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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회당 집행부서기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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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대 일본사회당 중앙집행위원장 나리타 도모미 [ruby(成田知巳, ruby=なりた ともみ)] | Tomomi Narit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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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73283><colcolor=#fff> 출생 | 1912년 9월 15일 |
일본 제국 카가와현 타카마츠 | |
사망 | 1979년 3월 9일 (향년 66세) |
일본 도쿄도 | |
국적 |
[[일본 제국| ]][[틀:국기| ]][[틀:국기| ]]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아버지 | 나리타 타카지 |
학력 | 도쿄대학 |
직업 | 정치인 |
정당 |
|
파벌 |
→ |
[clearfix]
1. 개요
일본의 정치인. 1968년부터 1977년까지 약 9년간 일본사회당의 중앙위원장직을 역임하였다. 일본사회당 내에서는 대표적인 친중파로 분류되었다.2. 생애
2.1. 정치 활동
1946년, 무소속으로 중의원 의원에 출마하나 낙선하였다. 1년 뒤 치러진 1947년의 총선거에서 사회당 후보로 입후보해 당선되었다. 지역구는 카가와현 선거구.사회당이 좌우파 분쟁으로 갈라질 당시에는 스즈키 모사부로의 좌파사회당에 참여했다. 1955년, 좌파 사회당과 우파 사회당이 통합되자 그는 총무국장으로 취임하였고 이후 1960년 아사누마 이네지로 위원장에 의하여 정책심의회장에 지명되었다.
1960년대, 당내 우파였던 에다 사부로 서기장이 구조개혁론을 외치자 나리타 의원 역시 이에 동참하였다. 1962년 에다 사부로가 서기장직을 그만두자 그는 에다의 뒤를 이어 사회당의 서기장 직에 오른다. 그러나 점차 수정주의 노선을 받아들여 당내 우파, 즉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추구한 에다 사부로와는 달리, 나리타 도모미는 친중파이자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좌파적인 구조개혁론을 추구하였으므로 에다 사부로와는 멀어지게 되었다.
1967년 임시총회에서 건강보험법 개정안 분쟁의 책임을 지고 집행부가 사임하자 나리타 역시 사임하였으나 1년 뒤인 1968년 가쓰마타 세이이치가 선거 대참패를 이유로 중앙집행위원장직을 사임하면서 나리타는 당내 좌파 파벌의 지지를 받으면서 1968년 사회당의 당수로 취임하게 된다.
2.2. 사회당의 당수로서
그러나 1968년 참의원 선거에 이어 1969년 중의원 선거에서도 100석을 밑도는 참패를 거두자, 사임을 발표했으나 당내 좌파 파벌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후는 심사숙고하여서 1971년 참의원 선거에서 사회당이 39석을 획득하고, 1972년 중의원 선거에서 세를 어느정도 회복하였으며 1974년 참의원 선거와 1976년 중의원 선거에서 사회당의 세가 크게 커진것은 아니었지만, 여야백중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당내 양대 좌파 파벌인 사사키파와 사회주의 협회가 각각 친중과 친소의 노선을 견지하며 충돌하였고 나리타 도모미 위원장은 친중-친소파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면서 무능함을 드러냈다.결국 1976년 중의원 선거에서 사회당이 정수가 20석이 증가했음에도 의석은 11석이 늘어나는 정도(112->123석)의 애매한 결과가 나오자 내부 계파갈등이 재발하여 1977년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에다 사부로가 사민련이라는 별도의 정당을 차리며 조직력이 누수되었고 결국 사회당이 1968년 칌의원 선거때의 28석을 밑도는 27석이라는 최악의 참패를 당하고 참의원 전체에서 여야역전도 실현되지 못하자, 나리타 도모미 위원장은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9년만에 사회당의 당수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당수직을 물러난지 2년만인 1979년 사망하였다.
3. 평가
1969년 총선 참패로 잃어버린 당세를 상당히 회복하기도 하였고 1970년대 자민당이 연달아 의회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하면서 어느정도의 성과를 거두기는 하였으나, 회복한 당세를 결국 당내 파벌 분쟁으로 모두 잃어버렸기 때문에 평가는 전반적으로 부정적이다.그의 기간 도중에는 각복전쟁과 록히드 사건이 있었지만 사회당은 자민당의 계파 싸움에 밀려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 오히려 문화대혁명을 찬동하느냐 마느냐의 의미 없는 문제로 논쟁했으며 이와중에 나리타 도모미 자신이 속한 친중파가 승리해 결국 문혁을 지지하게 되는(...) 등의 황당한 일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다나카 가쿠에이가 대만과 단교하고 중일수교를 맺었던 시절이었고 미국에서도 중국과 수교해야된다는 말이 나오던때였던걸 생각하면 중국과의 관계를 강화하는것이 이상할게 없기는 했지만 그렇다해도 별의미없는 행보를 보인던것에 있어서 비판이 나올수밖에 없기는 했다.
4. 소속 정당
<rowcolor=#fff> 소속 | 기간 | 비고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46 | 정계 입문 |
|
1947 - 1951 | 입당 |
|
1951 - 1955 | 창당 |
|
1955 - 1979 |
합당 정계 은퇴[1] 사망 |
5. 선거 이력
<rowcolor=#ffffff>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47 | 제23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 카가와 1구 |
|
25,818 (15.7%) | 당선 (2위) | 초선 |
1949 | 제24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 24,452 (12.9%) | 당선 (3위) | 재선 | ||
1952 | 제25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 35,225 (16.2%) | 당선 (2위) | 3선[a] | ||
1953 | 제26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 43,483 (21.1%) | 4선[a] | |||
1955 | 제27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 45,105 (21.2%) | 당선 (2위) | 5선[a] | ||
1958 | 제28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 59,637 (26.5%) | 당선 (1위) | 6선 | ||
1960 | 제29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 58,207 (25.5%) | 7선 | |||
1963 | 제30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 57,511 (24.6%) | 8선 | |||
1967 | 제31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 64,194 (26.8%) | 9선 | |||
1969 | 제32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 62,101 (26.0%) | 10선 | |||
1972 | 제33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 66,612 (25.1%) | 11선 | |||
1976 | 제34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 | 59,642 (20.7%) | 당선 (2위) | 12선[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