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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5 09:15:55

나가사키 청국수병 폭동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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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崎事件 (ながさきじけん)
長崎清国水兵事件 (ながさきせいこくすいへいじけん)
長崎事件
鎮遠騷動

1. 개요2. 배경3. 전개4. 결과5. 영향6. 참고 문헌

1. 개요

1886년 8월 13일 8월 15일, 나가사키에 기항한 청나라의 최신식 전함 정원호의 청나라 수병들이 나가사키에 상륙하여 일본 군경과 충돌하였고 흥분한 나가사키 시민이 청국 수병을 공격해 수많은 사상자를 낸 사건이다.주의할 점은 문서의 제목처럼 청국 수병이 폭동을 일으킨 것이 아니다. 오히려 청국 수병과 일본 경찰 • 일본군의 다툼 정도로 끝낼 수 있는 사건을 흥분한 나가사키 시민들이 칼을 들고 청국 수병을 공격하면서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사상자도 청국 수병이 더 많았다.일본어 위키백과에서도 長崎事件이라고 표제어가 되어있다.

2. 배경

1877년, 청나라 유학생 유보섬이 독일 제국 슈테틴[1]의 불칸 조선소를 방문하여 최신 장갑함 작센의 진수식에 참여했다. 유보섬은 이홍장에게 독일제 전함의 성능을 높이 평가하는 보고서를 보냈고 이홍장은 독일제 전함이 영국제 전함보다 뒤지지 않는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이에 1880년, 이홍장은 주독 청국공사 이봉포를 통해 독일 제국 측에 장갑함 2척과 어뢰정 10척을 발주하였는데 이 장갑함이 당시 동아시아 최강의 함선이었던 정원과 진원이었다. 정원은 1881년 12월 28일, 진수하여 1885년 11월 청나라에 인도되었다.

정원과 진원은 제조국인 독일조차도 보유하지 못한 최신식 전함으로 아시아에서 정원에 비할 수 있는 함선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전세계를 통틀어도 정원보다 큰 전함이라고는 영국 측이 보유한 데바스테이션급 2척과 드레드노트급 1척, 넵튠급 1척, 인플렉시블급 1척 등 5척 밖에 없었다. 이중에서 장갑, 무장, 중량 면에서 모두 정원을 능가하는 전함은 인플렉시블 뿐이었다. 만약 정원과 진원이 조금만 빨리 더 인도되었어도 청불전쟁의 전황이 뒤바뀔 정도의 전력이었고 함께 진수된 10척의 어뢰정 및 영국에서 구입한 순양함들까지 인도되자 북양함대는 어마어마한 전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3. 전개

단숨에 동북아시아 최강의 해군력을 보유하게 된 청나라는 당시 최대 경쟁국이던 일본을 상대로 함대를 과시하고자 했다. 1886년 7월, 정여창 제독은 정원과 진원, 순양함 제원(濟源), 위원(威遠), 양위(揚威), 초용(超勇) 등을 이끌고 나가사키, 부산,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방문항해를 계획하였는데 이는 거문도 사건으로 조선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이 강화되자 조선에 대한 열강의 간섭을 견제하기 위해 북양함대의 위용을 뽐내고자 한 것이었다. 또한 당시 청나라는 길림성의 동쪽 국경 문제를 놓고 러시아 제국과 협상하고 있었는데 이때 러시아와 담판한 오대징 일행을 귀국시키는 목적도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기항한 북양함대는 초용과 양위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대기시키고 진원, 정원, 제원, 위원 4척만 데리고 1886년 8월 10일, 연료 보급과 선저 수리를 명목으로 나가사키에 입항하였는데 나가사키 시민들은 경악에 휩싸였다. 당시 정세를 다룬 <나가사키현 경찰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에 대한 일종의 데모행위였다. 산과 같은 갑철함이 항구 안을 누르고 닻을 내린 형상은, 시민들에게 공포심을 안겼다.

당연히 정여창이 나가사키에 심심해서 입항한 것은 아니었고 정원과 진원의 위용을 과시함으로 러시아, 일본, 조선 전역에 청국의 해군력을 과시하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당시 나가사키는 오랫동안 콜레라와 이질이 유행하고 있어 많은 희생자를 내고 있었고 이 때문에 분위기가 흉흉하였는데 전염병의 원인으로 외부인들이 지목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마어마한 청국 함대가 입항하자 나가사키 시민들은 공포와 더불어 적개심을 느꼈다.

이어 청나라 장교단이 상륙했으며 400명의 청국수병들이 상륙하였다. 그러던 중 8월 13일 첫번째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물건을 구매하던 청나라 수병이 일본 경찰과 말다툼을 벌이게 되었는데 언어가 통하지 않아 결국 싸움으로 번졌고 일본 경찰 1명이 중상을 입고 수병 1명이 경상을 입은 것이었다.

본격적인 충돌은 8월 15일 일요일 오후에 벌어졌다. 나가사키 유곽에서 다시 청국 수병들과 일본 경찰이 충돌하였는데 이것이 패싸움으로 번졌는데 문제는 흥분한 나가사키 시민들이 칼을 들고 청국 수병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싸움의 규모는 겉잡을 수 없이 확산되어 결국 3시간의 난투극 끝에 경찰 사망자 2명, 중경상자 29명이 발생하였으며 청나라 수병 측은 사망자 8명, 중경상자 42명이 발생했다. 이때 나가사키에서는 영국군 군사고문 랭 대령이 나가사키 항을 포격하자고 정여창 제독에게 요청하였다는 소문이 돌아 나가사키 시민들의 공포는 더욱 심해졌다. 청나라와 일본은 모두 상대측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며 비난을 퍼부었다.

이 사건을 보고받은 이홍장은 심상치 않은 일이라고 여겼다. 마침 위안스카이로부터 고종이 알렉산드르 3세에게 조선에 러시아 함대를 보내 보호를 요청했다는 보고가 들어온 상태라서 이홍장의 신경은 매우 날카로운 상태였다. 이홍장은 남양수사 제독 오안경에게 순양함 3척을 비롯한 군함 4척을 거느리고 인천에 출동하라고 지시하는 한편 주일청공사 서승조에게도 정원과 진원의 수리가 끝난대로 조선으로 출동하라고 지시했다. 청일 양국은 공동으로 조사단을 파견하였으며 북양함대는 2주 간 나가사키에 발이 묶였다가 8월 27일이 되어서야 인천으로 떠났다.

4. 결과

1887년 2월, 청일 양국은 쌍방 사상자들에게 조위금을 지불하고 사건 관계자들을 자국 법률로 처리하는 것으로 합의를 이루었으며 1891년과 1892년에 일본 측의 요청에 따라 북양함대가 화해의 의미로 일본의 시모노세키, 구레, 세노타이카이, 요코스카를 순회방문하였다. 1886년과 달리 1891년과 1892년 방문은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도쿄에서 정치가, 신문기자들을 초청하여 정원을 견학시켜주기도 했다.[2] 정여창 역시 나가사키 사건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수병의 군기를 엄격히 통제하며 상륙한 수병과 장교들의 주점 출입을 자제시켰다. 일본 언론도 청국 수병들에게 일본인이 국가선린을 위해 예의를 갖출 것을 호소하며 일본인이 구미인을 외경하여 청국인을 경멸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는 크게 잘못된 생각이라고 중국 경멸 사상을 질타하였다. 1891년 방문에서는 요코하마 선상에 일본 황족 기타시라카와, 마쓰카타 마사요시 내각총리대신 등 일본 정재계 요인과 군인, 기자들 500명을 초청하여 대연회를 베풀었다.

5. 영향

이 사건으로 대단히 충격을 받은 신임 해군경 사이고 쥬도는 함선 조달 예산을 위해 1700만엔에 달하는 해군공채를 발행하여 총 54척, 6만 6300톤에 달하는 신조함을 입수하자는 계획을 제출하였고 이는 1886년 6월 각의에서 통과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군비 문제에서 고생이 많았는데 이 나가사키 사건으로 청 측에 대한 일본의 공포와 적개심이 높아지면서 일본의 건함 사업에는 더욱 박차가 가해지게 되었다. 그 결과 8년 뒤 청일전쟁에서는 배수량의 격차에도 불구 해전에서 승전하게 된다.

또한 겐요샤를 비롯한 일본의 우익단체들이 본격적으로 국권주의 운동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6. 참고 문헌



[1] 현 폴란드 자호드니오포모르스키에 슈체친. [2] 문제는, 북양함대가 이 때 일본 해군에게 아예 함내를 견학시켜 주는 등, 군사기밀을 완전히 유출하는 바보짓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은 이 때 얻은 정원을 비롯한 청나라 함대의 내부구조 정보를 결코 잊지 않고 청일전쟁 때 충분히 이용했다. https://www.chosun.com/opinion/column/2022/02/09/EW6XLWUSRNHNVB72S25OU7L3K4/