이도가야 사건(井土ヶ谷事件)'이 발생했다. 1868년에는 토사 번의 무사들에 의해 프랑스군 11명이 살해당한 '사카이 사건(堺事件)'이 발생한다. 이 사건은 피해자 수가 많기도 했고 군인이었기 때문에 메이지 덴노가 직접 사죄했을 정도로 외교적으로 큰 사건이었다. 다만 이 두 사건은 교과서에 잘 나오지 않고 전쟁까지 터진 나마무기 사건에 비해 인지도가 떨어지는 편이다.
- 사건의 발생 장소가 된 주택가의 도로변에는 지금도 작은 간판이 걸려 당시 사건의 내용을 전하고 있다. #
2013년 이 사건으로 사망한 찰스 리처드슨의 생전 모습을 전하는 사진이 발견됐다. 자료관에 따르면 사건 직후 시신을 찍은 사진은 남아 있었지만 생전 모습을 전하는 사진이 발견된 것은 처음이다. 여백에는 영어로 요코하마 근교의 도카이도에서 사쓰마번의 하인이 베어 죽었다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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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처드슨이 사망한 장소에는 '나마무기 사건의 비'가 있다. 요코하마시 등록 지역 문화재이기도 하다. 소년 시절에 이 사건을 목격하고 사건의 중대성을 인식하고 있던 쓰루미무라의 구로카와 쇼조(黒川荘三)가 이국땅에서 비참하게 죽은 리처드슨의 죽음을 애도하며 사건의 풍화를 막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 사비를 들여 1883년에 사건비를 세웠다, 오랜 마음의 짐에서 벗어난 나마무기 사람들도 합심해 위령제도 올렸다. 1911년 8월 21일 50년제는 구로카와 쇼조가 독자적으로 치렀지만, 1922년 60년제는 지역 사람들과 공동으로 성대하게 치렀다. 현재는 나마무기인들의 나마무기 사건 현창회에 의해 매년 추도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
나마무기 사건을 재현한 드라마 '천황의 세기' | 나마무기 사건을 재현한 NHK 대하드라마 '나는 듯이'[18] 번역 |
NHK 대하드라마 나는 듯이, 도쿠가와 요시노부, 세고돈에서도 이 사건이 등장한다. 각색이 들어가, 실제 내용과 다른 부분이 있다.
- 한 일본인이 현지 요코하마시 나마무기에서 고교생이나 20대 대학생들에게 나마무기 사건에 대해 물어봤는데 "아…학교에서 배웠다"라고, 한결같이 같은 대답이 돌아왔지만, 흥미는 전혀 없는 눈치였다고 한다. 대부분 "외국인이 일본인에게 살해된 사건"이라는 대략적인 내용은 알고 있었다고 한다. 오히려 40대 이상이 흥미를 보였다고. #
- 2012년 이 사건으로 사망한 찰스 리처드슨의 자손인 마이클 웨이스가 요코하마시 나카구의 요코하마 외국인 묘지를 방문하여 조상의 묘 앞에 꽃을 올렸다. 그는 "자손으로는 기쁘지 않지만, 사건이 메이지 유신에 영향을 준 것은 틀림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
(왼쪽부터)
시마즈 가문 32대 당주 시마즈 노부히사[19], 영국대사관 다니엘 솔다, 나마무기 사건 자료관 관장 아사우미 다케오, 가이에다 노부요시의 증손자인 가이에다 다다요시가 요코하마 외국인 묘지에 있는 나마무기 사건 피해자들의 무덤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시마즈 노부히사의 바로 왼쪽에 있는 것이 클라크의 무덤으로, 마셜의 무덤(사진 밖 왼쪽)과 함께 있다. 두 묘소 바로 앞에 리처드슨의 묘비가 있다.
- 이 사건은 미국의 유명 소설가 제임스 클라벨(James Clavell)[20]이 소설로 쓰기도 했다. 제목은 'Gai-Jin'. 나마무기 사건과 그 후의 일어난 사쓰에이 전쟁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 일본 최초의 경마장인 네기시 경마장(根岸競馬場)은 나마무기 사건의 배상 요구의 하나로 만들어졌다. 거류 외국인들 사이에서 "사람이 오지 않는 안전한 장소에서 경마를 열고 싶다"는 목소리가 높아졌기 때문이다.[21]
- 막부 말기를 주제로 한 일본 만화 풍운아들(風雲児たち)에서는 32권 한권이 통째로 이 사건을 그리고 있다.
- 2021년 에노시마 전철의 인기 열차 옆을 자전거로 달린 한 외국인이 많은 철도 동호인에게 사진을 찍혔다. 당시 외국인 남성과 철도 동호인의 트러블이 발생했는데 이 사건을 ' 레이와 시대의 나마무기 사건'이라고도 불리며 일종의 밈이 됐다. # #
6. 관련 문서
7. 외부 링크
[1]
작가는
우키요에 화가 하야카와 쇼잔(早川松山).
[2]
양력
9월 14일
[3]
선대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동생으로,
국부(国父)라는 호칭으로 불리며 실권을 장악했다.
[4]
하와이 왕국의 총영사 자격을 얻어 에도 막부와 국교 체결 교섭을 실시하지만 실패했다. 이후 일본에서 무역상으로 활동했다. 일본어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었으며, 굉장한 일본통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5]
에도 시대 이후, 다이묘 행렬은 다이묘의 권위와 격식의 상징으로 여겨지게 된다. 그런 만큼 행렬의 앞을 가로지르거나 줄을 흐트러뜨리거나 하는 행위는 무례로 여겨져 그러한 사람은 현장에서 베어버리는 것(무례 토벌)이 공적으로 용서되고 있었다. 그러나 사건의 피해자가 된 영국인들은 이러한 인식이 없었기 때문에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기에 이른다.
[6]
일본 육군의 아버지 오무라 마스지로와의 대립으로 유명하다. 오무라의 암살을 교사했다는 의혹을 받아 백작으로 승작하지 못하고 자작에 그쳤다.
[7]
행차(行次)의 수행자들을 단속하던 직책.
[8]
키자에몬의 동생인 나라하라 시게루(奈良原)가 베었다는 설도 있다.
[9]
사건 현장에서 600m 떨어진 곳이며, 이 곳에는 사건비가 세워졌다.
[10]
풀네임 Edward St. John Neale
[11]
이후
메이지가쿠인대학이 된다.
[12]
막부 말기에 기자로 일본에 들어와, 당시 일본의 다양한 모습, 사건, 풍속을 그렸다.
[13]
막부에서 가장 명망높은, 최고 원로 가신들을 의미한다.
[14]
어니스트 사토는 이러한 테러 행위에 대해 대비했다고 일기에 적고 있다. "나는 상당량의 화약, 총알, 뇌관과 함께 한 정의 권총을 샀다. 외국인 거류지의 경계 밖으로 나가는 경우에는 모두가 항상 권총을 휴대하고, 항상 그것을 베개 아래에 넣어 잤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
[15]
어니스트 사토는 이 사건을 일기에 간략하게 적어 사건을 요약하기도 했다.
[16]
사쓰마가 일본의 무수히 많은 지방 가운데 메이지 유신 초기 유달리 많은 인재를 배출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17]
칸다외국어대학 교수. 주 연구분야는 사쓰마번을 중심으로 한 막부말기의 정치사, 메이지유신 및 당대의 대외인식론(존황양이론)이다.
[18]
19화의 등장한다.
[19]
고노에 후미마로의 외손자들 중 하나이며, 일본의 제79대 총리인
호소카와 모리히로와 외사촌 관계이다.
[20]
대표작은
쇼군(Shōgun)으로 이 작품으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21]
현재는 요코하마 경마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