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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7 09:34:37

나가타 테츠잔

<colbgcolor=#000,#000000><colcolor=#fff,#dddddd> 나가타 테츠잔
[ruby(永, ruby=なが)][ruby(田, ruby=た)][ruby(鉄, ruby=てつ)][ruby(山, ruby=ざん)] | Tetsuzan Nagata
파일:240px-Tessan_Nagata_2.jpg
출생 1884년 1월 14일
일본 제국 나가노현 스와시
사망 1935년 8월 12일 (향년 51세)
일본 제국 도쿄도
국적
[[일본 제국|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학력 스와 고등학교
일본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교
직업 군인
소속 일본 제국 육군
황도파 통제파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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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제국 육군의 군인으로, 일본 군벌 통제파의 초대 영수이자 중심 인물이었다. 일본 육군성 군무국장, 참모본부 제2부장, 보병 제1여단장 등을 지냈다.

2. 생애

1884년에 지금의 나가노현 스와 시에서 태어났다. 나가타는 일본 육군 유년학교,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모두 수석을 차지하고, 일본 육군대학교도 2위로 졸업한 뛰어난 수재로 군무 관료로서의 길을 걸어 장래의 일본 육군 대신 재목으로 거론되는 인물이었다.[1]

본래는 황도파의 일원으로서 군에 의한 국가개조를 꿈꾸었으나, 황도파의 수장격이었던 아라키 사다오 대장이 육군대신에 취임하고도 변혁 실행에 미온적이었을 뿐 아니라 자파 위주의 인사를 강행하자 이에 실망한다. 장차 다가올 전쟁의 양상을 국가총력전으로 보았던 나가타의 입장에서, 아라키의 파벌인사는 국가의 통일을 저해하는 악행이었으므로, 나가타는 아라키와 황도파를 실각시켜야한다는 결론에 이르었다. 그가 이끄는 통제파는 친기득권, 귀족주의적, 보수적 성격으로서 또한 천황의 정치 개입을 반대한다. 민간인의 문민통제를 존중하지만 군부가 문민통제에서 한 축의 중심이 되어 정치를 이끌고 외교적으로 소련과는 평화를 유지하고자 했으며 귀축영미로 대표되는 서방세력과 중국을 적대하는 대외정책을 주장하고 세력을 규합하여 도조 히데키 등과 황도파를 저지하고자 이런 앞선 주장을 도모할 통제파 파벌을 구성한다.

이후 육군성 군무국장[2]에 취임하여 황도파 거세를 위한 공작에 착수하였으나, 이러한 나가타의 행보에 황도파 측은 격노하였다. 나가타의 입안에 따라 결국 황도파의 중심 인물이었던 육군 대장 마사키 진자부로(眞崎甚三郎)를 교육총감직에서 경질 요청한 것을 계기로, 군무국장실에서 일본 육군 중좌 아이자와 사부로(相沢三郎)에게 군도로 참살되었다. 사망 당시 육군성 군무국장으로 계급은 육군 소장이었으며, 사망 후에 육군 중장으로 승진되었다. 범인 아이자와 사부로는 범행을 저지르고 나서 도주했다가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재판에서 아이자와 사부로는 '자신이 죽인게 아니라 아마테라스께서 나의 몸을 빌어 나가타를 벌한 것'이라는 주장을 했고, 1936년 5월 7일에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6월 30일에 사형에 처해진다.[3]

나가타의 암살 이후에 통제파와 황도파의 파벌 분쟁은 한층 더 심화돼, 후에 황도파의 청년 장교들이 2.26 사건을 일으키기에 이른다. 그 후에 나가타가 일인자였던 통제파는 나가타의 지위를 도조 히데키가 계승해 일본을 태평양 전쟁으로 몰아넣었다.

3. 여담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이시이 시로가 '각하, 중국 인구는 4억입니다. 총탄 한 발씩만 쏴도 4억 발입니다.' 운운하며 세균전의 필요성을 역설했을 때, '이시이, 자네 뜻을 마음껏 펼쳐보게.' 라며 세균전 연구를 후원해 준 군부 인사가 있다고 나오는데 정현웅의 소설 마루타에서는 그 자가 나가타 데츠잔으로 나온다. 물론 픽션일 뿐이지만 저 이야기가 나온 원전은 일본어 중역의 흔적이 다분한 1960년대의 태평양 전쟁 논픽션 다큐멘터리다. 사실 여부를 떠나 나가타 데츠잔이 이시이 시로를 후원했다는 소문이 일본 본토에서도 있었던 듯하다.


[1] 당시 육군성에선 군정 재능으로는 나가타 위에 아무도 없다라고 평가 받고 있었다. [2] 당시 육군성 군무국장은 모든 정부 부처 관료 직위중 가장 실세였던 요직으로 평가받았다. [3] 훗날 이 사건을 아이자와 사건이라 불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