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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13:57

나나 사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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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사후 추서

1. 개요

나나 사힙[1](1824 ~ 1859?)은 마라타 제국 페슈와 정권의 일족이자, 제9대 페슈와이다.

2. 생애

바지라오 2세의 처조카로 1827년 비투르에 살던 바지라오 2세의 양자가 되었다. 1851년 바지라오 2세가 사망하였으나 영국이 입양에 의한 상속권을 인정하지 않아[2] 바지라오 2세의 여러 작위와 연금을 상속받지 못했다. 1853년 이 문제를 탄원하기 위해 잉글랜드로 사절을 보내나 거부당하고 1855년 사절이 빈손으로 돌아오자, 사힙은 자신의 명예를 실추당한 것으로 여기고 영국에 반발심을 품게 되었다.[3]

1857년 사힙은 마라타 제국의 부활을 꿈꾸며 세포이 항쟁 시기 군사를 일으켜, 세포이 반란군과 합세해 6월 칸푸르를 점령하고 자신을 정당한 페슈와로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는 오래 가지 못했고, 같은 해 말 다시 영국군이 칸푸르를 점령한 후 도피하였는데 이후 사힙의 행방에 대해서는 다양한 추측( 네팔 도피설, 시호르 도피설 등)만 무성할 뿐이다.

3. 사후 추서

1858년 6월, 다른 많은 항쟁 지도자들도 나나 사힙을 페슈와로 인정하였다. 푸네에 있는 페슈와 기념물에 간혹 나나 사힙이 끼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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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나 사히브. 관용명을 따라 나나 사힙으로 적음. [2] 비슷한 시기에 훗날 세포이 항쟁에 가담하는 락슈미 바이도 남편인 강가다르 라오가 죽자 요절한 아들을 대신해 남편 쪽 친척인 다모다 라오를 입양했지만, 동인도회사는 양자의 상속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3] 이 시점에서 나나 사힙은 여전히 부유하였으므로 돈 문제만으로 반발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