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8-11 20:01:55

나덕환

성명 나덕환(羅德煥)
산남(山南)
생몰 1904년 4월 17일 ~ 1971년 2월 21일
출생지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우곡리
본관 나주 나씨
사망지 전라남도 순천군 순천읍 저전리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나덕환은 1904년 4월 17일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우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1 운동 때 영광군에서 벌어진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4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그 후 영광 용산교회에 출석하며 그 지역의 선교사 미스 T.D. 머피의 후원으로 서울에 있는 피어선성경학원에 재학해 3년간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졸업했다.

졸업 후 일본 히로시마에 있는 흥문중학교 미션학교에 유학했으며, 흥문중학교를 졸업한 뒤 전남 무안읍교회에 전도사로서 사역하다가 다시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진학했다. 이 무렵 순천 중앙교회에서 같은 시내에 있는 승주 기도처[1]를 마련하자, 나덕환은 그곳에 초청되어 전도사로서 시무했다. 그러나 그가 장로회신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했고, 선교부에서는 신학교를 폐쇄했다. 이에 나덕환은 동창인 유재한과 함께 1년간 통신으로 공부를 하고 졸업했다.

1939년 3월 승주 기도처가 여수 승주교회로 승격이 되었고, 나덕환은 1939년 가을 순천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여수 승주교회의 시무를 맡았다. 그는 신자들 앞에서 식민지 통치를 비판하고 궁성요배(宮城遙拜)와 신사참배를 거부하라는 내용의 설교를 여러차례 수행했다. 그러던 중 순천 선교부에서 사역하던 변요한 선교사가 일제의 강제 퇴거로 순천을 떠났을 때 그를 위해 송별예배를 드렸던 순천 지방의 교역자 15명이 체포된 사건이 벌어졌다. 일제는 이 사건의 배후를 밝힌다며 나덕환까지 체포했다.

나덕환은 광주형무소에서 몇년 간 갇혀있다가 1942년 9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다시 불경죄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아 2년간 옥고를 치르고 1943년 11월 4일에 출옥했다. 이후 고향에 칩거했다가 8.15 광복을 맞이했다. 광복 후엔 다시 여수 승주교회 목사로 복귀했으며 한국독립당 전임위원을 맡기도 했다.

1948년 여수·순천 10.19 사건이 벌어지면서 많은 순천 지역 교역자들이 처형당하자, 그는 신분을 숨기며 순천의 여러 인사들과 접촉해 그들을 바깥으로 피신시켰다.[2] 1950년 6.25 전쟁이 벌어지자 여수에서 목회 활동을 하던 손양원 목사에게 어서 피난할 것을 권했지만, 손양원이 "목사님들은 복이 있습니다. 양떼가 강건하니 양떼를 몰고 피난을 갈 수 있습니다마는 나는 모든 양떼가 병들어 있습니다. 이들을 버리고 나만 홀로 피난을 갈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자 어쩔 수 없이 홀로 피난갔다.

나덕환은 1959년 9월 대전 총회가 분열될 때 합동 측에 합류하여 부총회장으로 선임되었지만 1960년 2월 새문안교회에서 모이는 통합 총회에 합류했으며, 1961년 9월 제46회 총회장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목회활동을 하던 그는 1971년 2월 21일 전라남도 순천군 순천읍 저전리에서 병사했다. 향년 66세.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나덕환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순천제일교회의 전신 [2] 이때 손양원이 자신의 두아들을 살해한 학생을 용서하기로 결정하고 나덕환에게 부탁한 일이 있었다. 나덕환은 즉결처분 직전이던 그 학생을 손양원의 양자로 삼게 해 사형 집행을 중단하게 했다. 이후 손양원은 양자로 삼은 그를 부산 고려 고등 성경학교에 입학시켜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게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